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이 기사에는 연극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위로는 구십이 되신 연로하신 부모님과 아래로는 막 이십대에 접어든 아이들 사이에서, 때론 내 말을 저들이 못 알아들어서 또 때로는 저들의 말을 내가 못 알아들어서 다시 묻고 설명하고 짜증내고 엉뚱한 소리에 기가 막혀 웃고 혀를 차고 뒤늦게 알아듣고… 늘 소란하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적당히 짐작해서 대답을 하면 아이들은 어김없이 콕 집어 지적한다.

"엄마, 제발 엄마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마음대로 해석 좀 하지마!"

연극 <인물 실록 봉달수> 포스터
 연극 <인물 실록 봉달수> 포스터
ⓒ 김태수 레파토리

관련사진보기

여기 보청기로 시작해 큰 기업을 이룬 회장님이 계시다. 직원들 늘어세워 놓고 호통을 치는 것은 당연하고 정강이 차는 일도 다반사다. 그러던 어느 날 불같이 화를 내다가 그만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고 후유증도 크지 않지만 인생이 갑자기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자서전을 쓰기로 작정을 한다.

대필작가는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있는 여자 작가로 급히 돈이 필요해 이 일을 맡게 된다. 불같은 기업 회장과 까칠한 여자 작가가 만났으니 그 싸움이야 불을 보듯 뻔한 일. 두 사람은 부딪치며 서서히 서로에게 적응해 간다.

어린시절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 기술을 배우며 죽어라 고생하던 청년기, 지금은 세상 떠나고 없는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봉달수 회장의 회고담이 이어지면서 무대와 객석은 하나가 돼서 울고 웃는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한 사람의 일생 또한 누구의 시선으로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법. 외국에 유학 중인 봉달수 회장의 외동딸이 귀국해 쏟아놓는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어머니를 때려 고막을 상하게 한 아버지처럼 봉달수 회장 역시 자기 방식으로 아내와 외동딸을 대했던 것. 한 때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여기며 열렬히 사랑해 결혼까지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아마비 아내가 부끄러워졌고, 그래서 남편은 아내가 더 이상 다른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대화나 소통이 아닌 풍족한 물질로 채워준다.

입만 다물어버린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닫아 걸고 자기 안으로 숨어든 아내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봉달수 회장은 진정 아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온 것. 그러다 딸의 처절한 외침에 비로소 눈을 뜨고 귀를 열게 된다.  

배가 고프더라도 글쓰는 일을 하며 못다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기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다는 딸. 아버지 방식대로 주는 사랑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받고 싶었던 딸. 그 딸의 울부짖음을 통해 처음으로 아내의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것.

"이제야 겨우 그걸 알아들었어!"

회한에 찬 회장의 말.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회장은 자서전 집필을 중단하기로 하고, 작가는 또 진심을 다해 설득에 나선다. 그러면서 작가 역시 오래 전 다른 작가의 작품을 표절했던, 자기 자신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면의 진실과 대면하는 용기를 얻는다.

결과는 해피엔딩. 진실을 담은 자서전과 작가의 양심고백은 큰 반향을 일으킨다.

공연을 기다리며 포스터 앞에서... 셀카는 역시 어려워!
 공연을 기다리며 포스터 앞에서... 셀카는 역시 어려워!
ⓒ 유경

관련사진보기

남편의 폭력으로 듣지 못하게 된 어머니, 소리를 잘 듣게 해주는 보청기 사업, 그러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줄 몰랐던 회장, 이 연결 고리는 결국 우리들의 소통과 대화와 관계맺음에 닿아있다.

최근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일은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다. 고민을 꺼내놓으면 거의 모든 사람이 답을 가르쳐주지 못해 안달복달이다. 그것도 순전히 자기 경험에서 얻은 결론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그 고민을 드러내놓기까지 겪은, 겪고 있는 내 마음의 어려움과 불편함과 속상함에 대해서는 전혀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나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도 연세가 들어 시야가 좁아지고 체력도 떨어진 탓인지 딸의 마음을 살펴봐주시기는커녕 귀 기울여 듣는 일조차 힘들어 하시는 것 같다. 아니, 어쩜 내 기대가 너무 과한지도 모르겠다.

엊그제 만난 몇 년 위의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상처는 직면해야 한다며 앞뒤 상황 파악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는 문제를 발에 채인 돌멩이를 툭 차듯 건드려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세상일 뚜르르 꿰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 멀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손톱만큼이라도 헤아려 읽으려는 노력이 없는데 세상일인들 제대로 보일까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 목소리가 이리도 큰 모양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고 뭐고 우선 제 아는 이야기를 늘어놔야 하니 얼마나 급하고 할 말이 많겠는가. 연극 속 봉달수 회장도 목소리가 크다. 나 없으면 안 되고, 나 아니면 큰일 나고, 나 밖에는 그 일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고… 그러니 마음의 소리를 들을 귀와 마음을 읽을 여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나도 반성을 한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맘대로 해석하지 않기로. 나이 먹어 말을 알아듣는 능력과 이해력이 떨어진 건 엄연한 사실. 그래도 노력하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겠는가. 귀 기울이고 눈 맞추고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 그걸 배우고 나오는 길 서울시청 앞 광장은 이런 저런 자기 주장을 하는 소리들로 엄청 소란스러웠다.  

덧붙이는 글 | 연극 <인물 실록 봉달수>(김태수 작, 주호성 연출 / 출연 : 윤주상, 함수정, 박기산, 정재연, 석재형 등) ~ 4. 29까지, 한화손보 세실극장



태그:#인물 실록 봉달수, #노인, #노년, #가족, #자서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