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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헌 집터 경사면의 잔디밭을 쑥이 점령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 쑥대밭 시랑헌 집터 경사면의 잔디밭을 쑥이 점령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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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는 일찍부터 틀린 사람이다.

1960대 초에 내가 다닌 광주양동초등학교는 광주에서 제일 큰 양동시장 부근에 있었다. 학부모들의 대부분은 시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학생들이 용돈을 잘 쓰기 때문인지 학교 정문 앞에는 노점상들이 들끓었다. 삼각형비닐에 담은 여러 색깔 단물, 띄기, 눈깔사탕 등이 단골메뉴지만, 새 학기가 시작하는 이른 봄철에는 건장한 아저씨들이 지게나 리어카에 덕석 말아 논 것만큼 굵은 칡을 가져와 서슬이 퍼런 칼로 서너 조각 씩 깎아주고 학생들 코 묻은 1원짜리 지폐와 바꿨다.

칡을 질겅질겅 씹다보면 주둥이 주변은 물론 입안까지 온통 시커멓게 되고 만다. 쓰지만 향기롭고 단맛이 도는 칡은 입이 시커멓게 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용돈이 없어 칡을 사먹기 어려웠던 내가 '주번 완장'을 팔에 두르고 칡을 산 학생에게 다가가 "불량식품을 샀다. 몇 학년 몇 반이냐"고 하면서 수첩을 들이밀면 슬며시 산 칡을 내놓는다. 압수한 칡은 학생들 앞에서 푸세식 화장실에 버리지만 일부는 호주머니에 넣어놨다가 아무도 없을 때 슬며시 꺼내 이빨이 시리도록 씹어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시랑헌 칡넝쿨

시렁헌 주변에는 칡이 참 많다. 편백나무는 곧게 자라는 성질을 지닌 나무이나 한번 칡넝쿨에 감기기 시작하면 곧게 자라지 못하고 곱사등 나무가 되고 만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칡넝쿨을 볼 때마다 줄기를 낫으로 베 주기도 하고 뿌리를 괭이로 파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주말에만 다녀가는 일정으로 6정보 임야 전반에 퍼져있는 칡을 제거하겠다는 용단이 너무도 가소로운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금년 2월 홍천 한옥학교 동창생들이 떼 지어 시랑헌을 방문했다. 반가운 손님들이라 모닥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막걸리와 같이 마시고 먹으면서 한옥학교 추억담에 여념이 없었다. 동창 중 용복이는 시골생활의 멋을 잘 알고 있는 친구다. 수시로 고구마를 비롯해 콩, 은행을 치목장 난로에 구워 학생들 모두를 즐겁게 했다. 용복이가 나 반장과 같이 삽과 곡괭이를 둘러메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서너 시간 뒤 용복이와 나 반장은 1자 폭 기둥만한 칡을 메고 돌아왔다. "시랑헌에 온 자동차 기름 값은 실히 뺏다"고 하면서 만족스러워했다. 이 넓고 넓은 산 중에서 어떻게 저렇게 굵은 칡을 발견하고 캤을꼬? 궁금했지만 곧바로 막걸리 파티 분위기로 돌아갔다.

용복이는 애물단지 칡을 캐고 왜 그리 좋아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자료를 찾아보니 칡에는 석류보다 훨씬 풍부한 여성 호르몬 성분이 들어있어 갱년기 증상의 치료와 혈액순환에 더 없는 명약이라는 사실과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약으로 칡즙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난달, 블루베리밭을 손질하러 가다가 능선 바로 아래 깊이파인 웅덩이와 나무를 휘감고 있는 팔뚝만한 굵기의 칡넝쿨이 잘려있는 곳을 발견했다. 칡을 캔 자리다. 주위를 둘러보니 잘린 크기와 비슷한 칡넝쿨이 주변에 널렸다. 칡밭이다. 다행히 굴착기도 들어올 만한 위치다. 아직은 칡넝쿨에 새순이 돋았지만,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전이다. 굴착기를 몰고 가서 7~8개의 굵은 칡뿌리를 캤다. 시랑헌 마당에 부려놓으며 칡 자랑을 했더니 집사람이 지극히 만족한 모습이다.

집사람은 대전으로 가져온 칡을 400포 팩으로 만들어 임신한 며느리, 비만한 딸, 무릎관절 이상으로 고생하시는 친정어머니, 동생과 오빠에게 50포씩 선물하고 남은 150포는 자신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음용한다. 오는 6월에 떠나는 장기간 유럽여행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명약이라는 믿음이 크다.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 때문에 주변 식물들의 생명을 위협해 애물단지인 시랑헌 쑥대밭이 나와 집사람의 건강을 지키는 보물단지가 되었다. 망초도 어린 싹일 때는 좋은 향이 있는  나물이 되었다.
▲ 쑥떡과 망초나물 아침식사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 때문에 주변 식물들의 생명을 위협해 애물단지인 시랑헌 쑥대밭이 나와 집사람의 건강을 지키는 보물단지가 되었다. 망초도 어린 싹일 때는 좋은 향이 있는 나물이 되었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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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헌 쑥대밭

지금까지 쑥대밭의 실체를 잘 몰랐다. 그러나 옥에 갇힌 춘향이의 머리 모양을 쑥대밭으로 표현한 춘향가 판소리를 들으면서 참으로 맛깔스런 표현이라고 생각했고 쑥에 대한 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일이 서로 얽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때 "워메 쑥대밭 돼 버렸네!"라는 표현을 멋으로 즐겨 사용하기도 했다.

시랑헌에 집터와 목공 작업장 터를 얻으려고 축대를 쌓고 산사태가 나지 않을 정도의 경사면을 만들어 잔디를 심었다. 경사면의 토양이 너무 박했는지 잔디의 활착률이 낮았다. 잔디가 자라지 못한 지점에 쑥이 자리를 잡았다. 쑥떡, 쑥 송편, 쑥 된장국 등을 만드는 향기가 좋은 쑥인지라 어서 자라서 토사를 방지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그러나 번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왕성하다. 서너 차례 토벌작전을 펼쳤다. 우리는 손가락이 망가지는 등 죽을 고생을 했지만 효과는 신통하지도 오래가지도 못 했다.

쑥이 자라더니 나무같이 커졌고 주변에 야생화들이 맥을 못 춘다. 축대에 자란 쑥은 철쭉과 회양목보다 높게 자라 이들의 생존마저 위협했다.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허리 높이 까지 자란 쑥을 뽑으려고 했더니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낫으로 밑동을 쳐내고 다음 주말에 가봤더니 한줄기에 서너 개씩 새싹을 올렸다.

6.25때 인민군의 인해전술이 어떠했으리라는 실감이 났고, 쑥대밭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쑥대밭의 규모나 쑥 뿌리가 박힌 깊이가 너무 깊어 이제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이다. 경사면에 몇 년 전에 심은 라일락은 물론 은행나무 묘목까지 점령해버렸지만 내가 취하는 대책은 지극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포도밭과 집터 과일나무 밑에 잡초들을 제거하고 퇴비를 주는 일을 하다가 쉬면서 새참도 먹을 겸 시랑헌에 내려오니 집사람이 서너 소쿠리 쑥을 우물에서 씻어 갈무리 중이다. 어찌된 사연이냐고 물었더니 시랑헌으로 올라오는 축대 위 경사면에서 쑥의 가장 위 연한부분만 꺾어왔단다.

몇 년 전 부터 우리의 아침식탁에는 쑥떡, 고구마, 늙은 호박죽이 돌아가며 식탁에 오른다. 당뇨환자는 탄수화물이 주성분인 곡류 섭취를 줄인다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끼는 이들로 대치하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집사람이 현미 찹쌀로 만드는 쑥떡의 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몇날 며칠 계룡산자락을 헤집고 돌아다녔고 막바지에는 나도 동참하여 쑥을 캐러 다녔다. 그래도 모자라 떡집 주인과 같이 간 친구에게 쑥을 얻어 일 년 먹을 쑥떡 식량을 마련한 모양이었다.

어제는 집사람이 시랑헌 쑥대밭에서 한나절 만에 마련한 쑥으로 쑥떡을 해왔다. 굳기 전에 한 끼 분량으로 잘라 비닐봉투에 싸서 냉동실에 보관했다. 냉동 보관된 쑥떡은 한 개씩 꺼내 전자레인지로 해동하면 곧바로 말랑말랑한 즉석 쑥떡이 되고, 고물에 찍어 열무김치와 같이 먹으면 충분히 진수성찬에 필적한다.

칡즙과 쑥떡은 마시고 먹더라도 음식을 탐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배가 고프지도 부르지도 않게 먹을 수 있다. 칡과 쑥은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위치하면서 가장 높고 귀한 효과를 내니 내가 평생 이루고자 하는 미덕을 고루 갖춘 스승이다. 이제 시랑헌의 칡넝쿨과 쑥대밭을 부드럽게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얻은 것 같아 지극히 만족스럽다.


태그:#칡, #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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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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