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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올레 9길을 걸어보니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시간을 내어 올레 10길을 걸었습니다. 올레 10길은 화순해수욕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화순해수욕장을 지나 올레길을 걸어가니 거대한 퇴적암이 나타났습니다.

 

올레 표지판엔 '퇴적암지대'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거대한 퇴적암이 기기묘묘한 형태로 펼쳐져 있어 최고의 해안 경관'으로 꼽힌다고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흔히 용머리 해안이라고 하는데 지역 주민은 모래도 돌도 아닌 땅이라고 해서 썩은 다리라 부른다고 합니다. 진짜로 거무튀튀한 모래와 돌이 섞여서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니 거무스름한 모래밭이 나왔습니다. 50미터 정도 걷자 이번엔 가파른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오르고 보니 마치 돌조각을 한 듯 멋진 바윗돌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었습니다.

 

화산 돌로 이루어진 화산 바위가 언덕 오솔길마다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시 모래밭이 넓게 이어졌습니다. 길 건너엔 거대한 산방산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경치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사구언덕과 산방연대 그리고 용머리 해안

 

평지 바위 중간쯤 다시 위로 올라 숲길로 가라는 표지가 있습니다. 올레 표지엔 '모래로 이루어진 언덕으로 오래 전부터 배늘모살동산이라고 불려 왔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산방산이 더 가까이 보였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산방산도 경치가 좋았습니다. 바로 아래로 찻길이 나있고 누군가 깎아 내린 듯한 바위가 큰 병풍처럼 서 있었습니다. 육지에선 보기드문 산 같았습니다.

 

헉헉 거리며 언덕길 오르니 산방연대라는 올렛길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연대는 조선시대에 변경의 제 일선에 설치한 대로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대 위에는 가건물을 지어 각종 병기와 생활필수품을 간수하게 했다. 산방연대에는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이 배치되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산방연대를 지나 언덕에 오르니 용머리 해안이 보였습니다. 진짜로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바위 모양을 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큰 배가 언덕 아래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용머리 해안에 가기 전 용머리 주변의 지질에 대한 설명문을 잠시 보았습니다.

 

'용머리 주변지역은 광해악 현무암으로 구성되었다. 용머리는 약 100만년전 수성화산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응회한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채(응회암)이다. 산방산은 용머리 응회한이 형성된 이후 조면암질 용암이 흘러나와 만들어진 용암돔으로 약 80만년의 나이를 지니고 있다'

 

설명문이 더 있었으나 시간이 부족해 못 적었습니다. 그 옆엔 하멜기념비가 서 있었습니다. 하멜기념비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선박 디 스페르워드호가 표류하여 헨드릭 하멜이 이곳에 발을 딛게 된 것은 1653년 8월 16일의 일이다. 그 뒤 13년 동안 그는 이 땅에 머물렀고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책을 펴내 한국을 서방세계에 널리 밝힌 최초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 옛 일을 기념하여 여기 이 작은 돌을 세운다'

 

용머리 해안은 높은 절벽 아래에 한바퀴 돌 수 있도록 길이 나 있었습니다. 경치가 좋아 한번 가보려 했으나 입구를 모두 막아 놓고 입장료를 받고 있어 가보지 못했습니다. 자연 경치 구경하려는데 왜 돈을 받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용머리 해안 입장료 받는 옆에 큰 배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하멜배라고 합니다. 속에 들어가 구경하는데 거기도 돈을 내더군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못 들어가 보았습니다. 의자 하나엔 하멜로 보이는 동상이 앉아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방사탑 그리고 마라도 할망... 설쿰바당

 

다시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이번에 만난 볼거리는 방사탑이었습니다. 제주엔 이런 돌탑이 많았습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기운이 허한 곳에 돌탑을 쌓아 액운막이를 한다고 합니다. 그 옆엔 마라도 할망당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사연이 참 안스러웠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아기업게 처녀의 혼을 달래기 위해 마라도 북쪽 끝에 만들어진 당'

 

올레길을 따라 걷다보니 볼 것도 많고 감상할 것도 많았습니다. 이번에 볼 것은 설큼바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주도에 와서 생전처음 들어보는 말들이 참 많은데 설큼바당도 그 중 하나입니다. 설큼바당에 대한 설명은 이랬습니다.

 

'옛날 이 바닷가에 돌담을 쌓아 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원이 있어 설쿰원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볼 수 없다. 설쿰은 바람이 눈에 만든 구멍으로 설기설기 얽혀진 바위투성이 지대를 일컫는다'

 

검은 모래사장을 걸으며 용머리 해안을 바라다 보았습니다. 바닷물 넘실거리는 바닷가엔 온통 거친 용암 바위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느덧 송악산을 넘었고 용머리 해안도 지났습니다. 올레길 표시판은 나를 차길로 안내했습다.

 

차길로 한참을 가다보니 다시 모래 밭이 나오고 바다 가까운 곳엔 큰 바위섬이 하나 솟아 있었습니다. 잡힐 듯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바위도 있고 모래도 있는 해안가엔 나이 드신 여성 분 몇몇이 해안가로 떠내려온 해초를 부지런히 주워 모으고 계셨습니다. 어디다 쓰려는 것일까요? 할머니 한 분에게 물었는데 제주도 말로 뭐라 했지만 못 알아 들었습니다.

 

모래 언덕이 끝나는 길에서 다시 돌무더기 바닷가가 이어졌습니다. 용암이 흐르다 물에 닿아 굳어진듯 보글보글한 돌모양이 지천에 깔려 있었습니다.

 

출입금지 표지판 세워진 1만5000년 된 화석 발자국 발견지

 

올레길을 걷다보니 출입금지라는 간판이 있고 바닷가 길을 굵은 나무로 모두 막아 접근을 못하게 해둔 곳이 있었습니다. '여긴 왜 이렇게 해두었지?' 다소 의아해 하면서 가는데 5미터 간격으로 큰 사진과 함께 설명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게 뭐하는 곳인지 몰라서 길건너 발자국 관리 사무소란 곳이 있길래 가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그곳이 왜 출입금지 되어 있는지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1만5000년이나 된 화석 발자국 발견지였습니다. 지난 2002년 어느 학자가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학술회를 거치고 조사를 거쳐 2005년에 국가 천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엔 사람, 코끼리, 사금, 게 같은 여러 종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모르고 있다가 지난 30년 전부터 모래가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면서 지금 그렇게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래 속에 있을 땐 원형이 잘 보존되다가 밖으로 나와 해를 보고 바람을 맞고 비를 맞으니 자꾸만 부식되어 간다고 합니다. 자연의 역사는 보존이 쉽지 않나 봅니다.

 

화산 돌무더기 올레길을 한동안 걸었습니다. 멀리 구멍이 송송 뚫린 암벽 산이 보였습니다. 가보니 송악산이었습니다. 입구엔 산책길과 운동기구가 있었습니다. 송악산 절벽에 웬 구멍이 저리도 많이 송송 뚫려 있는 것일까요? 지나가는 동네 산책 나온 분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저 곳은 왜정때 일본군이 군 보급기지로 쓰려고 만들어 둔 곳입니다. 비행기도 뜨고 배도 뜨고 했어요. 미군이 올 때는 함포 사격도 했었어요."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곳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송악산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바다 아래에도 나 있는 큰 구멍은 산 중턱에도 있었습니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나 전세계를 집어 삼키려고 일으킨 전쟁이 얼마나 큰 참상을 안겼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지나 송악산 절벽 위를 걸으니 그 느낌 새로웠습니다. 옆은 절벽인데 풀밭엔 누군가가 니우는 염소와 말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제가 지나가니 염소들이 놀라 모두 절벽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염소가 절벽 아래 바닷물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요. 저는 최대한 조심해서 염소가 많이 놀라지 않게 걸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멀어지자 염소들은 하나 둘 다시 풀 숲으로 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 와서 오름은 또 처음 올라와 봅니다. 송악산에 있는 오름 이름이 절욱이 오름이라 하더군요. 여느 오름과 달리 크고 작은 분화구가 있었습니다. '주봉의 둘레 500미터 깊이 80미터 분화구는 아직도 검붉은 화산재에 덮혀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아직 식지 않은 듯 벌건 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가 오후 7시였습니다. 오름을 내려와 산 길을 걷는데 조금씩 날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배고프니 생감자 씹는 맛도 달콤하기만 했어요

 

솔 숲길을 빠져 나와 산을 내려오니 다시 밭 길이 이어졌습니다. 감자 밭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붉게 물든 해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지만 주변엔 밭과 바닷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빈 감자 밭에 들어가 먹을 만한 감자를 주워 들었습니다. 배고프니 이거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큼지막한 감자 하나를 손에 들고 올레길 표지를 따라 한참을 걸었습니다. 어슴푸레한 어둠결에 제주시 상하수도본부 대정하수처리장이 나왔습니다. 그곳엔 올레꾼을 위한 쉼터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곳 수도시설을 찾아가 감자밭에서 주워 온 감자를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물어 뜯어 감자 껍질을 깎았습니다.

 

배고픈 나머지 감자를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어둠 올레길을 걷고 있는데 큰 테니스장에서 사람들의 즐김 소리가 났습니다. 가만히 보니 남녀가 모여 테니스를 즐겁게 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배고파 감자밭에서 감자 하나 주워 먹으며 걷고 있는데 저들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저렇게 저녁 든든히 먹고 난 후 다시 부른 배를 꺼트리기 위해 한적한 운동 시설에서 불켜놓고 테니스를 즐기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 그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저녁밥 든든히 먹고 운동을 즐기는 그들이 제주도 귀농한답시고 와서 가족과 함께 어찌 살아갈까를 고민하며 올레길을 걷다 배가 고파 감자 다 캐낸 빈 밭을 뒤져 농부가 남기고 간 감자 하나 주워 우적우적 씹어 먹는 제 심정을 알기나 할까요?

 

웃고 떠들며 운동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생감자를 씹어 먹으며 어두운 올레길을 계속 걸었습니다. 생감자를 다 먹고나니 허기가 잠시 물러나더군요. 배고픈데 어쩌겠나요? 배고프니 생감자 씹어먹는 맛도 달콤 하기만 했습니다.

 

멀리서 마을 불빛이 보였습니다. 저기까지 가면 10번째 올레길이 끝나려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멀었더군요. 밤 바다 파도소리가 들렸습니다. 멀리 등대도 보였습니다. 바다 가운데 뜬 배가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고기잡이 배인가 봅니다. 등대 불이 빨갛게, 파랗게 바뀌고 있었습니다. 제가 관광차 와서 걷는 올레길 이었다면 더없이 아름다운 제주 바닷가 밤 풍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지판은 보였는데 글을 확인 할수가 없어서 휴대폰 불빛으로 올레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하모해수욕장'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예전엔 멸치가 많이 잡히던 곳이라 멀케해수욕장으로도 불렀다. 모래가 곱고 수심이 얕은편. 조선시대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한 곳이기도 하다'는 설명문도 핸드폰 불빛으로 보았습니다. 해수욕장 솔 숲 곳곳에 멋진 화산석판으로 탁자와 의자를 만들어 둔 게 이채로웠습니다.

 

드디어 올레길 안내 책자에 나온 모슬포 체육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밤인지라 길에 파랗게 새겨 놓은 올레 표지판을 찾아 볼 수 없어 때론 헤매기도 했습니다. 마을 공원 옆 올레 11길 시작점을 찾아 올레 도장을 찍었습니다. 다시 물어 물어 화순가는 버스타는 곳을 찾아 갔고 마침 화순행 버스가 와서 얼른 올라탔습니다. 모슬포 번화가인지 음식점도 많고 사람도 북적 거렸습니다. 버스를 놓칠세라 모슬포란 동네를 구경할 새도 없이 화순으로 왔습니다.

 

오후 3시 20분에 걷기 시작해 오후 9시 10분이 되어서야 10번째 올레길을 완주 했더랬는데 모슬포서 버스타고 화순 오는데는 고작 15분이 걸리네요. 암튼 제주도 와서 좋은 경험했답니다.


태그:#올레 10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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