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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아흔 개의 봄> 표지
 책 <아흔 개의 봄> 표지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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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이 들고 병든 어머니를 간병(혹은 시병)하며 남긴 기록들을 읽으면서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나는 주눅이 들었다. 그들 모자 혹은 모녀의 친밀감, 자식들의 놀라운 헌신,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과 존중은 나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고 도무지 이를 수 없는 경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런 염려를 바닥에 깔고 책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국어학자이신 어머니를 역사학자인 아들이 병구완하며 쓴 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사람 냄새가 났다. 모자 사이에 오랜 시간 쌓인 갈등과 불만과 못마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사람과 사람이, 부모와 자식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을 통하게 되는지가 행간에 숨쉬듯 자연스럽게 흐른다. 그러니 저자 서문에서부터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젊어서부터 똑똑했던 어머니는 지금을 기준으로 해도 최고의 공부를 했고, 최고의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을 하지만 일찍 사별하고 만다. 우리의 혼란한 역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혼자 몸으로 네 명의 자녀를 기르며 학자의 길을 걷던 어머니, 아무도 모르게 안으로 품어안아야 했던 상처는 그 얼마였을까. 자식들은 아마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와 유난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셋째 아들로, 미국에 사는 큰형과 신선처럼 살아가는 작은 형 덕(?)에 쓰러진 어머니의 보호자가 된다. 어머니가 대형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다시 노인요양원으로 옮겨가는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어머니의 상태를 세심하게 헤아리면서 아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 <아흔 개의 봄>

위중했던 어머니의 병세가 좋아지는 것과 함께 이 아들 또한 변하고 있었던 것. 어머니와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정 또한 '예전과 다른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으로'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이 살아온 60년 인생과 어머니가 드리운 커다란 그늘을 들여다 본다.

어머니의 병구완으로 인해 일상이 완전히 바뀌고, 형제간의 서로 다른 생각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노인 환자를 둘러싼 제도와 전문 간병 인력들의 이런 저런 면모가 눈에 들어온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눈여겨보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들이다.

그러면서 몸과 정신이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어머니의 새로운 삶이 무엇을 기준으로 재정립되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한다. 예를 들어, 틀니를 다시 끼우고 적응해 예전의 식생활로 돌아가는 것과 틀니가 없는 상태에서 즐기는 것 사이에서 과연 어디에 방점을 찍는 것이 어머니의 행복인지 읽는 나도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이제는 열심히 생각하지 않고 맞춰드리는 쪽을 택했지만, 나 역시 오래도록 아버지와 '닮아서 싫고, 달라서 싫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 일까. 어머니를 향한 저자의 감정에 일정 부분 감정이입이 되었다. 어머니의 회복을 함께 기뻐하면서 귀엽고 거침 없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 지은 것과 함께, 조금 달라진 나를 발견했다. 비록 예전에는 무조건 '나는 저렇게 못해!'였다면, 이제는 '나도 최선을 다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정도의 변화이긴 하지만.

결국 이 책을 객관적으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 마음 속에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오래도록 아버지와 제대로 만나 제대로 화해하고 싶다는 열망이 숨어있었던 게 아닐까. 물론 여전히 자신 없기는 하지만 아주 조금은 용기를 내볼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엄청 놀라운 변화다. 물론 그래도 저자처럼 어머니와 헤어질 때마다 뽀뽀인사는 못해 드릴 것 같지만.

결국 이 책을 전혀 객관적으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복지하는 사람으로 노인요양 제도와 인력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살펴볼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스스로를 대입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에 그은 밑줄에도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 어떤 고통 앞에서도 주어진 인연을 등지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 아쉬움이 많으셨던 평생을 어떤 식으로든 반추하실 수 있다는 것은 그 아쉬움을 풀지는 못하더라도 그로 인한 아픔을 다독일 수 있는 기회려니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에 잠기실 만한 건강 조건을 유지하시는 것이 기쁘다.
○ 그 당시에 내가 어머니께 좀 더 도움이 되는 인간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 어머니의 기억이 완전하지 못한 하나의 측면이 '거리낌'을 잊어버리신 거라면,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시는 지금이 그분 인생의 또 하나 '황금기'로 큰 가치를 가진 것이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아흔 개의 봄> (김기협 지음 / 서해문집, 2011)



아흔 개의 봄 - 역사학자 김기협의 시병일기

김기협 지음, 서해문집(2011)


태그:#아흔 개의 봄, #김기협, #어머니, #간병일기, #시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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