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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별다를 것 없이 시작했지만, 어느 틈엔가 불어오기 시작한 선선한 가을바람과 저만큼 높아진 하늘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날. 할 일이 쌓여있지만 무턱대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그런 날.

어제(6일)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어르신 죽음준비교육 수업을 하러 가기 전 들른 곳은 흔히 세검정이라고 부르는,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자리한 '쉼박물관'. 남편과 사별 후, 아내는 자신이 거주할 공간을 제외하고 살던 집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었고, 안방이었던 곳에 상여를 들여놓은 것으로 유명한 곳. 

쉼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뒤로 '쉼'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 학을 타고 있는 사람... 쉼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뒤로 '쉼'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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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 시간 고급 저택이 늘어서있는 골목은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고즈넉했다. 전문 학예사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홀로 돌아보는 박물관 안에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물건들로 가득차 있었다.

산 사람은 앉아서, 죽은 사람은 누워서 가마를 탄다고 했던가. 안방(침실)에는 온갖 화려한 장식을 달고 있는 상여가 떡하니 놓여있다. 매일 드나들고 밤이면 쉬었다 일어나던 안방 안의 상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길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으로 이야기한다.

고인의 혼을 싣고 상여보다 앞서 나간다는 요여, 죽음을 통지하던 예전의 부고(訃告), 무덤에 함께 넣어 묻었던 그릇(명기 : 明器)들이 집안 곳곳 제 자리를 찾아 놓여있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어쩜 저렇게 죽은 자가 마지막 타는 가마인 상여를 정성 들여 장식했던 것일까. 살아 생전 누리지 못한 행복, 사치, 화려함을 마지막 가는 길에라도 누려보라는 뜻이리라. 상여 앞뒤좌우에는 나무로 깎고 색을 입혀 만든 온갖 모양의 꼭두 인형이 꽂혀 있다. 쉼박물관 안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상여를 장식하는 꼭두 인형
▲ 꼭두 인형 상여를 장식하는 꼭두 인형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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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를 장식하는 꼭두 인형
▲ 꼭두 인형 상여를 장식하는 꼭두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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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고 있는 주택을 그대로 개조해서 만든 박물관 답게 화장실이었던 곳에도, 드레스룸이었던 곳에도 각각의 전시 주제를 가진 작품들과 수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2층에는 주로 용과 봉황, 학 같은 '날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쉼박물관의 또다른 특징은 우리 옛 것만을 전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 현대미술 작품들이 옛 것과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고, 다른 나라 작가의 작품들 또한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 것들과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다.

관람을 마치고 우연히 박물관의 설립자, 쉼박물관 박기옥 고문과 마주쳤다. 넓은 잔디 마당에 널어 말리고 있는 고추 꼭지를 따러 나가던 길이었다면서, 귀찮은 기색 없이 마당 한 켠 기념품 가게를 겸함 자그마한 찻집으로 안내한다.

"남편 사별 전에는 아이들 기르느라 바쁘기도 했고 양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죽음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었다"며, "남편 사별로 인해 비로소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고백(?)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고요하고 고운 모습으로 떠난 남편을 보면서 "죽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 좋은 산자락에 눕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76년 살아온 인생, 상여박물관이라 일컬어지는 쉼박물관 설립자로서 죽음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해 달라고 하니, 즉답을 내놓는다.

"죽음이란 진정 쉬는 것!"

그러면서 덧붙인다.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고 순리이기에, 삶의 마지막에 나 또한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순응하게 되기를 바란다."

45년을 해로한 남편, 사남매를 기르며 더없이 가정적이었던 남편,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삶 전체가 휘청였지만 박기옥 고문은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함께 살아온 집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여러 사람들이 쉬었다 가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나눌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자신은 그 공간에서 남편과 함께했던 시간을 이어 일상을 살아간다. 쉼박물관이 삶과 동떨어져있는 박물관이 아닌 살아 숨쉬는 박물관인 이유이다.

맑은 가을 햇볕 아래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가 유난히 빨갛다. 갑작스런 만남이었기에 긴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박기옥 고문의 말은 박물관을 나선 다음에도 오래 귓가에 머물렀다. 

"삶은 지나가는 여정, 인생은 풀잎 위의 이슬 같은 것, 그러니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요."   

쉼박물관의 설립자 박기옥 고문과 함께
▲ 박기옥 고문(사진 오른쪽) 쉼박물관의 설립자 박기옥 고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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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쉼박물관(www.shuim.org) 02-396-9277



태그:#쉼박물관, #죽음, #통과의례, #생사, #박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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