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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홍해의 바다와 따뜻한 날씨와 비교적 저렴한 관광지물가에 다합을 찾는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 여행자들의 무덤, 다합. 맑은 홍해의 바다와 따뜻한 날씨와 비교적 저렴한 관광지물가에 다합을 찾는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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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이동하기

입국 신고를 호되게 치른 뒤 빠져나온 누웨이바 항구에는 어느새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브라질 청년은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다합(Dahab)'으로 간다며 우리와 작별했다.

이제 우리는 누웨이바에서 카이로로 가야한다. 시나이 반도 끝에 위치한 누웨이바 항구에서 아프리카의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국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까지 가는 데 버스로 걸리는 시간은 장장 9시간 반. 시나이 반도가 아프리카와 아시아 두 대륙을 구분 짓는 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륙에서 또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데 아홉시간 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곳에는 누웨이바와 가까운 홍해 휴양지 다합으로 또 샤름 엘 셰이크(Sharm El-Sheikh)로 관광객을 태워가기 위한 수십 대의 택시가 있었다.

아름다운 블루홀과 다른 홍해의 휴양지보다 비교적 저렴한 물가 덕분에 세계 각국의 다이버들과 배낭 여행자들이 모이는 그곳 다합. 한적한 작은 마을 같은 다합에서는 '하루만, 이틀만' 하다가 여행의 남은 일정을 모두 써버리는 이들을 보는 것이 흔했다. 더러는 아예 무기한으로 그 곳에 눌러 앉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합을 '여행자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합과 가까운 샤름 엘 셰이크. 다합이 저경비 여행자들을 위한 천국이라면 샤름은 걸프 지역의 석유 부자들과 전 세계 갑부들이 모이는 휴양지였다.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최고급 호텔들이 연이어 자리 잡고서는 해변조차 호텔의 사유지가 되어있는, 철저히 외부인만을 위한 호화로운 휴양지였다.

물론 우리의 선택은 다합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이집트 여정은 다합에서 다이빙 자격증을 따는 것으로 마무리가 될 것이었다.
 
오마이갓! 왜 하필 저 버스인지

버스의 외관
▲ 슈퍼제트 버스의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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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대의 택시들 옆에는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우리나라의 작은 승합차와 꼭 같은 미니버스가 늘어서 있었고, 그 옆엔 분명히 우리가 타야 할 카이로 행 버스도 포함되어 있을 장거리용 대형버스들이 보였다.

'이보'와 나는 재빠르게 터미널에 있는 버스들을 살폈다. 낡은 차체 위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 회사의 이름조차 알아보기 힘든 버스가 눈에 띈다. 'SUPER JET(슈퍼 제트)'. 외관과는 정반대의 이름을 가진 버스다. 속으로 기도한다. 제발, 저 버스만은 아니기를.

입국 심사장과 누가 더 초라한가 경쟁이라도 하는 건지 이곳 또한 주요 도시를 잇는 터미널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거의 쓰려져가는 두어 개의 지저분한 의자와 지붕만 덩그러니 얹어져 있는 건물이 보인다.

입국장이 청과물 시장 같았다면 바다가 보이는 이곳은 수산물 시장 같다. 바닥이 물바다가 아닌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황폐한 그 곳에 단 하나 사무실처럼 보이는 곳에 가니 티켓을 파는 매표소다. 카이로행 버스에 대해 물었다. 한 시간 뒤 '저 버스'가 카이로로 간단다.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쭈욱 돌리니, 오 마이 갓! 무슨 대본이라도 짜여져있는 듯, 수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까 그 낡고 허름한 버스가 당당하게 서있다. 무슨 우연인지 머피의 법칙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많고 많은 확률을 뚫고 하필 저 버스인지.

아랍어로도 슈퍼제트라고 쓰여져있다.
▲ 슈퍼제트버스 아랍어로도 슈퍼제트라고 쓰여져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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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겨자먹기로 티켓을 구입하고 벤치에 앉아 배낭을 내려 놓았다.

"Well, that's life. There is nothing we can do about it(뭐, 인생이 이런거지.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어)."

이런 일쯤이야 수백 번도 넘게 겪어 보았을 이보가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한 마디 던진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더 이상 불만을 털어놓을 힘조차 없었던 것 같다. 오랜 여정과 충분하지 못했던 수면 탓에 그저 버스에 타자마자 곯아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우리는 이 버스를 타게 될 것이었다. 더 좋은 버스를 타겠다고 이곳에 언제까지나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기로 무언의 약속이나 한 마냥 굳게 입을 다문 채 그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이집트의 이런 '예상 밖'의 상황들을 사랑했다. 모든 것이 편안했던, 그리고 그 편안함이 평생 동안 당연하게 여겨져왔던 내게 이집트에서의 생활은 시작부터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정말 단 하루라도 그저 조용히 흘러가는 법이 없는 곳.
 
언제나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곳. 짓궂은 이집트 남자들의 희롱에 화가나서 엉엉 울다가도 한국에선 절대 용납될 수 없는 현대식 '상식'을 초월하는 일들로 다시 나를 얼빠지게 만든 후, 3초쯤 뒤면 그 신선한 황당함에 배꼽이 도망갈 정도로 날 웃게 하던 곳. 울고 웃고를 반복시키던 '나쁜 남자' 같았던 나라. 내가 매순간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삶'이 존재하는 그곳. 그래서 나는 그리도 이집트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만약 내가 대부분의 대중교통이 제 시간에 딱딱 맞춰 도착하는 깨끗하고 편안한 여행을 원한다면 유럽을 가면 될 터였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곳은 이집트였다. 나는 이 9시간의 버스 여행이 페리 이동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페리처럼 좌석이나마 조금 편안하기만 바라기로 했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보이는 것들

이집트 시간으로 '한시간 뒤' 라고 얘기 했으니 아마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 쯤 뒤에 출발 할 것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짐을 옮기느라 바쁜 이집트인들을 구경했다. 이미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군데군데 표면이 일어난 나무 벤치에 앉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 앉았다 갔을까. 가까이서 보니 달리 페인트를 칠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이들의 엉덩이와의 마찰로 인해 반질반질하게 때가 탄 의자는 예상보다 편안했다.

그곳에 앉아 앞을 보니 포장도 되어있지 않은 흙바닥에서 마른 사막의 모래가 사람들과 차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뿌옇게 일어났다가 가라 앉곤 했다. 또 그것이 가라 앉기가 무섭게 다른 이들이 바쁘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조금씩 주변 풍경을 눈에 담다보니 그제서야 이곳에서 일을 하는 듯한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커다란 짐을 들고 입국장과 터미널에 주차된 버스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아마도 약간의 돈을 받고 대신 짐을 날라다 주는 것 같았다.

허술해보이는 바퀴를 가진 리어카에 그 크기의 최소 네배에 달하는 짐을 싣고 앞뒤로 두명의 남자가 리어카를 밀고 끈다. 바퀴달린 저 차(車)가 제 역할을 하고는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네 남자의 팔과 다리가 온전히 저 거대한 짐들을 지탱하는 듯 보였다.

그 중 한 남자에게 눈이 갔다. 단지 허름하고 지저분한 옷차림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들어보이는 그는 그들 중 가장 젊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마른 몸을 덮은 것은 군데군데 찢어진 티셔츠였지만 그 구멍들 사이로 보이는 그의 그을린 피부에서는 일한 만큼 흘리고 있을 땀방울이 보이는 듯 했다. 노동의 강도만큼 흐르는 정직한 노동의 흔적.

살다보면 종종 삶의 무게나 그가 속한 사회의 자리와는 상관없이 내면에서 나오는 빛으로 반짝거려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눈의 생김새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의 깊이만큼 깊어지고 맑아져서 발하는 아름다움. 언제나 '좀 더 쉽게 좀 더 편하게'를 좇는 내게 주어진 육체로 온전히 노동을 하며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은 존경스럽게 다가온다. 같은 것을 보고 있었는지 혹은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이보가 옆에서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Whenever I see the people who have hard working nobody wants to do, I really want to show my respect to them(나는 저들처럼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누구나 꺼리는 일을 기꺼이 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싶어져)."

하루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떠나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요르단의 페트라. 이보와 그곳을 처음 여행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묵묵히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시는 분들을 볼 때면 가슴에 오른손을 얹어 존중을 표하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때도 그들을 보며 지금과 같은 말을 했었다.

그가 건넨 것은 적선도 동정도 아닌 진심 어린 인사였다. 돈이나 권력에 대한 경의가 아닌, 인간 그 자체의 존엄성에 대한 경의. 그리고 턱없이 적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비록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가장 낮고도 가장 어려운 일에 대한 존경이었다. 고된 여행에서 이런 마음을 함께 느끼는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동감의 의미로 살며시 웃어 주었다.

살다살다 이렇게 요상한... 아홉 시간이 까마득

긴장이 풀리니, 그때서야 배고픔이 뒤늦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옆을 보니 단지 배가 주린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셋 모두 가진 음식이라고는 과자와 사탕 뿐이었다. 어젯밤부터 제대로 된 음식구경을 못한 우리는 초콜릿이나 사탕이 아닌 '진짜' 음식이 너무나 고팠다. 카이로에 도착하자마자 편안한 숙소에 짐을 풀고 든든한 저녁을 먹으리라 다짐하며 애써 배고픔을 무시해 본다.

주린 배와 피곤한 몸을 의자에 의지한 채 한시간이 지났을까, 버스에 시동이 걸리더니 남자가 창 밖으로 몸을 빼고선 타라는 손짓을 보내왔다. 그래, 낡았다 한들 벤치보다는 편하겠지. 얼른 가방을 들어 버스에 탔다. 그런데 버스 안을 보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밖에서 볼 땐 분명히 45인승 대형버스였는데 안에 들어와보니 그 절반 밖에 보이지 않는다.

뭐지? 버스 중간에 칸막이라도 설치한 건가? 앞쪽은 남자가 앉고, 여자는 뒤칸에 가야하는 건가?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 뒤를 보니 내가 알고 있는 45인승의 대형버스가 확실하다. 내 눈을 믿지 못해 다시 내려 뒷칸으로 가는 다른 문은 없는지 살펴보며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맙소사, 버스의 반이 짐칸이다. 버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뒷칸의 정체는 '화물용 공간'이었던 것이다. 정말 살다살다 그렇게 요상한 버스는 처음 보았다. 짐칸이 승객 좌석보다 많은 버스라니.

게다가 스무 개 남짓해 보이는 좌석은 정말로 좁다. 두 좌석씩 양쪽으로 총 다섯줄이 전부다. 티켓에 쓰여진 대로 자리를 잡고 앉으니 150대 초반의 작은 내 키에도 불구하고 앞 좌석과 무릎이 딱 맞닿는다. 옆을 보니 나보다 키가 큰 '나흘라'는 상황이 더 안 좋아 보였다. 게다가 우리는 귀중품 때문에 배낭을 들고 탔는데 무릎과 앞좌석 사이에 가방을 두니 그야말로 옴짝달싹 할 공간조차 보이질 않는다.

좁고 불편했던 슈퍼제트버스.
▲ 슈퍼제트버스 내부 좁고 불편했던 슈퍼제트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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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이 아플 정도로 뒤로 당겨진 의자를 지탱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가방을 모두 끼워넣었다.
 무릎이 아플 정도로 뒤로 당겨진 의자를 지탱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가방을 모두 끼워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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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다른 승객들이 버스에 탑승했다. 곧이어 나와 나흘라의 앞에도 중년의 무슬림 남성 두 명이 앉았다. 그런데 그 중 한 남자가 나흘라 앞좌석에 앉는 순간, 그 어떤 양해도 없이 의자가 뒤로 훽 하고 젖혀진다. 이런 몰상식한 일은 나도 처음이라 당황하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더니 조금 어두워진, 하지만 여전히 똑부러지는 그 표정으로 다시 약간 의자를 앞으로 밀어내며 공손하게 그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남자의 의자가 앞으로 조금 당겨지나 싶더니 다시 뒤로 젖혀진다.

이보 옆 빈자리에는 젊고 건장한 남자가 들어와 앉는다. 그와 함께 있으니 이보가 앉은 자리가 굉장히 협소하게 느껴진다. 그때 버스기사가 표를 걷으러 들어왔다. 이젠 이미 늦었다. 갑자기 앞으로의 아홉 시간이 까마득해진다.


태그:#이집트, #가다툰, #누웨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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