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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22일),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가을 야유회를 갔습니다. 평소 회사일을 핑계로 육아를 아내와 부모님께 미루고 있던 게으름뱅이 아빠도 모처럼만의 주말을 온전히 가족을 위해 쓰기로 했습니다.

 

아빠들은 아이들을 안고 뒤차에 타고 엄마들은 동행한 조부모들과 앞차에 탔습니다. 야유회장으로 가는 길에 원장 선생님은 선생님의 노고를 살짝 내비추며 아이들의 평소 생활 모습을 담은 영상물을 보여줬습니다. 부모들은 서로 자신의 아이가 나올 때마다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와 함께 가는 야유회라 별 부담을 느끼진 않았습니다. 기껐해야 아이와 함께하는 놀이가 전부일테니까요. 그러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른 건 야유회 장소에 도착한 후였습니다.

 

자리가 없어 엄마들 차에 탄 저에게 원장선생님이 짐 운반을 부탁한 것이었지요. 고기에 각종 짐을 옮겨 놓고 나니 드럼통으로 만든 바베큐 그릴에 불을 붙이고 고기를 굽는 임무가 생겼습니다. 평소 바베큐는커녕 회식 때 삼겹살도 잘 안 굽는 게으름뱅이인 제가 제대로 걸린 순간이었습니다.

 

어찌어찌해 번개탄에 불을 붙였지만 일을 같이할 다른 아빠들이 탄 차는 늦기만 했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저만 보는데, 평소 삼겹살 회식에서도 고기를 잘 못 굽는 저인지라 이 모든 일이 낯설고 약간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일 좀 하는 분들이 합류해서야 겨우 불이 모양새 있게 붙었습니다. 불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고기를 굽는 시간이 돼자 이제는 더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다른 분들이 고기를 제게 받아가기 시작한 거죠. 같은 임무를 부여받은 머리가 훌렁 벗겨진 중년부터 아직 앳된 티가 벗어나지 않은 30대 초반 아빠들이 서로 존대를 하며 고기를 굽는 애매한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계속 고기만 굽고 있는 저나 다른 아빠들에게 미안했던지 원장선생님은 몇 번이나 공치사를 하고 직접 술도 따라 주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아빠들끼리 서로 인사를 하게 되고 맥주잔을 서로 교환했습니다. 삽시간에 소주와 맥주를 먹은 저는 잘 익지 않은 고기를 틈틈이 먹으며 계속 고기를 구웠습니다. 아이 엄마한테서 이제 그만 오라는 신호가 왔지만, 대체 인력이 없어 움직일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낼름 낼름 고기만 받아가는 다른 아빠들이 야속했지만, 그 아빠들도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는 갓난아기와 큰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겨우 짬이 난 건 고기를 어느 정도 굽고 났을 때 였습니다. 겨우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거지요.

 

다음 순서는 가족들간의 게임이었습니다. 파란팀 빨간팀 두팀을 나누어 게임을 했습니다. 아이를 고무통에 담아 썰매를 태우는 릴레이, 고무신 신고 던지기 등 여느 야유회에서 있을 법한 놀이에 모두들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저의 저질 체력이 드러난 건 다른 아빠들과 앞뒤 가랑이 사이로 손을 잡고 달리는 기차달리기에서 였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힘을 빼면 대형이 무너지기 때문에 서로 앞뒤로 손을 꼭 잡고 불편한 자세로 몇 번을 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제가 앞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저질 체력을 드러내며 쓰러졌고 다른 아빠들도 같이 잔디밭에서 굴러야 했습니다. 가족들은 박장 대소하며 즐거워 했지만 치욕감과 노래진 하늘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위기가 온 건 줄다리기 때였습니다. 엄마들의 뒤를 이어 아빠들이 투입된 야유회장엔 남자들 사이에 갑자기 비장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야유회가 시작 될 때 서먹해서 인사도 못 하던 아빠들이었지만, 그사이 친해진 아빠들 사이에 승부욕이 발동된 거지요. 서로 격렬하게 "화이팅"을 외친 아빠들은 필사적으로 줄을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으쌰!으쌰!" 우렁찬 구호소리에 원장 선생님이 급기야 열기를 식히러 나섰고, 몇 번의 신경전 끝에 시작된 줄다리기는 결국 우리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승리한 팀의 아빠들은 서로 수고했다고 격려하고 진 팀의 아빠들은 못내 아쉬워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안 하던 달리기에 갑자기 힘을 너무 썼던 지라 설익은 고기가 속에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벌개진 얼굴에 뒤곁으로 달려가 먹은 걸 어느 정도 토해 냈습니다. 돌아와선 티도 내지 못했죠.

 

마지막엔 원장선생님이 한 가족도 빼지 않고 경품을 나누어주어 다들 즐거워졌습니다. 바깥 일을 하는 엄마든 집에 계신 엄마든, 엄마들은 서로 안면도 있고 몇몇은 상당히 친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아빠들은 그럴 시간도 기회도 없는 게 대부분입니다. 이런 아빠들이 야유회가 끝나자 어색한 분위기가 많이 없어졌죠. 이젠 길에서 만나도 서로 반갑게 인사하겠지요. 평소 육아에서 한 발짝 나와있던 아빠들이 모처럼 부모 역할을 한 하루였습니다.

 

되돌아 오는 버스 속에서도 계속 벌건 얼굴이 되어 있던 제게 아내가 말했습니다.

 

"뺀질이가 웬일이래"


태그:#육아, #어린이집, #야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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