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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많은 내게도 아주 드물게 그런 날이 있다. 아무런 까닭 없이 새벽에 잠이 깨어 끝내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이. 그런데 오전 2시 반은 너무했다. 자정이 되기 전에 잠들긴 했지만. 가만 누워 있으면 잠이 다시 찾아오겠지, 눈을 감고 꼼짝 않고 있었지만 잠은 영영 달아나버린 듯하다.

머릿속으로 범인 찾기에 돌입. 아, 찾았다! 첫 장을 펼쳤는데 그만 가슴이 쑥 내려앉는 바람에 내처 읽을 수 없어, 아무래도 다음에 제대로 마음먹고 읽어야겠다고 미뤄두었던 책이 내 새벽잠을 달아나게 한 주범이었다. 일어나 책을 읽기 시작한다.

책 <몽글이 : 어른아이를 위한 카툰 에세이>  <몽글이 : 어른아이를 위한 카툰 에세이> 표지
▲ 책 <몽글이 : 어른아이를 위한 카툰 에세이> <몽글이 : 어른아이를 위한 카툰 에세이> 표지
ⓒ 오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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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몽글이>(어른아이를 위한 카툰 에세이)는 서울시립승화원에서 발행한 '장사시설 재사용 신청' 안내문이라는 낯선 고지서 한 장이 날아든 이야기로 시작된다.

남편을 납골당(봉안당)에 안치한 지 벌써 15년이 흘렀다는 깨달음과 함께 '밀린 숙제' 하나가 떠올랐다면서. 저자에게 그 숙제란 다름 아닌 서른다섯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만화가 남편의 추모집을 만드는 것이다.

'9개월의 투병 생활 중에도 작품을 쉬지 않은, 천생 만화가였던' 안명규의 만화는 이제 비로소 아내의 글과 자신의 일기 일부, 유품 사진과 나란히 담겨 한곳에 모였다. 15년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만화 작업 방식이 달라져서 새롭게 정성들여 원화들을 복원해 내야했다.

남편의 작품을 모으고 글을 쓴 아내의 마음 역시, 다른 사람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저 깊은 곳에서 눈물과 애통함, 그리움과 사랑을 전부 하나로 끌어안아 녹여내 해맑고 삿된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글로 태어났다.

가난한 만화가와 6남매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딸. 세상의 잣대를 모르지 않으니 고민도 많았을 것이고, 가족들의 걱정에 망설이기도 했겠지만 두 사람은 결국 남편과 아내가 된다. 삽화를 그리며 생계형 만화가로 살아가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장래희망을 정한다.

'무명 만화가 남편의 매니저'가 되기로! 이 마음이 통했을까. 남편은 만화공모전에 입상했고, 여기저기 제안한 매니저의 기획안이 빛을 발해 신문과 잡지의 연재를 따내게 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이 만화가는 너무도 일찍 매니저 아내만 남겨놓고 결혼 4년 만에 혼자서 '자신의 별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자세히 봐야 예쁘다' 만화 <몽글이>6회(2000년 10월 22일 발표)
▲ '자세히 봐야 예쁘다' 만화 <몽글이>6회(2000년 10월 22일 발표)
ⓒ 오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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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아내는 남편의 추모집 발간이라는 오래된 숙제를 아름답게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매니저가 되기로 했던 그 약속을 지켰다. 저자 '은한(아내의 필명)'은 또 다른 저자인 '만화가 안명규'의 영원한 매니저임을 온 세상에 알린 것.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제 비로소 세상에서 맺은 두 사람 부부의 인연을 차곡차곡 개어서 둘만의 서랍에 넣어두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몽글이>는 한 작가의 만화를 모은 만화집이면서 투병일기와 아내의 애도일기가 섞여있는데, 글과 만화가 번갈아 나오며 쉽게 읽힌다. 아내의 글은 행간에 수없이 많은 추억과 사연을 담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단출하고 깔끔하다. 남편의 만화는 주인공 '몽글이'처럼 둥글둥글 귀엽고 편하며 착하다. 그래서 책 읽는 어른 옆에서 아이가 만화 '몽글이'를 같이 보는 것도 좋겠다.

짧았지만 남편과 함께한 시간 덕에 철없고 까칠했던 자신이 변했다고 하지만, 누구나 다 어려움을 겪는다고 저자 '은한'처럼 어른스러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 아픔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으며 홀로 견뎌내야 했던 슬픔의 부피는 또 얼마나 컸을까.

"함께 말할 수 있어 좋았다. / 함께 걸을 수 있어 좋았다. / 함께 위로할 수 있어 좋았다. / 함께 투덜댈 수 있어 좋았다. / 함께 사랑할 수 있어 좋았다. // 그러나 / 남편과 함께… / 떠나지는 못했다."(은한일기 15) 

그래도 이제 아내는 씩씩하고 밝게 고통을 통해 배운 희망의 언어로 오히려 우리를 위로한다. 그 위로가 고마워 나는 책을 덮으며 울고 말았다. 그러나 읽는 동안은 무척 행복하고 재미있어서 때때로 미소 짓고 중간 중간 웃음을 빵 터뜨리기도 했다. 내 달콤한 새벽잠을 깨운 범인이 밉기는커녕 고마운 아침이었다.

덧붙이는 글 | 『몽글이 : 어른아이를 위한 카툰 에세이』 (안명규, 은한 지음 / 2017, 오르골)



몽글이 - 어른아이를 위한 카툰 에세이

안명규.은한 지음, 오르골(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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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동안 CBS 아나운서로 근무하면서 노인 방송을 통해 노년의 삶을 보기 시작했다. 현재 프리랜서 사회복지사로 '어르신사랑연구모임(http://cafe.daum.net/gerontology)'을 운영하며 죽음준비교육 전문 강사, 노년생활 및 노년준비 관련 현장 강연, 방송 출연, 노년문화 컨설팅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저서 <유 경의 죽음준비학교><마흔에서 아흔까지><꽃 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마흔과 일흔이 함께 쓰는 인생 노트(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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