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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아침 식사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와 나흘라는 괴로워하는 이보를 겨우 침대에서 끌어내어 리셉션으로 갔다. 어제 내가 야경을 봤던 그 테라스가 이 호스텔의 공동 휴게실이자 식당이었다. 다른 방에서 중국인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커플이 나온다. 아침은 간소하게 달걀 한 알과 차 혹은 커피, 그리고 빵과 치즈·잼이었다. 카이로의 강한 아침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아침을 먹고 있는데 아까 봤던 그 커플이 우리와 같은 쟁반을 들고서 테라스로 들어온다.

"우리 여기 같이 좀 앉아도 될까요?"

굿모닝 카이로!

웨이크 업 카이로의 아침
 웨이크 업 카이로의 아침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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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홍콩 출신의 조안나와 북경 출신의 레오. 그들은 파리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란다. 우리도 간단히 소개를 한 뒤 오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조안나가 자기들은 이집트에 처음이고 사실 아는 것도 없어 너무 막막하다며 동행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우리 셋은 "안될 게 뭐야"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침을 먹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이보가 보이지 않는다. 밖을 보니 180cm가 넘어 보이는 장신의 서양인 여성 둘과 그새 말을 트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서는 다가와 물었다.

"소피, 너만 괜찮으면 저 캐나다인 여자 두 명도 함께 우리랑 갈 수 있을까? 나흘라는 괜찮대."

난 그저 아까처럼 "Why not?"(안 될 건 뭐겠어?)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행 중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여행 그 자체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 여행자들 중 다수는 어쩌면 그들이 모르는 새로운 그 어떤 것을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어느 순간부터 당연해져버린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출. 그러나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곳에서의 여행은 언제나 새것의 경이로움 뿐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까지도 일깨워 주곤 했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사람이 평생을 알고 지낸 것처럼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있었고, 일상이 아니라 잠깐 스쳐 지나가는 길 위에서 만나서 다행이다 싶은 악연도 있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이들과 함께 하루 정도 동행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거나 지레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었다. 겪어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고 그 만남이 좋든 혹은 나쁘든 언제나 모든 것의 끝에는 배움이 있었다. 마음이 잘 맞으면 좋은 인연이 될 것이고 그게 아니면 그저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러 자연스레 각자의 길을 가면 그만인 게 여행이니 말이다.

카이로의 지하철, 타보셨나요?

카이로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지하철 표시.
▲ 지하철 카이로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지하철 표시.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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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우선 올드 카이로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잠시 이집트의 지하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이집트는 유일하게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하철을 가진 국가다.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3호선을 빼면 총 두 개의 호선이 카이로 곳곳을 잇고 있다. 여행자들의 발길이 닿는 웬만한 곳은 지하철로 갈 수 있다. 심지어 피라미드까지!

2년 전보다 50원가량 뚝 떨어져버린 환율과 그 때문에 1.5배는 오른 듯한 현지 물가에도 여전히 지하철 티켓은 1기니였다. 이집트 화폐의 공식 명칭은 이집션 파운드(EGF)다. 그러나 아랍어로 된 정통 명칭은 '주나이하(جنيه)'이고 이집트 사람들은 이집트 사투리로 그것을 줄여 '기니'라 불렀다. 최근 환율로 따지자면 1기니는 150원이 채 되지 않는다. 환승을 해도, 수십 정거장을 가도 복잡하게 불어나는 추가요금 따위는 없었다. 이집트에서는 그저 지하철 한 번에 1파운드면 '땡'이었다.

우선 카이로의 지하철의 외관부터 말하자면, 에어컨 대신 창문이 달려 있다. 더워서 창문을 열면 비교적 시원하지만 모래나 먼지가 잔뜩 섞인 바람이 지하철 칸 안으로 밀려들어온다(흠, 그러니 코딱지가 생길 수밖에). 게다가 다음 역을 알려주는 방송 따윈 없다. 그냥 각자 알아서 자신이 내려야 할 곳을 보고 내려야 한다. 단 하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슬람의 가르침대로 여성 보호를 중시하는 문화 때문에 여성 전용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뭐 가끔 장난꾸러기 10대 소년들이나, 편하게 앉아가려고 꼼수를 부리는 뻔뻔하고 늙수그레한 아저씨들이 버젓이 여성칸에 타기도 한다. 그들은 예외 없이 다음 역에 도착하기까지 2~3분 동안 기 센 이집션 아줌마들의 집단 비난을 받아야 한다. 한 번은 다음 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찰이 아저씨를 잡아 간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지하철은 다이내믹한 공간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황당했던 일, 가장 괴로웠던 일, 가장 부담스러웠던 일 등을 이집트에서 경험했는데 그중에서도 지하철은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사건의 장이기도 했다.

여성칸의 내부, 늘 사람이 많아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 지하철 내부 여성칸의 내부, 늘 사람이 많아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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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객실 안, 볶은 해바라기씨를 먹고 "투, 투" 하고 뱉어내는 사람들 덕에 바닥은 언제나 씨앗 껍질 투성이다. 하지만 그 모습 또한 무척 이집트스러웠다. 너무 행복했다. 이집트가 이집트 다울 수 있어서.

여성칸이 꽉 차 남성칸을 타는 날은 단단히 각오를 해야 했다. 히잡을 쓰지 않은 동양 여성을 훑어보는 노골적인 혹은 호기심 잔뜩 담긴 시선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을 무시하거나 혹은 마주 바라보며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강심장이 필요하다. 종종 만날 수 있는 이집션 변태의 손목을 잡아채 비틀어 꺾어버릴 수 있는 용기도 필수.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들의 체취로 푹푹 찌는 실내에서 질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했다. 150대 초반의 키를 가진 내가 남성 칸에 탈 때마다 정면으로 마주했던 것은 땀에 절은 그들의 겨드랑이였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이후 나는 여자 칸이 만원이면 차라리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쪽을 택하곤 했다.

하루는 표를 사러 매표 창구에 갔다. 잔돈이 없어 20파운드(당시 한화 4000원)를 내미니 내게 돈을 도로 돌려준 채 표를 주질 않는다. 혹시 내 말을 이해 못했나 싶어 검지를 들고선 '하나'를 만들며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한 장만 줘요."
"잔돈 없어. 표 못 팔아."

지금 이 남자가 대체 뭐라는 건지. 거슬러 줄 돈이 없다는 이유로 매표소에서 표 팔기를 거부하는 매표원이 있는 곳, 그곳은 이집트였다. 황당해하고 있는 나를 옆에서 보던 아주머니가 자신의 지갑에서 한 장을 꺼내 선뜻 건네줬다. 돈을 받지 않고 표 한 장을 낯선 이에게 선뜻 건네는 곳, 역시 그곳도 이집트였다.

다음 날이었다. 당당하게 5파운드를 매표소에 냈더니 또 잔돈이 없다며 이번엔 잔돈 대신 표 다섯장을 건네줬다. 여기 정말 뭐지? 도통 알다가도 모르겠다.

파라오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니고... 기독교라고?

다행히도 이번에는 별 탈 없이 모두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여성들은 따로 여성칸에 탔는데, 내가 깜빡하고 이보와 레오에게 내려야 할 역을 알려주지 않아 이보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던 것만 빼면, 그리고 도착역에서 다시 만난 두 남자의 얼굴이 다소 창백했던 것만 빼면 말이다.

카이로의 중심, 사다트(Sadat)역에서 우린 1호선을 타고 마르 기르기스역(Mar Girgis)으로 갔다. 마르 기르기스 역은 그 출구부터 바로 카이로의 발상지 올드 카이로의 시작이다. 올드 카이로는 말 그대로 오래된 카이로 지역이다. 크게 카이로는 올드 카이로(Old Cairo)와 이슬라믹 카이로(Islamic Cairo) 그리고 뉴 카이로(New Cairo) 정도로 나뉘는데, 올드 카이로는 이집트에 뿌리를 둔 '콥트 기독교'의 문화가 남아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올드 카이로를 콥틱 카이로(Coptic Cairo)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르기르기스 역에서 내리면 보이는 성 조지 교회의 모습.
▲ 마르기르기스 마르기르기스 역에서 내리면 보이는 성 조지 교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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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나라 이집트에서 '오래된 카이로'가 어떻게 '기독교 지역'이 될 수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집트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전, 이집트인 다수는 기독교도였다. 이집트 땅에서 기독교가 시작된 것은 서기 42년쯤이며 이슬람 군이 이집트를 정복해서 콥틱인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해 많은 콥틱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에는 대부분이 콥틱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십자가의 형태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생명을 뜻하는 앙크(Ankh) 문양과 비슷했고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 또한 이시스가 호루스를 안고 있는 모습과 비슷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독교를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나 또한 이전부터 이집트는 파라오의 나라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슬람의 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리스정교회와 함께 동방정교회에 속해있는 아주 오래된 기독교 역사를 가진 국가라고 했다.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중 하나인데다 파라오의 나라, 이슬람의 나라, 게다가 기독교의 역사 또한 만들어졌던 이곳 이집트. 분명히 이 땅엔 특별한 '기'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올드 카이로? 거기엔 뭐가 있는데?

올드 카이로에서 중요한 장소는 크게 로만 타워와 그 옆에 있는 콥틱 박물관 그리고 성 조지 교회와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 중 하나인 성 세르지우스 교회다. 또 유대인들의 예배당인 벤 에즈라 시나고그와 공중 교회라고 불리는 무알라까 교회도 중요한 장소다.

우리는 성 조지 교회와 공동묘지를 둘러 본 뒤 성 세르지우스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성 조지 교회는 보수공사 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묘지 부근을 둘러보고 성 세르지우스 교회로 가기 위해 조지 교회를 나왔다. 성 세르지우스 교회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해서 한 달 동안 머물렀던 동굴의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교회를 아기 예수 피난 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 교회로 가기 위해 아래로 쭉 이어지는 오래된 길을 더 좋아했다. 마치 예루살렘 성 안의 복잡하고 꼬불꼬불한 골목의 일부를 옮겨놓은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드는 그 골목은 약간은 어두운 그늘과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환경 아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기 예수님이 계실 적의 사람들이 지금도 긴 옷을 바닥에 끌며 걸어 다닐 것만 같은 골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전히 수많은 가난한 콥틱인들이 살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엽서를 내밀고서 또 다른 관광객들에게 배웠을 서툰 '캄싸합니다'를 연발했고, 헝클어진 머리의 아이들은 나를 보며 쪼르르 달려와 눈을 맞추고선 내가 그들을 향해 손을 뻗으면 수줍은 듯 왔던 곳으로 다시 쪼르르 내달리곤 했다.

오래되고 고요한 골목
▲ 성 세르지우스 교회로 가기 위해 내려가야 하는 골목. 오래되고 고요한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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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처럼 돼 있는 교회의 내부로 들어가면 꽤나 넓은 내부에 꽉 찬 차분한 향초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곳에는 총 열두 개의 대리석 기둥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의미하며,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유다를 의미하는 기둥만 흰색이 아니라 붉은 대리석으로 세워져 있었다. 아기 예수의 가족이 머물렀던 지하 동굴은 지하수가 차 있어서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교회를 나와 시나고그로 가는 길, 쓰려져가는 집에서 아이가 나를 계속 쳐다본다. 인사를 해도, 손을 흔들어도 답이 없다. 동그란 눈을 내게 고정시킨 채 고사리 손으로 벽을 부여잡고선 그저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기만 한다. 조금 뒤 엄마가 나와 나를 바라본다. 인사를 하고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묻자 그녀는 대답대신 환하게 웃어줬다. 찍은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하자 아이의 엄마는 계단을 내려와 카메라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마음에 든다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아까부터 나를 가이드쯤으로 대하던 레오가 얼른 가자며 나를 재촉한다. 조금 신경질이 나서 "앞에 가던 애들 따라가"라고 대꾸하고서는 다시 아이의 엄마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나중에 레오와 동행한 것을 얼마나 후회하게 됐는지 말이다. 아이 엄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는 다시 시나고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골목에서 만난 아이와 그 엄마.
▲ 올드 카이로 골목에서 만난 아이와 그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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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집트, #카이로, #올드 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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