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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느지막이 먹고 오전시간에 파마를 하러 갔다.

"어? 너무 일찍 왔나봐, 아주 조용하네요?"
"요즘 사람 없지... 선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움직일 수 있는 아줌마들은 요맘때 돈 벌잖아."

우리 동네는 미용실이 많다. 골목엔 서너 집 건너 한 집이 미용실일 정도다. 일하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고 혼자서 운영하는 미용실이 대부분이지만, 미용실을 개업했다는 전단지가 요즘도 심심찮게 붙여진다.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 임대가 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가는 미용실은 원장이 수더분하고 인정이 있다. 그래서 안팎으로 놓인 의자엔 늘상 동네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앉아 있고, 미용실을 오가며 봉지커피 타 먹는 건 아주 예삿일이다.

"선거운동으로 '알바' 하는 사람들은 지금이 아주 대목이야. 내가 아는 사람도 수입이 짭짤하다는데, 나두 가게 문 닫고 가서 그거나 할까봐. 집에 있으면 모해? 식사도 나온다니 밥 먹고 좀 움직이다가 오면 되지. 저 짝에 수영이 엄마도 요즘은 그래서 통 못봐."

미용실 원장의 말에 나는 선거운동 유니폼을 입고 율동을 하는 아르바이트 대학생들, 후보 명함을 돌리는 사람들, 후보를 상징하는 마스코트나 깃발들을 떠올렸다.

골목에서 누군가 이름을 불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에 세 살 정도 된 애기가 뒤뚱거리며 미용실로 먼저 들어오고 아이 엄마가 뒤따라 들어왔다.

"거참, (아이가) 학교에서 밥을 안 먹고 오니깐 되게 성가시네. 어린이집 종일반에 있을 때는 한갓지더니 말이야."

애기 엄마가 커피를 저으면서 말한다. 한 모금 홀짝 넘기는가 싶더니 이번엔 '보금자리주택'이야기다.

"근데 우리 지난 번에 '보금자리주택' 신청 안했어요. 너무 비싸더라구요. 우리 신랑 번돈 거기에 집어 넣으면 당장에 생활비가 없는데 어떻게 살아. 그렇다고 내가 나가서 돈을 벌 수도 없고. 아이가 아직 어리니 원."

아기 엄마는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 누나가 초등학교 1학년이라 점심시간 직전에 수업이 끝난다고 했다. 학교에서 나오면 곧바로 미용실로 오는 딸애를 만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갈 것이란다. 아기 엄마는 미용실에 마실겸, 아이 마중을 온 것이다.

원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엄마는 애기들 아직 어려서 선거 알바도 못하것네."

누군가 미용실 문 앞에서 거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원장이 소리쳤다.

"노인네가 무겁게 열무를 들고 다니네, 그거 어디서 사셨어요?"
"에구구... 힘들다. 차로 싣고 다니는 거 싸서 샀더니 들고 갈 일이 걱정이구나. 집에 사람 불러서 갖고 가라고 해야겠네."
"집에 사람 있다믄서 그런 열무 같은 건 젊은 사람이 사게 내버려두지, 힘든데 사들고 다니셔요?"

팔순이 넘은 할머니 숨소리가 불편하게 들렸다. 우람한 덩치에서 들이내쉬며 내는 숨소리는 깊은 우물물을 길어올리는 소리 같았다. 할머니와 애기엄마는 스스럼없이 열무 얘기를 하다가, 동네 어느 마트에서는 어떤 물건이 얼만큼 싸고 비싼지, 할인가격은 어느 마트가 제일 많이 해준다든지의 정보를 서로 나누었다.

"뉴타운은 안 돼" 동네 미용실서 옥신각신

손님 아닌 손님들이 수다를 떠는데 원장이 끼어들었다.

"이번에 선거하는데 누굴 찍어줘야 되는거여?"

애기 엄마가 냉큼 말했다.

"난 우리 동네 '뉴타운건설'안 하는 사람 뽑아야 돼."
"아니 그걸 왜 안 해. 사람덜이 지금 얼마나 기다리구 있는데."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오래된 건물들?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오래된 건물들?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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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과 지하방이 있는 재개발지역. 저 멀리 보이는 반듯하고 깨끗한 아파트처럼 이 동네도 언젠가는 달라질까?
 옥탑방과 지하방이 있는 재개발지역. 저 멀리 보이는 반듯하고 깨끗한 아파트처럼 이 동네도 언젠가는 달라질까?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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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아기 엄마와 80대 할머니가 재개발뉴타운 문제로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기 엄마는 세입자고 할머니는 집을 가진 원주민이었다. 젊은 엄마는 동네가 재개발되면 다른 동네로 이사가야 될 상황을 걱정했다. 아이 엄마는 "남편 직장이 집에서 가까워 그나마 교통비가 안 들어갔는데"라며 "이사간다 해도 지금 살고 있는 집 전셋돈으로 다시 집을 구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아기엄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재개발한다고 한 지도 한참 됐지 뭐. 여기도 얼른 발전이 돼야 해. 이번에는 하겠지. 재개발한다고 뭐라고 써서 붙여놨드만. 거 뭐야, 이번에 *번으로 나온 후보들은 전부 다 뉴타운 한다고 했어. 그래서 *번 뽑아야 해. 다른 건 잘 몰라, 난 그것 밖에 없어."

"이번 선거 누가 되든 아무상관 없어"

할머니 말이 끝나자 이번엔 원장이 한마디 했다.

"난 이번 선거에 누가 되든 아무 상관 없어."
"왜 상관이 없어요? 우리가 경기도 구리시에 살고 있으니까 도지사도 뽑고, 시장도 뽑고, 아이들 교육정책에 뭐가 있는지 잘 따져보고 교육감도 뽑아야죠."

듣다못해 내가 한마디 했다. 그러자 원장이 웃으며 말한다.

"우리 애들 다 컸거든!"

후보들 마다 주민을 위해 내놓는 공약이 제발 쇼가 아니길 바란다.
 후보들 마다 주민을 위해 내놓는 공약이 제발 쇼가 아니길 바란다.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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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한다고 결정고시가 난 펼침막이 동네 골목에 걸려있다.
 재개발 한다고 결정고시가 난 펼침막이 동네 골목에 걸려있다.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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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마를 다 말 때까지 미용실에는 정말 '움직일 수 있는' 아줌마들이 오지 않았다. 택배 아저씨가 들러 누가 이 물건을 미용실에 맡겨놓으라고 했다면서 자그마한 박스를 주고 갈 뿐이었다.

아기 엄마는 학교에서 온 딸내미와 세 살배기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할머니는 집에서 차를 끌고 온 젊은 남자에게 열무를 실으라고 했다. 열무 세 단을 싣고 가기엔 골목길에 세워진 중형차가 너무 크고 번거로워 보였다. 할머니가 가고 나자 원장이 나지막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학 나온 손자가 아직 직장이 없어."

사랑방 동네 미용실은 이웃들의 친근한 통로

6월 2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기준에서 투표를 할 것이다. 아기 엄마처럼 집마련 할 때까지 재개발이 제발 멈춰지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머니처럼 동네에 우뚝 솟은 깨끗한 아파트가 들어서서 집값도 오르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 다 컸다고 이젠 누가 교육감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미용실을 나오는데 대여섯 살 남자애가 과자봉지를 들고 울고 있었다. 원장이 아이 이름을 부르며 왜 우느냐고 물었다.

"엄만 어디갔니? 이리루 들어와 있어."

아이가 미용실로 들어가자 마음이 놓였다. 아이를 찾으러 아이 엄마는 아마도 미용실로 올 것이다. 사랑방 같은 동네 미용실은 이웃들의 크고 작은 사연이나, 소식들이 오고가는 친근한 통로 구실을 한다.

내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면 교육도 끝나 버린다고 볼 수 있지만, 내가 사는 마을에 아이들이 있는 한 그리고 이 아이들이 미용실을 들락거리며 커가는 동안에 누구도 교육이 끝나버렸다고 할 수는 없다.

아장아장 걸음걸이도 불안한 어린 아이들이 엄마를 찾다가 미용실에도 들리고 그러면서 훌쩍 커갈 것이다. 우리의 교육정책도 훌쩍 크는 아이의 키처럼 한 오백년쯤 앞을 내다 보았으면 좋겠다.


태그:#재개발, #뉴타운, #지방선거,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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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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