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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단배 모양의 큰여울이 있는 동이리(東梨里) 마을

오늘은 왠지 뒷산에 오르고 싶었다. 2011년 연말에 이사를 해서 살고 있는 동이리 마을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니 산 이름이 금굴산이라고 했다. 왜 산 이름을 금굴산이라고 했을까? 동이리와 금굴산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곳이므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산면사무소 홈페이지에서 마을 유래를 찾아보니 동이리(東梨里-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마을은 본래 마전군 군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부리(中部里), 동부리(東部里), 이동리(梨洞里)를 병합하고 '동이리'라 하여 미산면에 편입되었다.

배울교 쪽에서 바라본 동이리 마을은 배나무가 많고 큰 여울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배울교 쪽에서 바라본 동이리 마을은 배나무가 많고 큰 여울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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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후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3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이리에는 금굴산(金窟山, 金掘山)과 임진강의 큰 여울인 밤여울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동부리, 큰배울 등이 있었다. 큰배울은 동이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지형이 큰 돛단배 형상인 산 안쪽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돛단배 지형을 이루고 있는 동이리 금굴산은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돛단배 지형을 이루고 있는 동이리 금굴산은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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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동부리(東部里)는 큰배울 동쪽에 있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합수머리에 해당하는 동이리는 지형이 마치 돛처럼 생겼다.

'배울'은 그 어원이 머리, 산의 뜻으로 쓰였던 고어 '받'에서 나온 것으로, '받-박-백-배 등으로 음이 변해 왔다. '배'와 '골짜기'의 뜻인 '울'이 합하여 '배울'로 불리던 것이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옮기면서 '이동(梨洞)', '주동(舟洞)'이 되어 '큰 돛단배 형국, 배나무가 많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동이리마을 앞에 있는 배울교
 동이리마을 앞에 있는 배울교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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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리는 한국전쟁 전에는 개성 왕씨 8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마전군 당시 군내에서 가장 으뜸가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동이리 마을 앞에는 '배울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의 이름도 큰배울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것 같다.

동이리가 있는 미산면은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전 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치하에 놓였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4년 11월 17일 행정권이 수복되어 민간인 입주가 허용되었다.

금광과 철광이 있었다는 '금굴산(金窟山)'

금굴산(金窟山, 金堀山)은 우정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높이 195.7m의 산으로 쇠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금광과 철광이 개발되었으며, 채굴로 인해 산 내부가 텅 비어있어 '공굴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마전군편에는 미두산(尾頭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인근에 대홍수로 인하여 온천지가 물바다였는데, 산 정상만 소등에 앉은 쇠파리만큼 남았다 하여 '쇠파리산'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내용은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또 고려시대에는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하여 봉화산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1월 3일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금굴산 등산을 시도하다가 중단했다.
 1월 3일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금굴산 등산을 시도하다가 중단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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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쪽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서 금굴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첫날(1월 3일)은 눈 내리는 풍경을 찍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을 시도 했는데, 눈이 워낙 펑펑 쏟아져 내려 길을 찾기가 힘들어 초임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포기해야만 했다.

1월 5일 두 번째로 산에 오르는 것을 시도했다. 오전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수은주는 영하 12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금가락지 뒷집을 통해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등산로가 거의 없었다. 눈 위에는 고라니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짐승들의 발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고라니 발자국
 고라니 발자국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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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한 마리가 밭의 경계를 이룬 철조망에서 황급히 일어나 도망을 쳤다. 아마 먹을거리가 없어 내려왔다가 놀라 도망을 치는 모양이다. 윗집 밭에는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 있는데 처음에는 울타리로 된 철조망만 둘렀다가 아마 고라니 피해가 심해 보조 철망을 덧씌운 듯했다. 불쌍한 고라니, 이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지는 못하겠구나.

능선은 처음에는 완만하게 오르다가 점점 가팔라졌다. 등산로 표시가 거의 없고, 참나무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접시 물에도 빠져 죽는 다는 말이 있듯 작은 산에서도 길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지뢰가 창궐하는 지역이 아닌가?

등산로가 제대로 없는 비탈에는 참호가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다.
 등산로가 제대로 없는 비탈에는 참호가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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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라님 절대로 길이 없는 산에는 올라가지 마세요. 함부로 산에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지뢰를 밟아 손발이 전단되어 불구자가 된 사람들이 많아요."

며칠 전 동이리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해봉 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그는 이 지역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는데 아직도 수거되지 않은 지뢰가 복병처럼 남아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해주었다.

거의 길이 없는 산을 오르다보니 겁이 더럭 나기도 했다. 나는 짐승들의 발자국이 있는 곳만 조심스럽게 따라가며 산정상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산 중간 중간에는 참호 같은 것들이 있었다.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에는 아예 참호가 줄줄이 있었다.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금굴산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국전쟁 당시 이 금굴산에서 UN군과 중공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영연방 소속 벨룩스(벨기에-룩셈부르크군) 제29여단과 중공군 제65군은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금굴산을 중심으로 임진강 방어를 위해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금굴산은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돌출 고지로 동쪽과 남쪽이 임진강으로 둘러싸여 도감포에 설친 된 2개의 교량이 유일한 통로로 이로 인해 중공군의 공격에 고립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영연방 UN군 소속 벨기에-룩셈부르크 군과 중공군간에 전투가 치열했다는 금굴산에는 기관포처럼 생긴 이상한 철 구조물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영연방 UN군 소속 벨기에-룩셈부르크 군과 중공군간에 전투가 치열했다는 금굴산에는 기관포처럼 생긴 이상한 철 구조물이 남아 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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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술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벨기에 대대는 금굴산 일대에 철조망과 지뢰를 매설하여 강력한 방어거점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집중 공격으로 영 제29여단은 금굴산을 탈출하여 전곡으로 물러났다.

능선에 난 참호는 전쟁참화의 역사를 안고 있는 듯 보였다. 능선을 따라 임도가 제법 넓게 나 있었다. 능선을 따라 1차고지에 오르니 이상한 철 구조물이 진지에 남아 있었다. 드럼통 위에 기관포 총구처럼 생긴 철 구조물이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능선을 따라 움푹 패어 있는 골은 방어용 참호인 듯하다
 능선을 따라 움푹 패어 있는 골은 방어용 참호인 듯하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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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지까지 와서 우리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담보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군대가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는 한국전쟁 당시 3498명을 파병하여 금굴산 전투 등에서 99명이 전사를 하고 300명 넘게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지난 2010년 한-EU정상회담 참석차 벨기에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도 브뤼셀 <한국전쟁 전시회>를 찾아 "대한민국이 동일돼 한국전 참전용사와 후손들을 초청할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감사를 표한 바 있다.

철 구조물을 보자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더 이상 등산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건너편 금굴산 정상에 군막사로 보이는 건물이 보였으나 날씨도 점점 더 추워져 하산하기로 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능선에서 전쟁으로 이유 없이 죽어간 젊은 넋들을 위하여 잠시 묵념을 한 후 하산을 서둘렀다.

*참고문헌 : 미산면 홈페이지, 연천군 홈페이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금굴산, #동이리, #연천군, #임진강, #벨기에-룩셈부르크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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