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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고든의 데뷔작 <시리얼리스트> 겉표지
 데이비드 고든의 데뷔작 <시리얼리스트> 겉표지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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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당신 앞으로 한 가지 제안이 도착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볼까. 만약 근근이 살아가는 당신에게 꽤나 큰 보상을 대가로 꺼림칙한 일이 주어진다면 받아들이겠는가. 일단 누구든 고민을 할 것이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혹은 일의 성격에 따라 결론은 다를지언정. 거절하겠다는 말을 선뜻 내뱉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설 <시리얼리스트>는 바로 이 고민에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은 삼류 작가다. 글을 쓸 때면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는다. 작가가 여성이어야 한다면 기꺼이 어머니의 이름을 사용했다. 그렇게 수많은 필명을 가졌다. 글도 딱히 가리지 않는다. 선정적이든 폭력적이든, 글에 자신을 맞췄다. 어떤 기회든 잡아야 했다.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만을 위한 포르노를 써달라고요?"

작가가 썼던 연재작의 팬을 자처하는 사형수가 그를 불렀다. 여성들을 잔혹하게 연쇄 살해했던 자였다. 그리고 은밀한 제안을 했다. 자신에게 팬레터를 보낸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지저분한 글을 써달라는 것. 그의 마초적 기질에 반한 마조히즘 성향의 여자들이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시켜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주면 사형을 앞둔 흉악범의 일대기를 독점으로 알 수 있다. 당연히 그가 사형당한 후에는 책으로 펴낼 수도 있다. 화제의 중심에 선 그의 이야기는 날개 돋친 듯 팔릴 것이다. 당당하게 실명으로 책을 내고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단지 그 대가는 잠깐 동안 역겨우면 될 뿐이었다. 그래, 역겹고 말지 뭐. 잠깐인데.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작가는 사형수가 지목한 여성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인터뷰 과정에서 고약한 일도 겪지만 앞으로 다가올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작가를 만난 여성들이 하나둘 살해당한다. 방금 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던 이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지금 감방에 있는 사형수가 저질렀던 수법과 똑같이! 아주 잔인하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죽음의 손아귀는 작가를 향해 옥죄어온다. 이건 뭘까. 그가 감방에서 나와 다시 살인이라도 하고 돌아다닌단 말인가. 아니면 그가 진범이 아니었던 것인가. 거기다가 작가는 범인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이쯤에서 주인공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책에서 그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건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그 심정 말이다. 여성들이 살해되고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지만, '이 역시 자신이 쓸 글의 소재가 되지 않을까'라 생각하지 않았나. 그래서 짐짓 사건의 흐름에 자연스레 몸을 맡긴 것은 아닐까. 그가 사형수의 요청을 수락하는 부분에서 힌트가 있기는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의 팁은 다른 여자의 방세가 될 수 있다. 웨이터든 스트리퍼든 누구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과 모순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모든 걸 숨기지 말라고 강요하는 힘은 뇌의 원시적인 부분인 파충류 뇌가 아닌 예술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다.(177쪽)

혼란스러웠던 작가는 진실을 향해 내달리고 소설은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과연 얽히고설킨 이 사건은 어떻게 풀릴 것인가.

작가의 삶이 투영된 소설

반전은 두 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불만 한 가지. 모든 반전 소설들이 독자들을 오답으로 유도하기 위해 적당한 장치를 한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힌트를 너무 숨겨두었다는 점이 아쉽다. 개연성을 끊어 두지는 않았으나 단서를 내보이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결말을 읽고 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었을 때, '아, 이래서 그랬구나'라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힘이 부족하단 얘기다.

그리고 이 소설이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풀어냈다는 점이다. 작가를 알면 보이지 않던 곳이 보인다.

사실 이 책의 저자 역시 사연이 많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었던 작가였다. 그가 겪었던 역할은 다양했다. 카피라이터, 대필 작가, 극작가, 포르노 잡지 필자 등 글로 먹고살 수 있는 직업들을 전전했다. 실제로 <시리얼리스트>의 기획도 포르노 잡지의 편집자로 재직 시절, 실제 수감자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내가 슬쩍 바꿔놓았거나 조합한 현실의 인물이나, 아니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어떤 사실과 날짜가 변경된 건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뢰할 수 있는 화자나 책 뒤에 숨은 작가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대필 작가일 뿐이다.(517쪽)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리고 싶었던 저자의 염원과 대박을 위해 꺼림칙한 거래를 받아들인 소설의 주인공이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평소 자신의 욕망을 글이란 도구로 분출해낸 작품이 아닐까. 그렇기에 누구보다 주인공의 속내를 구구절절이 그려낼 수 있었으리라.

반전해결을 통해 밝혀지는 진실은, 쉽지는 않으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소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삶은 소설을 능가하고 있다. 아무리 소설을 비현실적으로 쓰더라도 삶의 불확실성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아무리 빙빙 꼬인 미스터리물이라도 결국 끝은 존재하고 해답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삶은 그것이 없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각자의 대필 작가이지 않을까. 사실 이 글에도 일종의 반전을 담았다. 아직 <시리얼리스트>를 읽지 않은 독자들에 대한 작은 배려랄까. 그 반전이 궁금하다면 책을 보시길. 적당한 스릴과 과하지 않은 반전, 무더운 여름날 펼쳐 보기 괜찮은 소설이다.

덧붙이는 글 | <시리얼리스트>, 데이비드 고든 지음, 하현길 옮김, 검은숲 펴냄, 2013.06, 1만4천원



시리얼리스트 - 연재물을 쓰는 작가

데이비드 고든 지음, 하현길 옮김, 검은숲(2013)


태그:#데이비드 고든, #검은숲, #시리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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