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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의 수많은 전태일

인천 소재 대학교 복사실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2학년 근수(가명, 22세)는 집이 강원도입니다. 근수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자취할 수 없어서 학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1학년 때는 잠시 친구와 작은 방을 구해 월세를 내며 살았는데 월세가 밀려 방에서 쫓겨났습니다. 살던 집에 있던 짐을 둘 곳도 마땅치 않았고 주인집 아주머니가 무서워 아직도 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일본에선 아르바이트만으로도 생계유지가 가능하다.
 일본에선 아르바이트만으로도 생계유지가 가능하다.
ⓒ 함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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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만 자던 보금자리에서 나온 후로 작년 여름부터 근수는 학교 동아리방에서 지냅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해온 알바는 근수의 생활비로도 벅차기 때문에 다시 방을 구하는 건 엄두도 못 냅니다. 주변 사람들이 근수에게 "거기가 네 집이냐?"고 농담 삼아 묻기도 하고, 호기심에 묻기도 합니다. 그러면 근수는 "네 공짜 집이에요.~ 하하"하곤 웃어넘깁니다. 이제 날씨는 추워지고, 밤 10시 이후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학교건물이 추울 텐데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학교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주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마트 생선코너에서 일한 친구도 있었고, 공장에서 기계 부품을 만지는 일을 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과외, 학원,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친구들은 편의점 아르바이르를 가장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인천소재 대학교에 다니는 재영오빠(가명, 25세)는 열악한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작년, 밤 9시부터 오전 9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일하고 시급은 4천 원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2009년 최저임금 4000원).

나도 지난 5월까지 5개월간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시급을 4000원 밖에 받지 못했던 게 참 속상했습니다. 2010년 최저임금은 4110원이었는데 말입니다. 나와 같은 곳에서 일하던 스무 살짜리 여자아이는 시급이 3500원이었다고 했습니다.

삼각김밥
 삼각김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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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최저임금이 정해져있지만 실제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 하는 편의점에서는 이것마저 잘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나는 '오늘 점심은 뭘 사먹을까'하는 고민도 없이 편의점으로 향했습니다. 삼각김밥 두 개를 사들고 아르바이트하는 곳으로 가서 정수기 물을 한 잔 받아 마시며 점심을 해결합니다. 삼각 김밥 두 개에 1400원.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이렇게 끼니를 해결해야 됩니다. 며칠 전후로 서울에 두어 번 가게 됐는데 그 비용을 맞추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누군가 말했던 삼각김밥 인생이 "바로 내 얘기구나"하고 뼈저리게 느끼며 2010년을 살아가는 스물셋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연히 40년 전 전태일을 만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영화에서 전태일 역을 맡은 홍경인이 분신하고 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영화에서 전태일 역을 맡은 홍경인이 분신하고 있다.
ⓒ 아름다운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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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학교 DVD 열람실에서 아르바이트할 때였습니다. 방학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별로 없어 무료하던 차에 DVD 목록에 있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태일? 어디서 이름은 들어 본 거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어설픈 익숙함에 DVD를 들었고, 그렇게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영화를 본 게 4년 전이라 그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막연하게 '전태일은 참 처절하게 살았구나, 따뜻한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을까요. 봉사활동을 통한 나눔을 좋아하고, 사회복지 공부를 해서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마음먹었던 게 말입니다.

그러나 나 한 명의 '봉사'와 '희생'만으론 그들의 삶이 달라 지지 않는다는 걸, 그런 활동이 그들에게 본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됐습니다.

영화를 보고 얼마 후에 전태일 평전을 읽었습니다. 전태일은 지독히도 가난했고, 지독히도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 가난 때문에 전태일의 '배움'에 대한 열망이 꺾이기도 했고, 그 인간적인 마음 때문에 빈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동현장에 대한 고민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을 할수록 사회는 모순덩어리였고, 전태일은 함께 일하는 어린시다들과 공사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들, 또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새로운 노동환경에 대한 열망을 품었습니다. 그 열망으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가슴에 품고, 인간해방을 외쳤습니다.

전태일의 '외침'은 아직도 진행중

아르바이트할 때 설거지 하는 모습.
 아르바이트할 때 설거지 하는 모습.
ⓒ 김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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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많은 청년, 청소년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는 사업장은 대부분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거나, 일이 별로 고되지 않다면서 임금착취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노동자들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전태일이 부단히 애써서 만들려고 했던 노동조합은 현재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입니다. 오늘날에도 노동조합 만드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얼마남지 않는 임금을 올려야 한다고 외쳤던 전태일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 마음을 울립니다.

물론 40년 전에 비하면 임금이 올랐다지만, 물가도 그만큼 올라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학자금 대출 700만 원을 갚지 못해 자살한 여대생의 이야기나, 자녀의 등록금을 해결하지 못해 자살한 부모의 이야기. 비정규직이라는 이름 하에 백만 원 남짓의 임금을 받으며 잘리면 아무소리 못하고 그만둬야 하는 현실도,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하는 철거민들의 이야기도, 40년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음은 얼마 전 전태일을 생각하며 썼던 일기입니다(블로그에 올린글).

너와 내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너의 시대로 가서 산다면
네가 있는 청계천 어딘가에서 나도 일한다면
그리고 너를 알게 되었다면 나는 너와 친구가 됐을까.
너와 함께 할 수 있었을까.
너의 죽음 앞에서 나는 견딜 수 있었을까.
너의 어머니가 너를 뒤따랐듯이 나도 그럴 수 있었을까.

너와 내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면 어땠을까.
네가 나의 시대로 와서 산다면
우리가 청계천이든 어디에서든 만났다면
또는 광장에서 만났다면 너와 나는 친구가 됐을까.
너는 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의 불의에도 당당히 앞장설 수 있는 바보였을까.

가끔 생각해.
너의 아픔, 분노, 꿈을.
네가 불태우고 간 그것들을 나도 품어보려 애쓰기도 하고
주체할수 없을 정도의 무게가 느껴질때면 무너지려하기도 하고
어떤 말할 수 없는 분노에는 나도 너와 같이 불태우기도 해.

네가 23살 그때 너 자신을 불태우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기도 했어

하지만 슬퍼하지마.
너와 함께 자신들을 불태워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
너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의 친구 태일아
너와 내가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와 나는 좋은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태그:#전태일40주기, #청년유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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