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키나와 여행 다섯 번째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 이야기입니다.

여행 셋째 날,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 가는 길에 '이토만시'에 있는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엘 들렀습니다.(http://www.himeyuri.or.jp/)

 

현장를 방문하기 전에는 '히메유리의 탑'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길가에 있는 기념탑 정도인줄 알고 차에서 내려 잠깐 들렀다 가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아담한 공원과 자료관, 전시관이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한국어로 음성안내를 들을 수 있는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이나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공원)에 비할 수는 없지만, 일본인 방문객들도 많았고 한국어로 번역된 안내자료도 갖추고 있더군요. 한국어로 된 안내문을 읽고 나면 일본어를 잘 몰라도 전시관을 둘러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히메유리의 탑은 오키나와 전쟁 당시 동원되었다가 희생당한 226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탑입니다. 자료관에는 이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자료들이 모아져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 오키나와전에 간호 요원으로 동원된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현립 제일고등여학교의 학생들로 구성된 히메유리 학도대는 부상병 치료, 시신매장, 취사활동 등에 동원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전황이 점점 나빠지던 어느날 갑자기 해산 명령을 받게 되자 소녀들은 미군에게 포위당한 채 전쟁터에 내버려지게 되고 많은 소녀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자료관에는 그녀들의 영정과 유품,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실물 크기로 재현한 방공호 모형 등이 있어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엿볼 수 있으며, 생존자 증언과 같은 영상자료도 볼 수 있습니다.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을 둘러보면서, 한국전쟁 당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희생자, 시신조차 발굴하지 못한 우리는 뭔가?

 

아직 유해발굴을 비롯하여 시신도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며, 그나마 발굴한 유해는 보관할 곳이 없어 창고에 놓여있는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서 오키나와에서 무엇을 배워야할지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불행했던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그런 불행이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히메유리 여학생들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불행한 일은 경험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 유적에 대한 발굴과 그 죽음에 얽힌 사연을 밝히는 것이 왜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 일을 '오키나와현 여자사범 제 1고등여자 히메유리 동창회'에서 해냈다는 사실도 놀라웠습니다.

 

모두 6개의 전시관과 1개의 다목적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 1 전시실 - 히메유리의 청춘 / 전쟁에 동원되기 전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현립 제 1고등여학교 여학생들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으며, 전쟁당시 희생당한 여학생들의 사진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 2 전시실 - 히메유리의 전장/ 병원 방공호였던 동굴을 재현하고, 히메유리 학도단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부상병 치료 모습과 당시 사용하였던 의약용구와 전장에 휴대하였던 물품을 사연과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 3 전시실 - 해산명령과 죽음의 방황/ 1945년 6월 18일 밤 해산명령이 떨어진 후 미군에 포위되어 며칠 사이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사망하였습니다. 당시의 비극을 영상 증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 4 전시실 - 진혼/ 추모의 공간으로 영정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가스탄 공격으로 희생자가 많았던 제 3외과 방공호가 실물 크기로 재현되어 있습니다.(※히메유리 탑 아래 동굴과 연결되어 있음)

 

 

제 5 전시실 - 회상/ 사계절 다채로운 화원이 창 뒤로 펼쳐집니다. 전시를 회상하며 기록을 남기는 곳입니다.

 

제 6 전시실 - 평화의 광장/ 평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입니다.

 

 

다목절 홀 / 100인치 영상 스크린이 설치되어 다큐멘터리 등 영상작품 상영이 진행됩니다.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 설립에 대하여...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작전이 시작된 1945년 3월 23일 늦은밤,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 오키나와 현립 제 1고등 여학교 학생 222명, 교사 18명은 나하시의 남동쪽 5킬로미터에 위치한 하에바루에 있던 오키나와 육군병원에 배속되었습니다.

 

3월 26일 미군은 게라마 열도에 진격하였고,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섬이 중부서해안에 상륙합니다. 미군이 남하하자 일본군의 사상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학생들은 후송되어 온 부상병의 간호와 물긷기, 밥짓기, 시신 매장 등에 쫓겨 잠시 논을 붙일 틈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5월 하순 미군의 공격이 가속화되자 학생들은 일본군과 함께 육군병원을 나와서 본섬 남단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동한 지역에서의 안정도 잠시, 격렬한 대포 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6월 18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날 학생들은 갑작스런 '해산명령'을 받고 절망하였고, 이미 미군에 포위되어 버린 전장을 헤매며 도망가다가 이들 중 일부는 포탄으로, 일부는 가스탄으로, 또 일부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수류탄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육군병원에 동원되었던 교사와 학생 총 240명 중에 136명이, 재향부대 등에서 9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군은 오키나와전을 일본 본토 침공의 거점 확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작전으로 위치시키고 최대한의 물량을 사용했던 반면, 이에 대항하는 일본군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서 방공호에 잠복해 시간을 끄는 방위 지구, 작전을 취했습니다.

 

오키나와를 수비하기 위해 일본군은 오키나와 현민을 송두리째 동원하는 계획을 세우고 학도단을 편성해 학생들을 강제로 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시간을 끌기 위한 일본군의 지구전 때문에 12만여 명에 달하는 오키나와 현민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만 지금도 전장의 참상은 우리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쟁터로 향하게 했던 그 시대의 교육에 대한 무서움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인구의 과반수를 넘고, 아직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국내, 국제 정세를 생각하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체험한 전쟁의 공포를 끊임없이 전해갈 필요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주장해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죽은 학우와 교사를 위한 진혼이라 믿으며, 우리는 이땅에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을 건설했습니다. 이 기념관이 설립되기까지 현 내외 많은 분들의 성원과 협력에 힘입었습니다.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 1989년 6월 23일  재단법인 오키나와현 여자사범 제 1고등여자 히메유리 동창회-

 

※ 전쟁체험자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젊은 세대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보다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은 2004년 4월 전면적인 전시개조를 실시했고 한층 더 평화의 소망을 미래로 이어나가기 위해 '평화의 광장'을 증축했습니다. (히메유리 기념관, 한국어 안내 자료에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오키나와, #히메유리, #평화, #전쟁, #여학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산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대안교육, 주민자치,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의학, 공동체 운동에 관심 많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2월 22일상(2007), 뉴스게릴라상(2008)수상, 시민기자 명예의 숲 으뜸상(2009. 10),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2013..2) 수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