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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공항으로 날아오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용두암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른쪽에 용의 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용두암이다.
 제주공항으로 날아오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용두암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른쪽에 용의 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용두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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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굿'으로 드센 바람을 잡고 '화산'으로 푸른 자연을 품느라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섬은 오래 전 4월 3일의 사건처럼 피로 물든 숱한 아픔과, 용암동굴처럼 수십만 년 된 자연을 품으며 견뎌 온 역사, 그리고 해녀처럼 물질을 하느라 생채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생존의 절박함 등을 하소연이라도 하듯 가쁜 파도를 일렁이고 있었다. 제주도는 그렇게 바다 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여느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주요한 신은 남성이다. 특히 세상을 창조한 신인 경우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제주도는 거대한 여신인 '설문대할망'이 만들었다. 그리고 꽃샘바람을 몰고 와 제주도를 품는 신도 다름 아닌 '영등할망'이다. 이는 삼다도(三多島,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은 섬)의 한 구성요소인 '제주도 여성'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제주도는 해녀를 비롯해 여성들이 경제를 지탱해 왔다. 제주도 여성들은 해산물을 잡는 물질뿐만 아니라 농사일, 땔감 마련, 가사 노동, 육아 등을 도맡느라 어떤 지역의 여성들보다 강인해야 했다. 그 강인함이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뎌 낸 할머니로, 설문대할망과 영등할망 같은 여신으로 표현됐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 여성들은 고달픈 삶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설문대할망이 오줌을 누자 바닥이 패어 물살이 빨라졌다는 둥, 자신의 키를 자랑하다 물장오름에 빠져 죽었다는 둥 여신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수학여행을 온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학생들은 성산일출봉을 둘러보며 "최고"라고 감탄했다.
▲ 성산일출봉 수학여행을 온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학생들은 성산일출봉을 둘러보며 "최고"라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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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이렇게 여러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를 아름답고 신비로운 섬으로 바라본다. 국제연합(UN)의 전문기구인 유네스코(UNESCO, 국제교육과학문화기구)는 자연과 관련해 제주도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모두 아낌없이 선사했다.

제주도는 유네스코가 인정한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제주 칠머리당영등굿'과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세계자연유산인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유네스코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지정된 '생물권보전구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는 10월경이면 역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지질공원'이라는 이름이 추가될 전망이다.

제주도, 세계 유일의 '자연유산 3관왕'이 보인다

'세계자연유산·생물권보전구역·세계지질공원'은 그 동안 세계의 어떤 지역도 한꺼번에 지정받아 본 적이 없을 만큼 커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주지질연구소 강순석 소장은 이에 대해서 "아직까지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제주의 자연이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 3관왕)'을 달성하는 것"이라며 제주도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너무 감성적으로 제주도를 바라봤던 탓일까. 제주도는 용암동굴과 같은 이국적인 풍경으로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고, 성산일출봉과 같은 신비한 자연으로 한순간 동경심을 자아내는 대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는 호기심을 달래며 멋진 감탄만을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연을 안고 있었다.

지난 3월말 3박 4일 동안 제주도를 찾아가면서 2권의 책을 챙겼다. <제주 칠머리당영등굿>과 <세계자연유산 제주>는 책장 사이사이 발품과 손품을 숱하게 파느라 흘렸을 저자들의 땀방울이 금방이라도 뚝뚝 묻어날 것만 같은 책들이다.

영등할망이 딸과 함께 오면 날씨가 좋고, 며느리와 함께 오면 날씨가 궂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이자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을 소개한 책 표지에 기능보유자인 '김윤수 심방'의 모습이 보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이자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을 소개한 책 표지에 기능보유자인 '김윤수 심방'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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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바다를 일터삼아 살아가는 해녀와 선박 소유주 등 마을 주민들이 심방(무당)의 주도 하에 드센 바람을 잡기 위해 한데 모여 벌이는 영등굿을 소개한 것이고, <세계자연유산 제주>는 설문대할망이 넉넉한 품으로 수십만 년 전 자연을 보듬고 있는 제주도의 곳곳을 소개한 것이다.

매년 음력 2월이면 제주도 칠머리당에서는 '영등굿'이 벌어진다. 영등굿은 겨울과 봄의 전환기, 꽃샘추위 때 제주를 찾아오는 바람의 신인 영등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계절 제사이자 종합의례 성격을 띤 마을굿이다.

제주도의 음력 2월은 영등바람 때문에 몹시 춥다. 실제 지난 3월 28일(음력 2월 13일) 도착한 제주도는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그러나 영등굿이 벌어지던 29일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 한 점 없이 화창했다.

굿이 벌어지는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한결같게 이 같은 날씨를 빗대 "정말이지 영등할망이 바람 몰고 가버렸수당"이라고 입을 모았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영등신은 많은 의미를 안고 있다. 영등신은 시베리아에서 서북계절풍을 몰고 제주섬에 와서 동백꽃, 복숭아꽃을 피워 봄기운을 돋우는 존재이다. 제주도에 새봄이 찾아오는 이러한 계절의 변화를 제주도 사람들은 "영등할망이 바람을 몰고 찾아와 땅과 바다에 씨를 뿌리고 간다"고 말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영등할망이 올 때 딸을 데리고 오면 날씨가 좋다고 하고,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해에는 궂은 날씨가 계속된다고 풀이한다. 조선시대 기록으로 보아 영등굿은 500년이 넘게 이어 온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혹시, 그 때부터 자연 현상인 영등바람을 놓고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을 해석해 온 것은 아닐까? 영등굿을 볼 당시에는 몰랐는데, 영등굿에는 시집살이로 녹초가 된 며느리의 아픔도 배어 있는 모양이다.

칠머리당영등굿이 펼쳐지던 제주시 건입동과 사라봉 뒤편으로 보이던 바닷가. 국제여객터미널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바다를 가로두른 둑 때문에 영등할망이 오시기 힘들지는 않았을까.
 칠머리당영등굿이 펼쳐지던 제주시 건입동과 사라봉 뒤편으로 보이던 바닷가. 국제여객터미널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바다를 가로두른 둑 때문에 영등할망이 오시기 힘들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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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굿'은 1481년 성종 때 펴낸 <동국여지승람>에 그 기록이 전한다.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은 <동국여지승람> 등을 참고해 1653년 <탐라지>를 편찬했는데, 여기에 소개된 '영등굿' 내용을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에 실린 해석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영등굿은 2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2월 보름에 끝난다. ②이 달에는 배타기(어로 작업)을 금한다. ③영등굿을 하는 지역은 귀덕, 김녕, 애월 등이다. ④초하루에 영신(迎神, 영등신맞이)굿을 하고, 보름(또는 보름 전)에 영등신을 보내는 오신(娛神, 놀이굿)굿을 한다. ⑤애월에서는 떼배의 모양을 말머리 같이 만들어 색비단(삼색 물색)으로 꾸며서 영등송별제 때 놀이굿으로 약마희(躍馬戱)를 한다.

"그들은 느리게 움직이지만 더 많은 제주를 보고 듣는다"

<세계자연유산 제주>는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응회구' 등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3곳을 중심으로 제주도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한라산 어리목탐방로 입구의 '한라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에 소개된 세계의 화산대. 최근 아이슬란드의 화산이 폭발해 큰 혼란을 주었다.
 한라산 어리목탐방로 입구의 '한라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에 소개된 세계의 화산대. 최근 아이슬란드의 화산이 폭발해 큰 혼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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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인구 21만여 명에 불과했던 제주도에 7만 5천 명의 대규모 일본군을 집결시켰다. 일본은 제주도를 공포로 몰아넣으며 숱한 노동력을 착취해 가며 해안 곳곳에 동굴을 뚫은 것을 비롯해 한라산 자락과 거문오름, 송악산, 모슬포 등에도 여러 방공호와 진지동굴들을 파 놓았다.

저자가 오랜 시간 발품을 팔아가며 제주도의 구석구석을 돌아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연 경관만이 아니라 일본이 남긴 아픔처럼 그 속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 사이를 여행하는 그들은 느리게 움직이지만 더 많은 제주를 보고 더 많은 제주를 듣는다"며 제주도의 가치를 알기 위한 방법을 이렇게 소개했다.

<세계유산 제주>는 저자가 발품을 팔아 제주도의 곳곳을 소개하고 있는 알찬 책이다.
 <세계유산 제주>는 저자가 발품을 팔아 제주도의 곳곳을 소개하고 있는 알찬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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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수학여행을 왔던 고교생 조카를 제주에서 만났다. 제주도는 경치는 좋은데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버스로 빨리빨리 이동해서 경치 좋은 곳에서 삼신 분 혹은 한 시간씩 내려놓고 다음 관광지로 급하게 이동하고…

이런 관광으로는 TV와 인터넷을 통해 접하는 현란한 정보에 익숙한 세대의 흥미를 결코 끌 수 없다. 어떤 형태의 여행이든 여행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뿐 아니라, 그 안에 숨 쉬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제주도는 더욱 그렇다."

저자의 말마따나 지난 3월말 찾아갔던 성산일출봉과 한라산 어리목탐방로 그리고 제주민속박물관 등에서는 수학여행을 온 수많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걔 중에는 "(성산일출봉을 올라갔다 내려오며)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어? 정말 짱이다"고 감탄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터덜터덜 어리목탐방대 계단을 내려오며) 아직도 멀었어? 볼 것도 없는데 왜 올라갔다 온 거야"라고 한목소리로 투덜대는 학생들이 더욱 많았다.

평생 한두 번 밖에 없는 학창 시절의 수학여행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바다 건너 멀리 제주도까지 와서 투덜거림만이 추억으로 남아서는 안 될 일이다. 저자의 말에 백번 동의하는 대목이다.

설문대할망이 만들고 영등할망이 품은 제주

제주에서 서울까지는 비행기로 불과 1시간 남짓 걸린다. 그 옛날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육지를 오고 갔을까 생각하니 그들의 애환이 짐작됐다.
 제주에서 서울까지는 비행기로 불과 1시간 남짓 걸린다. 그 옛날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육지를 오고 갔을까 생각하니 그들의 애환이 짐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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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찾아갔던 지난 3월말은 서해안의 천안함 침몰사고로 인해 전국이 들썩일 때였다. 그리고 최근 수십 일 동안은 유럽 일대에 화산재를 흩날리며 항공대란 등을 초래했던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로 전 세계가 뒤숭숭해하고 있다.

바다와 화산은 이처럼 현재에도 눈물과 아픔 그리고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그에 비하면 제주도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숱한 눈물과 아픔 그리고 안타까움을 할머니의 넉넉한 품으로 감싸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문대할망은 속옷을 만들어 주면 육지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 준다고 약속했다. 할망의 몸은 너무 커서 베 100통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국 1통이 모자라 다리는 놓이지 못했다. 육지와 연결되는 것이 '베 1통' 때문에 좌절됐다는 이 이야기에는 육지와 떨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섬사람들의 안타까운 체념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감수광 감수광 나어떡할렝 감수광 / 설릉사랑 보낸시엥 가거들랑 혼조옵서예
(가십니까 가십니까 나는 어떡하라고 가십니까 / 서러운 사람이 보내드리는 것이니 가시거든 빨리 돌아오세요)

오래 전 가수 혜은이가 불렀던 노래 '감수광'에서도 섬사람의 애환이 느껴진다. 육지에 나가는 사람을 영영 못 볼 것 같은 불안감을 표현하는 것이나, 그래서 가거든 어서 빨리 돌아오라고 보채는 것이 애절하기만 하다.

수학여행이든 신혼여행이든 제주도에 가거들랑, 바람 속에서는 영등할망의 이야기를 듣고 화산 지형 곳곳에서는 설문대할망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제주도는 분명히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제주 칠머리당영등굿> 국립문화재연구소-문무병・이명진 글, 백진순 사진, 민속원, 2008년, 268쪽, 23,000원

<세계자연유산 제주> 박범준 글, 제주특별자치도 감수・사진, 비틀북스, 2009년, 151쪽, 10,800원



태그:#제주, #세계자연유산, #칠머리당영등굿, #세계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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