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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지 저수지 산책길의 출발점인 운흥정입니다.
▲ 산책길의 수환이와 헤리 구만지 저수지 산책길의 출발점인 운흥정입니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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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의 꿈


1950년대를 살았던 우리 세대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아련한 향수(鄕愁)가 있기 마련이다

어머니가 9남매의 맏딸이었던 나도 꼬맹이 시절 외갓집에 가면 많은 삼촌들과 이모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또래 삼촌들과 어울려 냇가에서 멱 감으면서 놀았다. 물질 하면서 붕어굴 속에 손을 집어 넣었을 때 놀란 붕어들의 파닥거림이 고희(古稀)가 가까운 지금까지 손가락 끝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암탉과 노란 병아리들, 들녘의 산수박과 원두막, 오리 먹이인 개구리를 잡으러 헤집고 다니던 논두렁, 채와 새끼줄로 만든 참새덫……

어린 시절 외갓집의 아련한 추억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비밀스런 나만의 공간이 되어 세파에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나침반이 되었다.

집사람은 손자들이 할머니와 같이 검화당(우리집 당호)에서 보낸 어린시절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길 바란다. 귀촌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때부터 집사람은 내게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검화당을 우리 손자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람들과 친화력이 좋은 레브라도리트리버 종인 헤리가 가족으로 합류했다. 토종 닭을 위한 닭장과 비단잉어를 위한 연못을 만들었다. 그네를 만들어 달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노래방기기도 설치했다. 텃밭의 잘 익은 수박과 참외는 손자들이 와서 딸 때까지 기다린다.

여름방학 때 다니러오는 손자들을 위한 그네를 만들었다.
▲ 그네 여름방학 때 다니러오는 손자들을 위한 그네를 만들었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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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들이 모이를 던져주면 우르르 몰려드는 비단잉어들
▲ 검화당 연못 손자들이 모이를 던져주면 우르르 몰려드는 비단잉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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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자 차수환

수환이는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다.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나이인지라 일년에 두 세번 만나는 외할머니 존재가 특별할 것 없을 것 같은데 집사람과 외손자 수환이와 관계는 각별하다.

매일 한 두차례 통화는 기본이다. 무슨 할 얘기가 저리도 많은가 싶어 통화내용을 들어보면, 수환이는 외할머니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잘 통하는 친구'와 조잘거리는 듯하다.

엄마에 대한 불만, 아빠와 같이 했던 일, 친구들 얘기, 심지어 매 끼니를 뭘 먹었는지, 피아노 레슨, 태권도까지 얘깃거리가 무진하다.

수환이 얘기를 들을 때 면 집사람 눈높이는 온전히 수환이 입장이 되어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거들고 들어준다. 수환이가 가족밴드에 거의 매일 올리는 사진이나 동영상도 집사람이 댓글을 달아야 완성된다.    

2월 17일부터 26일까지는 수환이의 봄방학 기간이었다. 지난 겨울방학 때 외할머니 집을 다녀가면서 봄방학 때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매일 통화하면서 봄방학이 몇 밤 남았다고 손꼽아 기다렸다. 엄마인 딸은 외동아들이 외갓집 가는 계획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나이 40 넘어 받는 학위 수여식 날짜가 아들이 외갓집에 가 있을 때와 겹치는 22일이었다.

딸은 22일 전후로 한 번만 지리산 할머니 집에 가라고 아들을 달랬지만 수환이 입장은 견고하여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21일 할머니 집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졸업식이 끝나는 22일 오후에 다시 할머니와 같이 지리산할머니 집으로 가서 26일 서울로 올라오겠다는 것이다.

결국 딸은 21일 남원-용산 기차표 3매, 22일 용산-남원 기차표 3매를 발권하여 집사람에게 보내왔다.

수환이는 검화당에 있는 동안 매 끼마다 김치찌개, 닭볶음, 카레라이스 등 할머니가 제시하는 메뉴 중에서 선택했다. 산책코스, 게임시간, TV시청, 공부시간까지 할머니와 상의하여 결정한다. 상당히 진보된 민주주의 체재다.

오전에는 나를 도와 고로쇠를 담거나, 검화당 뒷산의 벌목된 나무를 치우는 일 또는 요즈음 바빠지는 텃밭일을 거든다. 오후에는 헤리와 같이 서시천변과 구만지 일대를 걷고 저녁에는 엄마가 내준 숙제와 일기까지 쓰고 나면 자유시간이다.

노래방 기계에 맞춰 로커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노래를 부른다. 가끔은 할머니 따라 도서관에 가서 빌려온 책을 읽기도 하고, 2층에서 명상과 단전호흡을 하는 나를 흉내 내기도 한다.

26일 데리려 온 아빠를 따라 가면서, 5월 3일 연휴 때 다시 외할머니집에 와서 지유와 아인이랑 같이 놀 생각에 부풀었다.

손녀 지유와 손자 아인이

아인이는 말을 못할 때에도 할머니와 눈빛으로 의사를 소통했다
▲ 집사람과 손자 아인이 아인이는 말을 못할 때에도 할머니와 눈빛으로 의사를 소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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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내외는 맞벌이 부부다. 직장에 얽매여 여유시간이 항상 부족하다. 지유는 유치원에 다니고 아인이는 이제 3살이 되는 꼬맹이다. 두녀석을 검화당에 풀어 놓으면 잔디 마당 앞뒤로 뒤뚱뒤뚱 뛰어다니면서 헤리와 뒹굴고, 엄마랑 그네를 타면서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힌다. 지유와 아인이는 항상 엄마 아빠와 같이 할머니 집에 와서 고작 하루이틀 있다가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할머니집이 항상 고프다.

애들이 할머니 집을 떠날 때는 쇼가 벌어지기 십상이다. 아인이는 별 문제 없이 엄마가 챙기면 따라 나서고, 지유는 할머니 집에 남겠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이번 설 명절 때는 아인이가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면서 울고 불고 야단났다.

지난 21일에는 지리산 할머니가 서울에 온다는 소식에 지유집에 비상이 걸렸다. 아들 지완이는 독일로 출장을 갔고, 며느리 예빈이는 직장이 인천에 있는 중학교인지라 할머니가 고모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오기가 힘들었지만 지유가 보챘기 때문이었다. 6시가 조금 지나자 예빈이가 지유와 아인이를 데리고 당산 고모집에 도착했다. 아들이 빠졌지만 집사람이 중심인 씨족이 모였다.

딸이 예약해둔 샤브샤브집에서 딸 학위수여 축하 겸 수환이 생일 파티를 걸판지게 했다. 다시 딸 집에 돌아와 2~3시간 놀았다. 다음날 출근해야 할 엄마 때문에 광명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지유는 "아빠가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지리산 할머니 집에 가자!"는 엄마의 말 뜻을 이해하고 따랐지만, 문제는 아인이였다. 왜 할머니를 두고? 장난감이 많고, 수환이 형까지 있는 고모집을 서둘러 떠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간 할머니 눈, 코, 입, 볼 등 곳곳에 뽀뽀하고 헤어졌지만 떠난 지 5분이 못돼 전화가 왔다. "할머니 사랑해요." 하는 지유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이내 "할머니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하는 아인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유는 못다한 감정의 표현을 편지로 쓴다
▲ 지유편지 지유는 못다한 감정의 표현을 편지로 쓴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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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흐른다.

아들이 출장에서 돌아왔으니 오는 18일에는 아들 가족이 검화당에 올 것이다. 지유가 할머니 집에 간다는 것을 알면 수환이는 또 설랠 것이다.

씨족의 안위를 책임졌던 족장의 존재가치는 해저면으로 가라앉았고, 씨족의 중심이 된 집사람의 존재가치는 더욱 무거워졌다. 


태그:#존재가치, #검화당, #씨족, #가족, #지리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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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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