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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는 김유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길상사의 주 건물은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흥무전(위의 사진)이다. 진천 태령산 아래 김유신의 생가와 길상사는 직선거리로 10km 떨어져 있다. 삶과 죽의 거리는 가까운 것인가, 먼 것인가?
▲ 삶과 죽음의 거리가 궁금하다 길상사는 김유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길상사의 주 건물은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흥무전(위의 사진)이다. 진천 태령산 아래 김유신의 생가와 길상사는 직선거리로 10km 떨어져 있다. 삶과 죽의 거리는 가까운 것인가, 먼 것인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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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에 있는 길상사에 갈 때마다 문득, 김소월이 남긴 시 <산유화>가 생각났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석가는 태어나면서 바로 걸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다음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天上天下 唯我獨尊(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

'천상천하'는 하늘과 땅 사이, 즉 우주를 뜻하고, 오직 나 혼자 존엄하다는 '유아독존'은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석가의 부르짖음 속에 들어있는 '獨'은 고독이나 소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석가의 '獨'은 독립, 독창과 같은 좋은 뜻만 지녔을 뿐이다.

그러나 김소월의 '혼자'는 그렇지 않다. 이 시를 읽으면 저절로 쓸쓸하고 애달픈 느낌에 젖게 된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가 독립의 기세를 보여주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외로움, 쓸쓸함, 무력함 등을 나타낼 뿐이다.

길상사의 본전이다.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여름에 본 흥무전 길상사의 본전이다.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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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데

김동리는 김소월의 '저만치'를 '인간과 청산의 거리'로 해석하였다. 물질과 탐욕에 얽매인 탓에 자연의 일부가 되어 물 흐르듯, 둥둥 떠가는 구름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고 바람이 불 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한계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적 인간'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어떻게 군집 수준의 꽃에 견주느냐는 항변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군중 속의 고독'뿐이다. 무리를 이루어 피어난 듯 보이는 꽃들도 사실은 저 혼자 개화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사람도 근원적으로 고독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눈이 내렸다. 홍살문 아래에서 바라본 풍경인데, 저 뒤쪽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흥무전까지 언제 올라가나 싶은 걱정이 앞선다.
▲ 길상사의 겨울 눈이 내렸다. 홍살문 아래에서 바라본 풍경인데, 저 뒤쪽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흥무전까지 언제 올라가나 싶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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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고 노래하고 있다. 노래는 4km, 즉 10리를 가까운 거리로 보고 있다.

태령산 아래 김유신 생(生)가와 도당산 기슭 길상사(祠) 사이의 직선 거리는 10리. 사람의 길은 돌고 돌아 그 둘의 거리를 늘여놓았지만, 자연의 길은 하늘을 밟고 가는 까닭에 그저 10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두 길은 다르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생가와 길상사, 삶과 죽음을 의미하는 두 집의 거리는 과연 가까운 것일까, 아니면 먼 것일까?

김유신 생가와 길상사는 직선거리로 10리

삶과 죽음의 거리가 궁금하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의 생가와 사당을 보면서 문득 그런 의문에 빠져든다. "(먼저 죽은 동생이) 형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라고 노래한 박목월의 시 <하관(下棺)>은, 저승에서 이승은 가깝고 이승에서 저승은 멀다고 말하는데….  

살아 있는 지금이 '사람'이라면 죽음의 세계는 '자연'이다. 현실에 매달린다면 길고도 길고, 내세를 바라본다면 짧고도 짧은 것이 태어나고 죽는 사이의 거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생을 생애(生涯)로 표현해왔다.

삶[生]은, 흙과 물이 닿아 있는 물가[涯]와도 같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생애[一生]' 속에 '저만치' 떨어진 채 존재하지만 사실은 서로 끝[涯]을 닿고 있다는 것이다. 물에 젖은 흙은 물인가, 흙인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저만치'의 두 세계가 바로 이승과 저승이다.     

겨울에 보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걷기에 좀 편하게 느껴진다.
▲ 길상사 외삼문, 봄 겨울에 보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걷기에 좀 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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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종교 신자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삶과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이승의 화랑이자 저승을 탐구하는 승려이기도 했던 월명사는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여 노래한 향가 <제망매가>의 첫 구절을 '삶과 죽음이 여기에 (함께) 있다'고 읊었다.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 말도 못 다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을 (서로)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彌陁刹)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죽고 사는 길이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진천의 김유신 생가터와 그를 제사 지내는 길상사(吉祥祀)가 서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매우 철학적이다. '죽고 사는 길이 여기에 (함께) 있다'는 <제망매가> 첫 구절의 의미가 고스란히 눈앞에 나타나는 듯 느껴진다는 말이다. 방금 생가터를 보고, 돌아서서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찾으니, 정녕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은 이토록 가까운 것인가.    

게다가 생가와 길상사 사이의 본래 '거리'는 지금보다도 훨씬 가까웠다.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옛날 문헌은 '신라 시대부터 김유신의 태(胎)가 묻힌 태령산 아래에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중략) 1399년(태종 8)부터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國行祭]'고 증언한다. 길상사의 처음 위치가 '태령산 아래'였으니, 지금보다도 훨씬 더 생가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길상사의 본전으로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겨울에 본 흥무전 길상사의 본전으로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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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폐허가 된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재경, 박명순 등은 철종 2년(1851) 태령산 생가 너머 백곡면 개죽(介竹)마을에 죽계사(竹溪祠)라는 이름의 사당을 세워 장군을 모신다. '개죽'은 김유신이 '가죽'으로 말안장 등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마을이다.

하지만 죽계사는 고종 1년(1864)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맞아 철거된다. 그 후 고종 3년(1866) 사당은 재차 세워지고 계양묘(桂陽廟)라는 현판도 걸린다.

1922년의 홍수에 휩쓸려 사당은 다시 사라진다. 1926년, 김만희의 주도에 힘입어 지금의 위치인 진천읍 백암리 도당산 기슭에 '길상사'가 재건된다. 그러나 1950년의 전쟁을 맞아 폐허가 된다.

이윽고 1975년 2월 21일, 길상사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 지정을 받는다. 새로 웅장한 규모를 갖추기 위해 터를 넓게 닦고, 건물들을 짓고, 조경을 하고, 진입도로를 열었다. 중창(重創)이었다.

흥무전의 위치가 높아 주차장도 멀게 느껴지고,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도 제법 아득하다.
▲ 흥무전에서 바라보는 저물 무렵의 진천읍 흥무전의 위치가 높아 주차장도 멀게 느껴지고,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도 제법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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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는 아주 특이한 구조로 된 사당이다. 일반적으로 보는 사당들은 서원의 강당 건물 뒤에 다시 담장을 두른 채 아담하게 서있는 것이 보통인데, 길상사는 사원 없이 단독으로 웅장하게 세워져 있다. 김유신을 기리는 서원은 경주에 따로 있고, 진천에는 웬만한 서원 이상 가는 규모로 사당이 웅대하게 세워진 것이다.

길상사는 입구에 당도하여 홍살문을 바라보면, 흥무전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아주 위압적인 인상을 준다. 경사가 가파를 뿐만 아니라 계단의 수도 엄청나다. 도대체 몇 계단이나 될까 싶어 오르면서 세어보다가도 다리가 아프고 숨이 가빠 그만둘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계단의 중간쯤에 거대한 고목이 뱀처럼 꽈리를 틀고 있어, 오르지 않고 그냥 쳐다보기만 해고 괜히 겁부터 난다.

노약자와 장애인은 참배하기 어려운 흥무전

아마 옛날에 지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설계가 되었던 듯싶다. 장애인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가 많거나 몸이 약한 이도 본전(本殿)인 흥무전 참배가 불가능하니, 애초에 길상사는 사당의 기능을 다할 수 없도록 지어졌던 셈이다. 황산벌의 맞상대인 계백 장군의 충장사(忠壯祀)가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로 311번지의 평평한 잔디밭에 누구나 다가가기 쉽도록 건립된 것과 극단적으로 대조가 된다.

물론 이는 길상사(1975년)와 충장사(2005년)가 30년 간격을 두고 건립되면서 생겨난 시대적 정신문화의 차이 때문일 듯하다. 1975년, 길상사가 새로 건축되던 때는 한창 군사문화가 난동을 부리던 시기였다. 건축 주체들은 틀림없이 김유신 장군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는 찾아오는 대중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도록 길상사가 설계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차 있었을 것이다. 엄청난 숫자의 가파른 계단은 그렇게 출현한 것이다.

충장사. 너른 잔디밭 위에 편안하게 세워져 있다. 계백 묘는 사진에서 볼 때 오른쪽 솔숲에 있다.
▲ 계백 사당 충장사. 너른 잔디밭 위에 편안하게 세워져 있다. 계백 묘는 사진에서 볼 때 오른쪽 솔숲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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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앞에 서서 목례를 하고 길상사 경내로 들어선다. 마당 오른쪽에 관리소가 있고, 정면으로 '祀祥吉' 현판이 걸린 외삼문이 보인다. 외삼문 들어가는 입구의 좌우로 안내판과 중건(重建)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계단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아득하게 보이는 저 높은 곳에는 휘청 굽은 고목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아래로 온몸을 숙인 채 서 있다. 마치 장군의 사당을 지키는 수문장인 듯하다. 숨을 고르며 올라가 나무를 붙잡고 잠깐 쉰다. 누가 이 광경을 멀리서 본다면 수문장을 붙들고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듯 여겨질 법하다.

다시 계단을 오르니 내삼문이 나타난다. 내삼문 역시 외삼문과 마찬가지로 가운데 큰문은 닫혀 있고, 좌우의 작은 문만 열려 있다. 사당이나 향교 등은 본래 중문으로는 드나드는 법이 아니다. 장군을 뵈러가는 이 길에서도 몸을 숙이고 작은 문으로 드나들어야 하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하다.

오래된 것이면 무조건 아름다운 역사유적지

내삼문 현판에는 '門護鎭' 세 글자가 쓰여 있다. 鎭護門이지만 한글 세대에게는 門護鎭으로 눈에 들어온다. 진호문의 두 글자, 호(護)도 진(鎭)도 모두 '지킨다'는 뜻이다. 즉, 진호문은 장군의 사당을 지키는 문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김유신이 나라를 지켰다는 역사적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현판의 바탕과 글자들이 유심히 보아야 선과 면이 분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흐릿하다. 본디 흰 바탕에 검은 글씨였겠지만 비바람에 빛이 바랜 탓인지, 1975년에 길상사를 중창할 때 처음 달았던 현판이 변함없이 지금껏 걸려 있구나 싶은 역사감이 펑펑 느껴진다.

바탕의 흰 빛깔 역시 아랫부분 절반은 아주 탈색되어 사라졌고, 글자도 검다기보다는 회색과 고동색이 뒤섞인 듯하다. 아무튼 역사유적지에서는 오래되고 낡은 느낌을 주는 것들이 오히려 반갑고 고맙다.

흥무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 길상사 진호문 흥무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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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문을 들어서자 마당을 에워싼 담장 좌우로 각각 좁은 문이 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협문마다 비석을 거느리고 있다. 1957년에 세워진 흥무대왕신성비(興武大王神聖碑, 이선근 글, 김만희 글씨)와 1976년에 세워진 김유신장군사적비(金庾信將軍事蹟碑, 이은상 글, 김충현 그림)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정면에는 길상사의 본전인 '흥무전(興武殿)'이 찾아온 답사자를 위엄있게 바라본다. 흥무전은 지붕만 보면 기와집이지만 그렇다고 목조는 아니고, 콘크리트조로 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서양식 건물이다. 그 탓에, 어느 정도 외형의 위용은 갖추었지만 고풍스러운 역사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름을 흥무전으로 정한 것은 무(武)로 삼한일통을 이루어 나라를 흥(興)하게 한 김유신의 업적을 나타내려 한 의도 때문이겠지만, 신라 42대 임금인 흥덕왕 10년(835)에 그가 '흥무대왕'으로 받들어진 역사적 사실도 반영했을 것이다.

흥무전 대문 앞에서 내려다보는 길상사 입구쪽 풍경이 아득하다(사진 왼쪽). 올라가려고 쳐다본 아찔한 계단들(가운데, 오른쪽 사진).
▲ 길상사의 계단 흥무전 대문 앞에서 내려다보는 길상사 입구쪽 풍경이 아득하다(사진 왼쪽). 올라가려고 쳐다본 아찔한 계단들(가운데, 오른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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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전 안에는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크기는 가로 98cm, 세로 187cm. 1976년 11월 5일에 봉안(奉安)되었다.

신발을 벗고 사당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장군에게 절을 올리기 위해서이다.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고 해서 사찰을 '절'이라고 부른다는 말도 있지만, 사당이니 백배(百拜) 천배(千拜) 만배(萬拜)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진지하게 두 번만 올리면 된다. 향을 피운다.

'장군! 하루 빨리 남북통일이 되도록 힘 좀 써주십시오. 죽은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무열왕 앞에 나타나 삼한일통을 도운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장군께서도 돌아가신 때(673년)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혜공왕 14년(779) 4월에도 미추왕릉으로 오셔서 나라의 일을 걱정하셨지 않습니까?'

김유신의 길상사, 김춘추는 경주 통일전에 있는 초상의 일부를 재촬영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 그림과는 비율, 크기, 색조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 김유신(왼쪽)과 김춘추 김유신의 길상사, 김춘추는 경주 통일전에 있는 초상의 일부를 재촬영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 그림과는 비율, 크기, 색조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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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읽는다. 이미 죽은 신라의 장수들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 나라의 사정을 걱정하는 내용이다. 장춘랑과 파랑의 이야기는 두 책에 두루 나오지만 내용은 서로 다르다. 아래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것이다.

태종 무열왕 6년(659) 겨울 10월, 왕은 (백제를 치기 위해) 파병을 요청한 데 대해 당나라의 회답이 없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웬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났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이미 죽은) 장춘과 파랑인 듯 보였다. 그는 "제가 비록 몸은 백골로 변하였으나 나라에 보답할 마음으로 어제 당나라에 갔습니다. 거기서 당나라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내년 5월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치도록 명령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왕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므로 (달려와서) 말씀드립니다" 하고는 사라졌다. 왕이 크게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두 집안의 자손들에게 큰 상을 내린 뒤 바로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지어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김춘추는 648년(진덕여왕 2)에 당나라에 다녀왔다. 당태종을 만난 그는 '폐하께서 군사를 빌려주시어 흉악한 적(백제)을 없애주지 않으시면 저희 나라 백성들은 모두 (백제군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신라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조공하는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하면서 파병을 요청했다. 그리고 654년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659년, 당나라에 가서 파병을 요청한 것도 어언 11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 동안 백제와의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병(唐兵)을 기다리는 김춘추의 마음은 점점 간절해져갔다. 죽은 사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이미 죽은 신라 장수 두 명이 나타나 '당나라 군사들이 내년 5월에 출병하다'는 소식을 '미리' 알려주었다는 기록은 그같은 김춘추의 간절함을 말해준다.

신라군과 백제군이 다투었던 격전지. 논산의 계백유적지 황산정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 황산벌 신라군과 백제군이 다투었던 격전지. 논산의 계백유적지 황산정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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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내용상으로 약간 다른, 그러나 동일 인물 두 사람이 김춘추의 꿈에 나타났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읽어본다.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신라의)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뒤 (신라가 다시) 백제를 칠 때 두 사람이 태종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신 등이 과거에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이제 백골(白骨)이 되어서도 나라를 온전히 지키려고 종군(從軍)하여 게으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 남의 뒤로만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우리에게 적더라도 군사를 주십시오."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魂)을 위해 하루 종일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을 외게 하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두 명의 장수가 나타나 함께 싸울 군사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삼국사기>와 같으나 내용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백제를 눌러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마찬가지이지만, 이번에는 자주(自主)의 기백이 들어 있다. 당나라 군사가 아닌 우리의 힘으로 전쟁의 승리를 이끌겠다는 각오가 들어 있다.

김유신, 죽은 100년 뒤 미추왕릉에 나타나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직접 출현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673년에 죽은 김유신이 그로부터 100년 이상 더 뒷날인 779년에 신라 땅에 나타나 엄중한 경고와 애절한 한탄을 했다는 기록이다.

제37대 혜공왕 14년(779) 4월, 유신공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바람 한복판에는 준마(駿馬)를 탄 사람이 있었다.  그 모습이 장군(김유신)과 같았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명 안팎의 군사들이 장군의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 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대릉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난다.
▲ 미추왕릉 대릉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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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뒤 진동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무덤 안에서 새어나왔다. 이어서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신은 평생에 걸쳐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었지만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려는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770년)에 신의 자손(김융)이 아무런 죄(반란)도 없이 처형되었습니다.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나의 공렬(功烈)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을 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왕이 대답한다.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은 전과 같이 힘을 쓰도록 하오."

(유신이) 세 번이나 청해도 (미추왕은) 세 번 다 듣지 않는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유신의 무덤 안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혜공왕은 두려웠다. 왕은 곧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어 김유신 공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취선사는 김유신이 평양을 토벌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다.

이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없었더라면 김공의 노여움은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추왕이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 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고 한다.

미추왕릉 뒤편에는 능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있다. 바로 대숲이다.
▲ 미추왕릉과 대숲 미추왕릉 뒤편에는 능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있다. 바로 대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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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흥무전의 향불이 다 타들어가고 있다. 배향(配享)을 마치고 일어서서 장군의 초상을 바라본다. 김유신 장군의 초상은 자신감 넘치는 눈빛과 굳게 다문 입으로 굳은 의지를 드러내고 있지만, 결코 환한 표정은 아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를 사는 후손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얼굴빛도 옷도 하나같이 어둡다. 하지만 저 아래로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진천읍은 문득 문득 작은 불을 하나씩 켜고 있다. 해가 지면 어둠이 밀려오겠지만, 사람들은 기어이 세상을 환하게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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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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