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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기는 2010년 4월 14일~6월 26일까지 중국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스촨(四川: 동티벳), 북베트남, 북라오스를 배낭여행하며 연모하는 여인(女人) 어머님에게 부친 편지에 기초합니다. 현대적인 건물이나 관광지가 아닌 소수 민족이 사는 동네와 깊은 산골 오지를 다니며, 일기를 대신하여 적은 편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따스한 사람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편지를 차례로 연재 기록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차마고도에는 소금 우물이 있다.
▲ 윈난(雲南) 소금계곡(鹽井) 차마고도에는 소금 우물이 있다.
ⓒ 손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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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오래도록 꿈꿔왔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태 전에 잠시 다녀온 곳이지만 제 마음은 늘 그곳에 머무르는 듯했고, 길을 나서기에 앞서 '꼭 그곳에 가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배낭 한구석에 꾸욱꾸욱 집어넣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가는 길이 막혔다고 저에게 들려주었지만 차마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은 다른 한편 욕심이 되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길 위에 있으면서 수 없이 길을 찾고, 지도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곳에 드는 길을 물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전 해바라기마냥 그곳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은 듯합니다.

사관(下關)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와서는, 무작정 (버스 시간표가 맞지 않기에) 안내양에게 "더친(德欽)"이라고 하니 모레 떠나는 버스표를 건네줍니다. 저는 '오늘'이나 '내일'의 표가 없느냐고 물어보니, 그곳에 가는 버스는 닷새에 한 번 있다고 들려줍니다. (2010년 6월 현재, 중국은 따리(大理), 리강(麗江), 중덴(中甸), 더친(德欽)을 잇는 루트를 관광지화하려는 움직임 하에, 중덴에서 더친까지의 길을 전면 새시공하고 있으며, 이 길은 통제되고 있습니다.) 길에 대한 집착인지,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 정리하지 못한 채, 저는 '더친'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에 부풀어 오릅니다.

사관 버스 정류장에서는 닷새에 한 번 길이 열리는 (저는 그 버스를 기다려) 24시간 공사 중인 길을 돌아 돌아 그제 저녁 더친으로 든 다음, 오늘은 기어코 오래도록 꿈꿔 왔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제 앞에는 구름에 가려진 여신(女神)이 천만 년 전(千萬年)부터 그래 왔듯이 우직하게 서 있습니다.

천 년을 이어온 이야기. 소금계곡
▲ 윈난(雲南) 소금계곡(鹽井) 천 년을 이어온 이야기. 소금계곡
ⓒ 손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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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더친은 중덴(현 샹그릴라)과 더불어 완연한 티배트의 땅이며, 집 또한 하얀 벽면에 네모난 창문을 내어놓고 1층과 2층을 만들어 놓은 모습입니다. 샹그릴라와 다른 점은 좁은 협곡 사이에 빼곡히 집들이 들어 서 있다는 것과 이 거리의 여성분들은 내 나라의 여자분들과 너무 닮았다는 점입니다. 더친에서 이어지는 풍경은 삭막하기 이를 때가 없는데, 간간이 산 위, 눈이 녹아내린 물이 흐르고 경사가 조금 느린 곳이라면 어김없이 마을이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주 삭막한 계곡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듯합니다. 그리고 마을과 마을이 띄엄띄엄 이어져 있지만 끝내는 (서쪽으로는 '괴지라사(槐枝拉薩)) 동쪽으로는 천장남로 '청두(成都)'로 길이 열려 있습니다.

어머님,
어제는 소금계곡(鹽井)에 갔다왔더랬습니다. 차마고도(茶馬古道)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마방(馬房)'이라면, 마방의 역사 한 편에는 란창강 깊은 물줄기에서 건져 올린 소금도 있을 것입니다. 더친에서 110여 km 떨어진 그곳은, 윈난(雲南)이 아닌 티베트이기에 허가증이 없으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운이 좋아서인지 빵차를 타고 깊은 계곡을 돌아 돌아 3시간을 나아간 다음 염정 마을에 닿았습니다.

소금 고드름을 먹어보셨나요? 꼭 드셔보세요!
▲ 윈난(雲南) 소금계곡(鹽井) 소금 고드름을 먹어보셨나요? 꼭 드셔보세요!
ⓒ 손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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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앤징 마을은 산 중턱에 살짝 자리 잡았으며, 사람이 모인지라 소학교며, 중학교도 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염정이 있는 염전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옛 마방들이 말의 등에 소금을 지고 오르내린 오랜 길이 있는가 하면, 오토바이 등이 다닐 수 있는 넓은 길도 있습니다. 저는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가려고 옛길을 더듬다 그 경사진 모습에 놀라서 두어 걸음 뺀 다음, 지그재그로 난 새 길을 따랐습니다. 윗마을에서 한 시간 정도를 내려서면 란찬강이 허리 돌려서는 곳에 조그마한 티베트 마을(하얀 벽의 집 모습이 유난히 밝게 들어오는)이 있으며, 그 강변에 염전이 있습니다.

TV에서 보이던 그 자리. 히말라야가 상전벽해(桑田碧海) 시절의 바다였다는 기억이 있던 그곳에 제 발걸음이 머무른다는 이 너무나 가슴 벅차올랐습니다. 마을 맞은 편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염전을 만든 다음 염정에서 물을 길어 올려, 햇살에 소금을 거둬들이는 천 년 동안의 행위를 낯선 여행자는 무심한 듯, 신기한 듯 마주하고 있습니다. 염전은 제 앞에 100여 개가 조금 안 될 듯한데, 어느 자리에서는 누른 물이 가득 차 있으며, 어느 자리에는 하얀 소금이 따갑도록 햇살에 몸을 데우고 있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소금을 빗자루에 모아서는 창고에 옮기고 합니다. 저는 정말 소금인지, 맛이 어떨는지 나무 기둥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새끼손가락보다 가는 하얀 소금을 하나 따서 사탕처럼 빨아봅니다. 짭짭합니다. 염정 마을로 올라오면서 소금 고드름을 먹으니 숨이 차오르지 않는 듯합니다.

3,200m에서 만난 순수, 고맙습니다.
▲ 윈난(雲南) 소금계곡(鹽井) 3,200m에서 만난 순수, 고맙습니다.
ⓒ 손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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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가 내린 마을 ( 염정으로 올라와) 지나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한결 같은 대답이 "더친으로 가는 버스가 없다"는 메아리입니다. 오후가 지나면 버스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냥 서 있어봅니다. 이앤징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기에 저는 잠자리를 구하기보다 저녁때까지 버스가 없다면 그제야 빈관(賓館)을 찾겠다며 3200m 높이에서 건너편의 만년설산을 바라봅니다.

어머님,
도시에서 아파트나 시멘트 건물을 한두 시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느낌일까요? 3000m에서 파란 하늘로 치솟은 설산(雪山)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떨까요? 저는 버스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천 년 동안 이고 온 하얀 산을 바라봅니다. 자연은, 자연은 아무리 오래도록 바라봐도 지루하지가 않으며, 눈이 안겨가고 마음이 안겨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버스를 기다리며 바라보는 설산을, 시간이 지나도 선명한 기억으로 제 옆에 머무르길 바랍니다. 시간이 지난 먼 날 내가 내게 말을 건넬 때, 저는 그에게 그 시절을 들려달라고 주문을 걸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잊혀진 길이 살아 숨쉬곤 한다.
▲ 윈난(雲南) 차마고도(茶馬古道) 그곳에는 잊혀진 길이 살아 숨쉬곤 한다.
ⓒ 손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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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시간 넘게 설산과 눈빛만 주고받으며, 오래도록 기억하겠다고 소곤소곤 들려주려니 망캄에서 버스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버스는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중학생 티베트 아이들을 태우기에 저도 힘껏 버스에 오릅니다. 마을은 몇십 리에 열대여섯 채 있으니 다른 교통수단이 없습니다. 물론 오토바이가 친절한 교통수단이 되지만 이는 학생들이 통학하기에는 불편한 도구인 듯합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의 공부에 지쳤는지 백만 년의 묶은 때가 덕지덕지 붙은 버스의 의자에 기대앉아 있습니다.

저는 한순간의 풍경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을 않은 듯 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이앤징에서 더친으로 오면서 지구라는 별은 어쩜, 두꺼운 가죽옷을 입은 파충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울퉁불퉁한 회색의 가죽 위에 조그마한 흙이 뭉쳐져 있으면 사람들은 그곳에 집을 짓고 보리씨를 뿌려 초록으로 만들곤 합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삭막함과 신비함, 억척스러움과 숭고함이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버스 기사 아저씨는 란창강의 물살같이 있는 힘껏 질주합니다.

전설이 되어버린 어느 일상 속으로.
▲ 윈난(雲南) 차마고도(茶馬古道) 전설이 되어버린 어느 일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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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소금 계곡에 갔다 온 흥분을 안고 지난밤을 보낸 다음.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어 (이앤징으로 가다 오며 오래도록 창문 너머로 지켜보았지만) 더친에서 10여km 떨어진 페라라이스(飛來寺)까지 걸어갑니다. 아마 더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일이 2700m까지 성큼 내려온 빙하를 바라보는 '밍용촌 빙하 트레킹'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티베트 사람들은 페라라이스 앞에서 6740md의 신산(神山), 메리쉘산(梅里雪山)을 바라보며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합니다. 저 또한 그 앞에서 지금 서 있습니다. 두어 시간 넘게 걸어와서…….

더친에서 걷는 내내, 구름이 제 발걸음과 함께하더니, 기어코 온 하늘을 가렸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편안합니다. 처음에는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설산을 애타게, 첫사랑의 이름만큼 애절하게 신산을 부르며, 하늘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구름이 한 발짝 물러서 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남쪽에서 바람을 무등 타고 온 구름은 카와카보 깊숙이 않은 채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습니다. 이태 전에도 이와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하얀 탑이 나란히 줄 세워져 있었고, 향나무가 연기를 내며 하늘로 산화할 때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온 어미는 산을 보며 절을 하였습니다. 두어 시간째 구름만 비켜가길 바랐는데… 그리고 오늘에서도 사진기를 손에서 놓지 못한 채 행여나 주봉이라도 비치면 사진을 찍겠다는 저를 마주했습니다. 보이는 것에 대한, 제가 보려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설산과 구름이 하나가 되어 주고받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구름 때문에 설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은 분명히 '됐다'했지만 눈(目)은 '제 눈에 들어오는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두어 시간 흐른 즈음, 설산 때문에 구름을 보지 못하는 제가 우스워서, 예전에 보았던 티벳의 어머니가 떠올라 눈을 감았다 뜹니다. 그리고 가슴에 품어온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봅니다.

티벳에는 어떤 간절함이 살고 있다.
▲ 윈난(雲南) 차마고도(茶馬古道) 티벳에는 어떤 간절함이 살고 있다.
ⓒ 손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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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제가 무사히 낯선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의 기도 때문이며, 낯선 길 위에서 제게 손을 내밀어 준 이름 모를 낯선 사람의 고마움 때문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여행은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제 무모한 용기로 길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이는 극히 제 눈으로 바라볼 때뿐이며, 제 눈을 버리고 나면 낯선 길 위의 낯선 고마움을, 고향에서 나를 걱정해주는 지인(知人)들이 보입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오늘날까지 제가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의 기도 때문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바람이 제게, 신산(神山)이 제게 말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때론 눈을 감아도 잊혀지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 윈난(雲南) 소금계곡(鹽井) 때론 눈을 감아도 잊혀지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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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제 앞에 구름이 나는 듯, 춤추는 듯 (메이리쉘산을 품고서) 저처럼 깊은 사랑을 보내며 그를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구름 때문에 설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구름과 설산을 함께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저 구름처럼 앞으로의 여행에서도 자연스러워지길 빕니다.

2010 .06.11 메이리쉘산(德欽-每里雪山)앞에서


태그:#중국, #더친, #소금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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