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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같은 장맛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어스름한 초저녁,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부터 논 물꼬를 보고 오느라 흠뻑 젖은 어른에 이르기까지 도서관 방안을 빙 둘러 앉은 모습이 범상치 않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평리 죽곡농민열린도서관(관장 김재형)이 마련한 '농민인문학 강좌' 네번째 강의 모습이다.

 

7월 16일(금) 네번째 맞이하는 강의는 곡성 아이들의 친구이자 '천사 할아버지'로 더 잘 알려진 전 곡성군농민회장, 박종채 곡성민주사회단체협의 상임대표께서 '함께 하는 세상'을 주제로 자신의 인생경험을 토대로 한 인생론을 말씀해 주셨다.

 

박 대표는 "화려한 이력이나 특별한 명성은 없지만 여러분들과 같이 농사를 지으며 나름 '진짜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는 자기 소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해방 한 해 전인 1947년 세상에 나와 어렵사리 곡성농고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다. 요즘으로 치자면 '야학' 같은 학교인데 1967년 초부터 고달고등공민학교 영어교사로 1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농협에서도 근무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 두고, 76년부터 남원 대산면에 황무지 1만여 평을 구입해 이주했다.

 

중간에 예기치 않은 일로 꿈을 접고 서울로 갔다. 서울에 있던 중, 내 인생의 사숙인 함석헌 선생님을 만났다. 83년 어느날 함석헌 선생 강의를 듣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차창 밖에서 날리는 아카시아 향기가 콧끝을 스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향수(鄕愁)에 젖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내려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는 "나는 농민이야말로 '나사렛 예수'처럼 세상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성인이라고 생각한다"며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구조적 '악(惡)'으로부터 온갖 수탈과 부림을 당하면서도 제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뭇 사람들의 삶(生命)을 먹여 살린 이가 농부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을 하면서 가장 홀대받는 이 또한 농부들이 아닌가 싶다. 이런 농민의 삶을 옥죄고 좌우지 하는 세 가지 패악이 있다.

 

첫째는 박정희 이후 지속된 공업화와 국가의 농산물 저가(低價) 정책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농업은 늘 희생을 강요받았고, 지금도 쌀 값은 20년 전 보다 싸다. 80Kg 한 가마니에 18만원 선이던 것이 지금은 10만5000원까지 추락했다. 3~4천원 하던 화학비료는 3만원으로 올랐다 그나마 50% 보조를 받아 1만5천원에 살 수 있다. 우리네 식탁은 자동차, 휴대폰, 팔기위해 맞바꾸어 들여오는 수입농산물로 넘쳐나고 있다. 언제까지 국가경제를 담보로 농민을 죽일셈 인가!

 

둘째는 농협이 농민의 삶을 수탈하고 있다. 내가 직접 경험한 내용인데, 97년도 곡성읍농협 통합 대의원 대회 예산 심의과정에서 조합직원 자녀 학자금 지원 예산은 9800만원을 책정하면서 조합원 자녀 학자금 지원 예산은 1원 한푼도 책정하지 않았다. 단단히 야단을 쳐서 당시 조합장이 5000만원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해서 그 후로 이어져 오고 있다. 주인인 조합원은 뒷전이고 일꾼인 조합 직원 뱃속 채워주기에 급급한 것이 농업협동조합의 실상이다. 농민들의 돈 줄을 틀어쥐고 입 맛대로 농민의 숨 줄을 쥐락펴락 휘둘러 대고 있다.

 

셋째는 농민 조합원들의 도덕적 타락이 극(極)에 달했다. 조합장 선거철이되면 금품, 향응 접대는 으레 있는 일이고 조합의 견제 기관인 감사를 선출하는데 후보자가 돈을 주고 자리를 사는 것이 더 현실적인 당선책이라고 하니 제왕적인 조합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공부하는 조합원도 없고, 조합원 교육도 전무하다. 조합원의 대표 기관인 대의원은 감투로 전락해 쓰는 것만으로도 황송한 대접을 받는다.

 

박 대표는 "장삿꾼은 밑천이 든든해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듯 인생도 '인생관'이라는 밑천이 든든해야 깊고 온전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농민들의 무지를 악용하는 국가와 주인을 등쳐먹는 농협 그리고 자신이 주인임을 애써 외면하는 농민, 이들의 공통점은 "남이야 어찌 되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다"라는 '물질만능주의' '능력제일주의' 신봉자들이다. 이러한 사회 풍조가 만연한 사회에서 '부산여중생 납치성폭행 살해사건'같은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일이 터질 때마다 '사형집행 부활'이 거론되고, '화학적 거세'라는 또 다른 반인륜적 법률이 처방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잔인한 범죄자를 더욱 잔인하게 처벌해도 범죄는 계속 일어나고 있다.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한다면

 

"부산여중생 납치성폭행 살해사건을 보면 그것은 개인의 범죄이기도 하지만 좀 더 크게 보면 우리 사회의 구조악(惡)의 일부분이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제2, 제3의 부산여중생 납치성폭행 살해 사건이 계속 나올 것이다. 그래서 '사회정의'가 필요하다.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사회일 수록 그러한 범죄가 줄어들 것이다.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보다 윤택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 붓다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것)적 차원에서 보면 '장좌불와'로 유명한 성철스님의 깨달음은 단지 개인의 깨달음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깨달음으로 인식해야 한다. 성철스님에게 그런 큰 깨달음을 준 것은 자기 자리올림 보다는 깨달음 만큼 중생을 바른길로 제도(提導)하라는 진리의 울림인것이다.

 

"예를 들자면 하다못해 농민집회 자리에라도 참석하셔서 '법문'이라도 한 말씀해 주시면 300만 농민의 목소리보다 훨씬 큰 울림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나 '함석헌 선생'처럼 아래로 내려와 민중 속에서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는 강의를 마무리 하면서 "농민 활동가를 자처하는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이 '절대 승리의 철학'(싸움에 나서는 순간부터 이긴다는 신념)과 '결과 극복의 철학'(결과는 여러가지 원인이 얼키고 설켜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는것이 중요하다)을 잘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결코 어려울 일도 없고 극복하지 못할도 없다. 더불어 살아가는 정의로운 사회가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임을 잊지 말고 자신의 삶에 최소한의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죽곡농민열린도서관 카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천사, #함께하는 세상, #인문학, #도서관,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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