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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시리고 차가웠던 겨울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허나 "그립고 애타게 기다리던" 양춘(陽春)의 찬란한 봄은 시공을 초월한 우주의 유영(遊泳)으로 찾아오고 말았다. 가벼운 온풍의 바람은 수줍은 여인네의 화사한 꽃무늬 치맛자락처럼 살랑거리며 볼을 건드렸다.   코끝을 맴도는 노랑, 분홍, 하얀 꽃들의 향기는 어지러울 정도로 진하게 황홀했다. 눈이 부시게 맑은 햇빛과 그 빛의 직진과 반사로 우리 눈에 투영되는 온갖 만물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음은 두근거리는 행복이었다.

 

장충공원의 입구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어쩌면 아이들보다 더 아이 같은 순진한 어른들을 만났다. 그들과 나는 "봄꽃 만발한 남산을 한 바퀴 돌아보며 마음껏 누려보자" 얘기했었다. 서로의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 소박한 인사를 나누었다. 누구랄 것 없이 반가움에 정을 더 버무려 향긋한 미소를 만들어 내는 그들은 한마디로 사람냄새 나는 착한 벗들이었다.

 

장충공원을 가로질러 '남산 산책로'로 향하는 돌계단을 하나, 둘 세며 걸어 올랐다. 계단을 다 올라 비로소 오솔길 순환로에 접어드는 순간 눈앞에는 찬란한 봄꽃의 무리가 우리를 마중하고 있었다. 병아리처럼 노란 개나리, 새색시 볼처럼 발그레한 연분홍 진달래, 하얀 눈꽃으로 화려하게 피어난 벚꽃의 만발이 뭇 사람들의 기막힌 탄성을 자아내며 그 곳에 있었다. 꽃의 무리가 연출해낸 봄의 색감, 봄의 생동감, 향기로운 봄의 조화는 가슴 떨리는 봄의 유혹이었다.   

 

간혹 실오라기 같은 한 줄기 바람에 한 잎 두 잎 하얀 꽃잎이 눈송이처럼 허공에 날렸다. 한 잎의 눈송이 꽃잎은 일상의 무거움을 덜어주기 위해 자연이 내게 전하는 평화로운 메시지였다. "말없이 고이" 설레고 싶어서 비스듬 언덕에 피어난 진달래의 수줍음은 아련한 청춘시절 옛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추억의 매개였다. 길가에 제비꽃과 금잔디, 수선화...그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봄꽃들의 동산, 남산의 산책로에서 우리들은 그만 봄에 만취하고 말았다.

 

졸졸졸 사람들은 열을 지어 걸었다. 주황과, 분홍, 초록, 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걸음은 유난히도 남산의 봄과 절묘하리만치 잘 어우러져 보였다. 앞선 사람은 연신 고개를 돌려 쫓아오는 이들의 뒤를 세심하게 살폈고, 따라서는 사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문 연처럼 걸음의 보조를 맞추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인간적 관계의 고리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끈'은 힘겨워 하는 자를 이끌었고, 앞서고자 하는 자를 자제하도록 만들었다.

 

'남산'이란 도심 속의 산이자, 섬을 온통 뒤덮은 만물의 생동하는 색과 빛, 향기, 그리고 바람...나무와 꽃, 모두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수많은 잡초와 들풀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거룩한 '대지미술'은 행복한 감동이었다.  

 

 

예로부터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이라 했다. 신령한 영산으로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는'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려왔고, 또 한편 '목멱산'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의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시대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그들의 편의대로 '남산'이란 이름을 일방적으로 쓰면서 고착화된 셈이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가면 익히 들을 수 있는 일반 명사화된 '남산'이란 이름보다는 본래의 의미를 가진 '목멱산'이란 이름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남산은 조선 태조 때 쌓은 성벽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서울을 사방으로 둘러싼 내사산인 낙산(동), 인왕산(서), 남산(남), 북악산(북) 중 하나이다. 1397년에 남산에 세워진 '국사당'에서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제사를 지내왔고, 봉수대가 있어 서울(왕도)의 위곽(圍郭)을 이루었던 전략적 요지이기도 하다.

 

또 일제시대 때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경성신사'와 '조선신궁'이 있던 곳이다. 더하여 한 가지 역사적 실화를 더듬어 본다면 조선 숙종 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남산 중턱 '당집'에서 무속인과 함께 허수아비에 대바늘을 꼽았던 '갑술환국'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렇듯 '남산'의 역사와 남산의 품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하다. 나는 남산의 산책 순환로를 사람들과 걸으며 잠시 잠깐 남산이 가진 유구한 자연성과 삶의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음이 좋았다.

 

남산의 남쪽 전망대에서 한강을 바라보았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인간의 물적(物的) 욕망이 만들어낸 희뿌연 스모그...그러나 그 연막을 뚫고 유유히 흐르는 강이 있었다. 햇빛 반짝이는 한강이 보였다. 한강은 서울을 남북으로 가른 체 양옆으로 즐비하게 고층의 아파트와 빌딩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연하게 굽이치는 강...생명의 강...인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창조의 강...눈물과 오욕을 담아 흐르는 물줄기...나는 강이 오래도록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고 끝내 살아 이기적 인간의 욕망까지도 모두 품어주기를 소망했다.

 

남산의 정상에 올랐다. 우뚝 솟은 남산타워(N타워)를 목을 꺾어가며 간신히 올려 보았다. 뾰족한 직립이 주는 묘한 경외감(?) 아무튼 그런 게 느껴졌다. 팔각정 주변에는 수많은 상춘객들과 관광객이 붐볐다. 병아리 같은 유치원생들, 아리따운 신혼부부들이 있었다. 풋풋한 소녀들처럼 감수성에 젖은 중년의 여인네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그 곳에 있었다. 

 

팔각정 아래로 난 성벽계단 길을 따라 남쪽 순환로 방향으로 걸음을 걸었다. 도중에 풋내기 고교시절 남산 도서관 앞 분수대에서 친구들과 모여 미팅을 하던 웃지 못 할 기억이 새록새록 솟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무조건 예쁜 얼굴에만 꽂혔었는지...한 눈에 반해 가슴 설레던 가녀린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청춘의 밤을 수없이 뒤척이게 했던 그 때 그녀는 '지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미 강물처럼 흘러와 버린 세월을 실감하게 되니 한편으론 씁쓸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도 그 아름다운 시절을 기억할 수 있음은 내 스스로에게 주어진 아련한 행복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국립극장 방면으로 난 순환로를 따라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길에서 웃었고, 길에서 이야기하며 걸었다. 오랜만에 만난 여고 동창생들처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고, 팔짱도  끼고 미소도 지으며 잊지 못 할 또 다른 추억을 만들었다. 봄꽃 만발한 찬란한 봄의 남산은 그렇게 사람들을 충만하게 했고, 묘하게 휘감는 흥분과 엔돌핀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잡아다 고문과 드잡이를 일삼았던 '안기부'자리를 지났다. 옛 안기부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떨치며 독재권력의 충견 노릇을 톡톡히 했던 음침한 아지트였다. 그러나 지금 건물의 뒷마당 한 쪽에는 키가 큰 하얀 목련들이 늘씬하게 서서 4월의 봄을 증거하고 있는 듯 했다. 몇 해 전 유스호스텔로 바뀌어 청소년들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니 세월은 무상하게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걸음을 모두 마치고 내려와 장충동 족발골목에 들렀다. 너나 할 것 없이 '원조족발집'이라는 간판을 걸었으니 코웃음이 절로 났다. 적당한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족발 한 접시를 주문했다. 기름기 쫙 빠진 보들보들한 족발의 고기 맛은 그럭저럭 맛이 좋았다. 게다가 남산에서 몇 송이 따온 진달래 꽃잎을 막걸리에 띄운 이른바 '막걸리 두견주'는 족발안주에 제격이었다.

 

별 것도 아닌, 사람들의 대수롭지 않은 평범한 생각이 예상치 못한 희한한 낭만과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하얀 막걸리 잔에 떠있는 연분홍 진달래꽃은 걸쭉한 막걸리의 맛을 배가시키는 우아한 봄이었다. 우리는 남산의 봄을 마셨고, 봄을 노래하며, 찬란한 남산의 봄을 마음껏 누리고야 말았다.

 

지금도 그 족발집에서 일하던 조선족 동포 아가씨의 신기한 듯 바라보던 표정과 강한 사투리 억양이 재미나게 생각난다.

 

"아저씨 이 막걸리는 대체 뭡니까?"

덧붙이는 글 | <고양올레>에서 지난 4월 17일 남산 한 바퀴 걷기 소풍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구간정보 : 동대입구 6번 출구~장충단공원~국립극장 방면 산책로~남측 산책로~정상 팔각정~성곽길~남산 도서관~북측 순환로~장충단공원 까지 약 11km / 약 3시간 소요


태그:#남산, #목멱산, #고양올레, #남산 걷기,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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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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