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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수루'에 걸려 있는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한산도 '수루'에 걸려 있는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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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하면 한산도가 생각나고, '한산도'하면 이순신이 떠오른다. 왜 그럴까. 한산도야말로 임진왜란의 상징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름만 '한(閑)가한 산(山)'이지 실제로는 왜적과 싸우느라 피범벅이 된 전쟁터였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1469년에 간행된 <경상도속간지리지>에 따르면 한산도는 전쟁터가 아니라 '한산도 목장'이었다. 산과 들이 완만하고 섬 전체가 풀밭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선은 이 섬을 목장으로 활용했다. 본래 한산도는 나라에서 키우는 말들이 한가로이 거니는 '평화 지대'였던 것이다.

한산도 선착장에서 제승당으로 가는 해변의 길이 아름답다.
 한산도 선착장에서 제승당으로 가는 해변의 길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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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산도는 1593년 7월 이순신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수군 본부(삼도 수군 통제영)로 선택하기 이전에도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고려 말기 이래 극심한 도발을 일삼아온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1418년(세종 1) 이종무 장군이 227척의 병선과 1만7285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 정벌에 나섰을 때, 그 출발지가 바로 한산도 앞바다였다.

한려수도 최고의 풍경은 한산도 일대

그래도 오늘날 한산도를 찾아보면, 임진왜란의 피비린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눈부신 바다 경치만 오롯하게 남아 멀리서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흔들어댈 뿐이다. 이곳에서 통제사로 근무하던 중 정승으로 발탁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 어느 고위관리가 '강구 안 파래야, 대구, 복장어 쌈아, 날씨 맑고 물 좋은 너를 두고 정승 길이 웬 말이야!'하고 탄식을 했다는 고사가 정말 실감나는 풍광이다. 한산도에서 여수까지 바닷길 200여 리를 한려수도라 하지만 역시 한산도 주변 일대가 '꽃 중의 꽃'이다.

한산도 제승당 경내의 충무사(이순신 장군 사당)에 걸려 있는 충무공 영정 중 일부
 한산도 제승당 경내의 충무사(이순신 장군 사당)에 걸려 있는 충무공 영정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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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부두를 떠나 한산도로 나아간다. 대략 25분 안팎이면 한산도에 닿는다. 승선 시간이 잠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떠나 사방을 둘러보느라 법석이다.

뱃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구경거리는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 직후 갑옷을 벗고 땀을 씻었다는 해갑도다. 그러나 배는 이 작은 섬 주변을 한 바퀴 돌아 흘러간 역사를 돌이켜볼 짬도 주지 않고, 날아가는 새처럼 한산도를 향해 질주한다.

<난중일기> 집필 장소 제승당, 해군사령부 작전실 기능

금세 한산도가 보인다. 물길을 안내하는 등대도 거북선 모양이고, 멀리 숲속에 제승당도 보인다.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 격파 전략을 구상하고 <난중일기>도 쓴 곳이다. 화살처럼 날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난다. 그렇다고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헤엄을 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배 주위를 빙빙 도는 갈매기와 함께 천천히 선착장으로 다가간다.

한산도 선착장에 내려 처음으로 통과하는 문이 '한산문'이다. 현판 글씨가 이순신의 친필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다시 한번 한산문을 쳐다보게 된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와르르 들려드는 통에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래서 푸른 하늘을 향해 사진기를 치켜든 결과, 해변길 왼쪽을 무성하게 해주는 솔숲이 두드러지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한산도 선착장에 내려 처음으로 통과하는 문이 '한산문'이다. 현판 글씨가 이순신의 친필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다시 한번 한산문을 쳐다보게 된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와르르 들려드는 통에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래서 푸른 하늘을 향해 사진기를 치켜든 결과, 해변길 왼쪽을 무성하게 해주는 솔숲이 두드러지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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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문은 한산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충무공의 친필이라는 한산문의 현판을 유심히 쳐다본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 제대로 사진은 찍을 수가 없다. 마치 불국사에 온 듯한 기분이다. 배에 실어 사람들을 한꺼번에 내려놓았고, 돌아갈 시간도 모두들 일정하니, 말끔한 사진 한 장 찍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오늘'이 되리라.

왼쪽으로는 숲,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시원하게 이어지는 길이 1km가량 구불구불 펼쳐진다. 길은 나무 그늘과 바닷물 내음으로 가득찼다. 바람은 온몸에 해풍의 세월을 담은 소나무들을 부추겨 향긋한 솔잎 내음을 나그네의 심장 속으로 마구 밀어넣는다. 해변을 따라 휘청휘청 굽어있는 길처럼 나그네의 마음도 잠깐 새에 황홀하게 풀어져버린다.

대첩문
 대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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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에서 제승당까지의 아름다운 길

이번에는 대첩문이다. 조선 시대 수군 복장을 갖춘 군졸 두 명이 입구 좌우를 지키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인형이다. 그래도 아이들과 젊은 부모들은 군졸의 창을 부여잡고 기념 촬영에 빠져 여념이 없다. 저 군졸들이 실제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은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 지켜야 한다.

대첩문에서 제승당까지는 지금껏 걸어온 해변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길이 펼쳐진다. 더 이상 평평할 수 없을 만큼 납작했던 바닷가 길과는 달리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게다가 좌우가 온통 나무로 우거진 숲길이라는 점도 판이하다. 그래도 1km 남짓 땡볕을 받으며 걸었던 후라 그런지, 이 오르막은 반갑기만 하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뜰이 펼쳐지면서 정면으로 제승당(制勝堂)이 보인다. 1592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1593년 수군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기는데, 그때 운주당(運籌堂)을 직접 짓는다. 운주당은 '작전을 짜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승당
 제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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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당은 1593년 8월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1597년 2월 파직될 때까지 충무공이 3년 7개월간 삼도 수군을 지휘했던 곳이다. 따라서 운주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통제영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숨어 있다. 사적 113호.

정유재란 불탄 운주당, 영조 때 제승당으로 재건

하지만 정유재란 때 2대 통제사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사하면서 한산도의 진영은 1597년 모두 불에 타 버린다. 칠천량 대패 후 경상우수사 배량은 비축하고 있던 무기와 군량미를 왜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을 지른다.

그 후 1740년(영조 16) 통제사 조경이 새로 건물을 짓고 이순신 유허비(遺墟碑)도 세운다. 재건한 운주당, 즉 제승당에는 '승(勝)리를 만드는[制] 집[堂]'을 뜻하는 새 이름 '制勝堂' 현판이 걸렸다. 글씨는 조경 스스로 썼다.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과 함께 할쏘기 연습을 했던 '한산정'. 바다 너머로 과녁이 세워져 있는 특이한 사대(射臺)로 이순신이 해전의 특성을 감안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활을 한 번 쏘고 싶은지, 아기를 업은 여성들은 과녁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과 함께 할쏘기 연습을 했던 '한산정'. 바다 너머로 과녁이 세워져 있는 특이한 사대(射臺)로 이순신이 해전의 특성을 감안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활을 한 번 쏘고 싶은지, 아기를 업은 여성들은 과녁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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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祀)와 유허비를 둘러본 후 제승당 뒤편의 한산정(閑山亭)으로 간다. 충무사와 유허비는 장군 사후에 생겨난 유적이지만 한산정은 제승당과 더불어 충무공이 생전에 직접 활동했던 무대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부하 무사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했다. 안내판의 해설을 읽어본다.

경남 산청의 구형왕릉 아래에 '신라 태대각간 순충 장렬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가 있다. 김유신이 구형왕릉에서 시묘살이를 할 때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산도의 이순신 사대 한산정에 비해 '화살 한 번 날려보고 싶은' 충동이 영 생기지 않는다. 두 곳을 모두 다녀본 답사자라면 한산정의 안내판에 나오는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는 설명이 정말 실감나게 느껴질 것이다.
 경남 산청의 구형왕릉 아래에 '신라 태대각간 순충 장렬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가 있다. 김유신이 구형왕릉에서 시묘살이를 할 때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산도의 이순신 사대 한산정에 비해 '화살 한 번 날려보고 싶은' 충동이 영 생기지 않는다. 두 곳을 모두 다녀본 답사자라면 한산정의 안내판에 나오는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는 설명이 정말 실감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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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는 약 145m로,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충무공이 이곳에 활터를 만든 것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 거리의 적응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내기를 하고, 진 편에서는 떡과 막걸리를 내어 배불리 먹었음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활쏘기 훈련의 흥미와 무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충무공의 지혜였을 것이다.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무사들은 충무공이 1594년에 건의했던 무과 특별시험에서 선발된 하삼도(下三道- 경상, 전라, 충청)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화살 한번 날려보고 싶은 한산정

바다 건너로 과녁이 보인다. 활을 한번 쏘아보고 싶다. 그러나 활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다른 나그네들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한산정 난간에 기댄 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성인다. 바닷물은 해풍을 맞아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다. 활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다.

충렬사 외삼문의 밤
 충렬사 외삼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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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시내에서는 사적 236호인 충렬사가 이순신 관련 최고의 유적이다. 충렬사는 통제사 이운용이 왕의 지시를 받아 지은 이순신 사당으로, 1606년에 세워졌다.

하지만 충렬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릴없게 된 나는 충렬사 외삼문에 기대어 장군이 남긴 시조를 소리내어 읊어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진해와 통영, 그리고 충렬사

해군이라면 흔히 진해를 떠올린다. 그러나 1896년까지는 통영이 '진해'였다. 한산도의 통제영은 1602년 이후 두룡포, 지금의 통영으로 옮겼다.

그후 1902년,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1907년 '진해 방비대'를 주둔시킨 일본은 1910년부터 왕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어 진해를 식민지답게 만들어간다. 해방 직후 진해의 왕벚나무들은 일본꽃이라는 이유로 마구 베어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왕벚나무는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 우리나라의 남쪽 지방에도 흔히 자생하는 수종이라는 점이 감안된 덕분에, 지금도 진해에는 왕벚나무들이 무성하다.

진해와 통영 사이에는 처참한 비극의 역사도 배어 있다. 1974년 2월 22일 해군 와이티엘정이 통영 앞바다에서 전복된다. 그 배에는 충렬사를 참배하러 왔다가 진해로 돌아가던 해군 신병 316명이 타고 있었다. 결국 159명의 신병들이 익사했다.

망산도의 일부. 주변이 너무 지저분하여 사진에서는 바닷물에 둥둥 떠있는 쓰레기 등을 지웠고, 바위섬 너머의 공단 건물들도 삭제하였다.
 망산도의 일부. 주변이 너무 지저분하여 사진에서는 바닷물에 둥둥 떠있는 쓰레기 등을 지웠고, 바위섬 너머의 공단 건물들도 삭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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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에도 진해에서는 배 사고가 있었다.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에서 올 때 타고왔던 배가 돌아가는 길에 뒤집혀 부서졌는데, 그 흔적이 망산도(望山島)라고 한다. 하지만 망산도는 현재 도로변에 연결되어 있어 섬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뿐더러, 주변이 온통 쓰레기와 오염 해수로 가득하여 역사유적지다운 품위를 전혀 찾아볼 길이 없다. 그래도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철망으로 에워싸여 있고, 출입문도 자물쇠로 잠겨 있다.  




태그:#한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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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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