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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근대역사박물관 3층의 생활관. 일제 강점기 치하 군산의 주요 근대 생활 시설을 재현해 놓았다.
▲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3층의 생활관. 일제 강점기 치하 군산의 주요 근대 생활 시설을 재현해 놓았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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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나오는 은행.
여주인공 초봉의 남편 직장이다.
▲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 은행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나오는 은행. 여주인공 초봉의 남편 직장이다.
ⓒ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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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진땀나는 곳이다. 월명동은 내가 사는 군산과는 '다른 군산'이다. 품행을 방정하게 해야 한다. 긴장하지 않고 있다가는 대포 카메라를 든 사람들한테 원하지 않는 사진을 찍힐 수 있다. 빵 나오는 시간이면 가게 바깥으로 한정 없이 줄을 서는 빵집이 있고, 깊은 맛으로 유명해서 텔레비전에 나왔지만 여전히 허름하고 친절한 소고기무국집이 있다.

1930년대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나온 동네가 월명동이다. 지금도 일본식 집들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절집 동국사도 있다. 거기서  학생 둘이 동국사를 배경으로 사진 찍고서는 "야, 일본 왔다고 그러자"라고 하는 걸 본 적도 있다. 우리나라 절집과는 다르게 대웅전과 요사채가 한 몸으로 붙어 있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절집이다. 대웅전과 요사채가 함께 있다.
▲ 군산 동국사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절집이다. 대웅전과 요사채가 함께 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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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 뿐만 아니라 속도 일본식이다. 방안에는 다다미가 깔려있고, 코타츠(난방기구)가 있다.
▲ 일본식 숙소 '고우당' 겉모습 뿐만 아니라 속도 일본식이다. 방안에는 다다미가 깔려있고, 코타츠(난방기구)가 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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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네에'고우당'이라는 일본식 숙소가 생기면서 군산은 스쳐 지나는 곳에서 머무는 여행지로 바뀌고 있다. 고우당은 겉모습만 그럴듯하지 않다. 방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고, 일본 만화나 드라마를 본 적 있는 사람에게 낯익은 코타츠(난방기구)까지 있다. 나는 <노다메 칸타빌레>의 노다메처럼, 코타츠 속에서 뒹굴 거리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었다.  

친구와 고우당에서 한 밤 자기로 했다. 오랜 세월 친구였지만 실물을 본 적 없는 그 친구는, 세 살과 다섯 살 아이 둘을 데리고 온다. 우리 꽃차남까지 보태면 아이 셋. 멀리 가지 않고, 월명동 안에서만 지내는 계획을 짰다. 그런데 대놓고 '왜색'인 이 거리가 찜찜하다. "나는 친일청산에 노력하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야"라고 말을 해야 할까?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은 토지조사 사업으로 조선인 땅을 뺏는 일부터 했다. 그 지독한 때에도 선량한 일본인이 있었다.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는 식민지의 일본선생을 기억했다. 그들 말을 잊지 않기 위해서 새벽마다 일어방송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어가 어색하지 않아 시험을 잘 봤다. 그런 나를 한 친구가 '친일파'라고 불러서 맘 상한 적도 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노는 아이들. 100여 년 전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를 알게 될 날 오겠지.
▲ 연호, 연진, 꽃차남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노는 아이들. 100여 년 전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를 알게 될 날 오겠지.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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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숙소는 따로 출입구가 없어서 구경꾼도 쭈뼛거리며 드나들 필요가 없다. 동네 아이들은 그걸 먼저 알았다. 학교 끝나고 가는 길에 들러서 연못에 돌을 던졌다. 그 속에 살고 있던 물고기가 다 죽고 물이 탁해지면서, 연못은 한국적인 '둠벙'이 되었다. 아이들은 눈에 띄는 목표물이 없어진 둠벙에 여전히 돌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우리 꽃차남은 열 살 많은 제 형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싸운 '무사'이기에 그 형아들에게 같이 놀기를 청했다. 태어난 지 4년, 우물 안 개구리인 어린 무인에게 강호의 세계는 냉정했다. 형아들은 떠나고, 꽃차남은 둠벙의 소금쟁이에게 눈을 돌렸다. 꽃이 피었어도 추운 4월, 꽃차남은 소금쟁이처럼 물에 뜨고 싶다고 연못에 발을 집어넣었다.

우발적으로 만났지만 반나절 내내 군산 시내를 안내해준 분. 친절한 박일성 씨.
▲ '군산연구가' 박일성 씨. 우발적으로 만났지만 반나절 내내 군산 시내를 안내해준 분. 친절한 박일성 씨.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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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한 숙소에 온 친구는 글로만 본 군산과 사진으로만 본 나를 직접 보는 일이 연예인 만나는 것 같다고 했다. 꺄뵤! 같은 환호성은 없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보고, 오늘 보는 사람들 같았다. 그런 우리 사이에 우발적으로 박일성씨가 끼어들었다. 그는 '군산 연구가'인 총각이며 우리 남편 생일날에 꽃다발을 들고 온 적 있는 해맑은 사람이다.   

그의 안내로 포목점을 해서 큰돈을 번 일본 상인의 집, 히로쓰 가옥에 갔다. 나는 평소에 집 안부터 들어갔는데 그는 정원부터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식 정원을 지나 뒤뜰로 가니 금고가 나왔다. 군산 개정초등학교에 있는 시마타니 금고처럼 건물 한 채가 통째로 금고다. 압도적으로 큰 금고에 들어있었을 조선의 온갖 귀한 것들을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

영화 촬영 장소로도 쓰였다는 일본집. 들기름 칠을 한 반들반들한 마루를 걸으면, 꼭 성주를 해치러 온 무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히로쓰 가옥 영화 촬영 장소로도 쓰였다는 일본집. 들기름 칠을 한 반들반들한 마루를 걸으면, 꼭 성주를 해치러 온 무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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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잘 들어서 사진이 예쁘게 나온다. 아기 사람들은 특별히 더 예쁘다...^^
▲ 히로쓰 가옥에서 우리집 남성동지들 해가 잘 들어서 사진이 예쁘게 나온다. 아기 사람들은 특별히 더 예쁘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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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집 안으로 들어가면, 한 때 일본 드라마에 열광했던, 내 과거가 나온다. 해가 잘 들어서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집. 들기름 칠을 한 반들반들한 마루를 걸으면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그러면 성주를 해치러 온 자객의 마음이 되어 숨죽인 흥분이 이는 집. 문화해설사가 오사카 성 같은 곳이 그런 계산된 건축을 했다고 말해도, 흘려듣고 마는 집.

내 친한 친구 '긴팔 동지'는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걱정이 생겼다. 그는 4년 전에, 일제에게 수탈당한 상처가 남은 군산의 특성을 살려서, 이 도시만이 할 수 있는 축제를 제안했다. 드디어 군산시는 올해부터 근대문화를 주제로 축제를 열기로 했다. 그래서 긴팔 동지는 더 크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근대문화가 강점기를 미화하거나 친일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쌀가마 너머로 네모난 부잔교(뜬다리부두)가 보인다. 거기를 통해서 한 해 250만석의 쌀이 일본으로 갔다.
▲ 부잔교를 통해 일본으로 실려가는 호남의 쌀 가마 쌀가마 너머로 네모난 부잔교(뜬다리부두)가 보인다. 거기를 통해서 한 해 250만석의 쌀이 일본으로 갔다.
ⓒ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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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의 흔적은 구실을 하지 못하는 부잔교를 보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것도 잠시 뿐, 눈으로 갈매기를 쫓으며 해바라기 하기 좋은 곳이 되었다.
▲ 부잔교에서 우리집 남성동지들 수탈의 흔적은 구실을 하지 못하는 부잔교를 보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것도 잠시 뿐, 눈으로 갈매기를 쫓으며 해바라기 하기 좋은 곳이 되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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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강점기 때 일본인이 더 많이 사는 일본인의 도시였다. 호남 들녘에서 철길에 실려 온 쌀이 부잔교를 통해 한해 250만 섬씩 실려 나가던 도시, 그런 도시에서 호남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났다. 군산 사람 한 명당 네다섯 번씩 참여했다. 수확량의 75%를 소작료(전국 평균 45%)로 걷어가는 일본 대지주에 맞서 옥구농민 항쟁을 일으킨 곳도 군산이다.

아늑한 월명동은 일본인이 살았다. 벚꽃이 피면 월명공원에 '게따'를 신고 와서 정종을 마시면서 놀았다. 군산 사람들은 소설 <탁류>의 초봉이네처럼 월명동 건너편 '산말랭이'에 살았다. 그들이 살던 토막집은 군산근대문화역사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초봉이 남편 고태수가 다녔던 조선은행은 복원되었다. 곳곳은 그 시대를 재현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그 당시 군산 사람들은 땅을 파고 가마니로 지붕을  만들어서 살았다고 한다. 마치 청동기 시대 반지하 형태와 비슷하다고 한다. 저 토막집에 살던 사람들은 미선공이나 식모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살았다.
▲ 일제 강점기 시절, 군산 사람들이 살던 집 그 당시 군산 사람들은 땅을 파고 가마니로 지붕을 만들어서 살았다고 한다. 마치 청동기 시대 반지하 형태와 비슷하다고 한다. 저 토막집에 살던 사람들은 미선공이나 식모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살았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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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박일성씨는 군산의 유명한 호떡집(나도 처음 가 봤음)까지 안내해 준 다음에 돌아갔다. 기름에 튀기지 않고 만들어서 더 맛있다는 호떡이지만, '사람이 먼저다'를 사랑했던 친구와 나는, 아이들에게 '밥이 먼저다'를 가르쳤다. 우리 아이들은 일제 치하를 견뎌낸 옛사람들처럼 결기가 있었다. 냄새에 이끌려 호떡 구경은 했지만 먹지는 않았다.  

다다미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잠들었다. 친구와 나는 이야기와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작년 12월, 우리가 멀리서 함께 흘린 눈물도, 건너뛰지 않고 말했다. 외롭고, 죽을 것처럼 힘든 일들은, 이야기를 통해 새로 태어난다. 그래서 남자들은 군대 얘기를 하고,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한다. 여자들은 첫째 낳아 기른 얘기를 하면서, 둘째 셋째를 낳기도 한다.

개항 후, 군산 사람들이 겪은 수십 년의 고통은 희미하다. 수탈해 간 일본인들의 자국은 선명하게 복원되고 있다. 내 오랜 벗 긴팔 동지의 제안처럼, 군산으로 가는 시간여행을 저항과 독립으로 채운다면 어떨까. 그 시대를 '런닝맨' 형식으로라도 겪어본다면, 월명동에서 묵는 하룻밤 동안, 더러는, 흐릿한, 100여 년 전의 군산 사람들 얘기를 하다 잠들겠지. 

수탈해 간 일본인들의 자국은 선명하게 복원되고 있다. 군산 사람들이 겪은 고통은 희미하기만 하다. 군산에 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 복원되고 있는 근대문화 수탈해 간 일본인들의 자국은 선명하게 복원되고 있다. 군산 사람들이 겪은 고통은 희미하기만 하다. 군산에 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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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탁류>에서 초봉이 남편 고태수가 다녔던 은행이다. 그는 미두에 미쳐 남의 돈을 마구 끌어써서 언제든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았다. 그의 각오처럼 갑작스럽게 죽었다.
▲ 복원된 조선은행 소설 <탁류>에서 초봉이 남편 고태수가 다녔던 은행이다. 그는 미두에 미쳐 남의 돈을 마구 끌어써서 언제든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았다. 그의 각오처럼 갑작스럽게 죽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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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군산 월명동 근대문화지구 건축물들은 관람료 없이 볼 수 있습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만 입장료가 있습니다.



태그:#군산 근대문화, #히로쓰 가옥, #동국사, #저항과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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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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