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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의 바둑판식고인돌
▲ 세계유산 고인돌 전북 고창의 바둑판식고인돌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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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할 한국의 문화재는 더 이상 없겠죠?"

이 질문이 시작이었다.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중 일부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2000년. 그 출발점은 1997년 여의도에 있는 한 식당에서 김 이사장이 지인과 자리를 함께했을 때다. 지인이 김 이사장에게 위의 질문을 던졌고 김 이사장은 그 자리에서 고인돌을 세계유산으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올해는 고인돌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지 10년이 되는 해다. 고인돌이 세계유산이 되기까지 많은 역할을 했던 김 이사장을 서울 도곡동에 있는 고려문화재연구원에서 만났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고인돌이 세계유산이 되었는지, 10년도 더 오래된 이야기를 김 이사장은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유일무이한 가치가 있어야 하고, 그 나라 사람들이 그 문화재를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하고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인돌은 이런 조건에 맞아 떨어지거든요. 초등학생 중에서 강화도 고인돌 보고 그게 선사시대 고인돌인지 모르는 학생이 어디 있어요?"

1997년은 우리나라의 수원화성과 창덕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해다. 그전까지 우리의 세계유산은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이렇게 세 개에 불과했다. 97년에 두 개가 더 추가되면서 다섯 개로 늘어난 상태. 세계유산으로 유네스코에 신청할 다른 문화재는 없을까. 김 이사장과 지인은 당시에 이를 소재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세계유산으로 고고학관련 문화재를 신청해보자, 내가 이렇게 제안했어요. 우리나라에 유일무이한 고고학적 유물이 많아요. 금관, 고려청자가 대표적입니다. 고인돌도 마찬가지구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에 제일 많고 제일 다양하게 있어요. 고인돌문화를 경시하면 안돼요, 이걸 우리가 스스로 알아봐야지, 우리가 알아주지 않으면 세계에서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남한에 있는 고인돌의 숫자는 약 3만5천여 개. 그중 대부분이 전라남북도에 몰려있다. 새마을사업, 고속도로공사, 각종 건설 등으로 숱하게 없어지고도 3만 5천개의 숫자를 유지하고 있으니 오래전에는 더욱 많았을 것이다. 종류도 다양해서 탁자식, 개석식, 바둑판식 등이 고루 분포한다. 전세계 어느나라와 경쟁하더라도 뒤질 것이 없다. 김 이사장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고인돌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그래서 우선 준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전 국회의원이었던 유인학씨를 대표주자로 내세웠구요. 유인학씨가 전라도 영암 출신인데 영암에도 고인돌 많아요. 한 집 마당 안에 고인돌이 서른 개가 있기도 합니다. 내가 그 집을 사고 싶은데(웃음), 그거 사서 그 집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싶거든요."

고인돌이 세계유산으로 만들어지기까지

고인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김병모 이사장 고인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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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준비위원회는 이후에 세계거석문화협회로 발전한다. 거석문화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고 다양하게 분포해있는 만큼, 우리나라에서 세계거석문화협회를 만드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세계거석문화협회를 만든 이후에는 여러 나라에서 관련 전문가들을 불러들였다. 일본, 인도네시아, 프랑스, 인도 등. 전문가들을 모아서 일년에 한 번씩 심포지엄을 가졌다. 한 번은 우리나라에서 한 번은 다른 나라에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그런 준비과정을 거쳐서 1999년,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신청을 유네스코에 했다. 우리나라 문화재청에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신청하고, 한국위원회에서 유네스코 본부로 보내는 방식으로 신청이 이루어진다. 등재여부가 결정되는 세계유산위원회, WHC(World Heritage Committee)는 유네스코 내부에 속해있다.

신청이 접수된 이후에 유네스코에서는 관련 조사관을 한국으로 파견했다. 일본에서 한국고고학을 전공한 니시타니 교수가 오고, 프랑스에서는 거석문화 전문가인 장 피에르 모앙 박사가 와서 한국의 고인돌을 조사해보고 돌아갔다. 그리고 세계유산위원회 회의가 2000년 6월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렸다. 김 이사장도 긴장된 마음으로 이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장에서 또 가슴이 철렁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회의 사회자가 영국의 제프리 루이스라는 고고학자인데 이 사람이 우리 고인돌 자료를 소개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돌덩어리가 모여있을 뿐인데, 어떻게 세계유산이 될 수 있나?' 그리고나서 사회자가 다음처럼 부연설명을 하는 거예요. '조사를 담당한 니시타니 교수의 보고서 내용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만큼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선사시대 기념물이라고 한다. 그러니 반대의견있으면 토론해보자.'"

얼마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김 이사장의 심정도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등재를 신청한 당사국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그러니 반대의견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서 한국의 손을 들어주는 발언이 다른 고고학자에게서 나온다.

"멕시코 마야 잉카문명을 전공한 여성 고고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손을 들고 말하는 겁니다. '니시타니 교수가 권위있는 학자인데, 그 학자의 의견에 반대할 사람이 어디 있냐. 세계유산으로 등재해두고 앞으로 어떻게 유지 관리하는지 우리가 지켜봐야지, 전문가의 의견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편을 들어주는 거예요. 등재가 된 거지요."

이 회의에서는 고인돌 다음 안건으로 티벳 라싸의 포탈라 궁전, 일본의 오키나와 성이 차례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도 이 회의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3년 만에 결실을 보게된 것이다.

한반도에 고인돌문화가 전해진 과정

김병모 이사장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초승달 모양처럼 분포하고 있다.
▲ 아시아의 고인돌 분포도 김병모 이사장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초승달 모양처럼 분포하고 있다.
ⓒ 김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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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장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고인돌을 만들었던 시기는 대략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후 400년 사이다. 당시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이전하는 기간이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한반도의 고인돌이 유럽의 고인돌보다 시기적으로 약 2천년 가량이 늦습니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2500년 경에 농사와 관련해서 화전기술이 생겨났어요. 당시 고인돌은 화전기술자들의 무덤이자 여기는 우리땅이라는 영역의 표시였지요. 유럽에도 고인돌이 많았는데 개발이 진행되고 도시화가 되면서 상당수가 없어졌습니다. 유럽의 고인돌은 우리하고는 다르게 여러 개가 붙어있는 경우가 있어요. 주택으로 치자면 우리 고인돌은 단독주택, 유럽 고인돌은 연립주택인 거지요."

그렇게 유럽에서 생겨난 화전기술이 지중해와 흑해로 퍼져나갔다. 화전기술과 함께 고인돌문화도 퍼져갔다. 고인돌문화는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건너뛰고 인도에서 발견된다.

"중동과 중앙아시아는 사막이나 초원지형이 많으니까 농사짓기에 적당하지가 않지요. 카자흐스탄이나 파키스탄에도 고인돌은 없습니다. 힌두쿠시 산맥 넘어서 인도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지요. 그러니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만 고인돌이 분포하는 거에요. 나는 이 놈이 도대체 어디까지 퍼져있나, 그게 궁금했었어요. 그래서 조사해보니까 한반도 남쪽에 제일 많고 서해안 따라서 올라가다가 중국의 통화라는 곳까지 분포해 있습니다."

고인돌은 흔히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무덤의 용도였던 것만은 아니다. 제단이나 부족의 상징물, 일종의 랜드마크의 역할도 겸했다. 산 기슭에 무리지어 있는 고인돌은 집단묘이고, 높은 곳에 홀로 서 있는 고인돌은 제단이나 상징물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농경민족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있다. 이래저래 고인돌은 농사와 연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인돌의 장축(덮개돌의 앞쪽) 방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신라의 초기왕들은 전부 (죽은 후에) 동쪽을 보고 누웠는데, 나중에 중국영향을 받아서 북쪽을 보고 눕습니다. 고인돌은 장축의 방향이 대개 동북쪽이 많아요. 이건 개울의 방향과 연관있습니다. 개울의 상류쪽으로 머리를 두고 눕는거에요. 물이 오는 쪽이 생명이 오는 쪽이니까요. 농사꾼들, 특히 벼농사꾼들이 가진 물에 대한 신앙이 그렇게 만드는 거지요."

농경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고인돌

강화도의 탁자식고인돌
▲ 세계유산 고인돌 강화도의 탁자식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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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반도의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지금 우리와 같은 아시아인들일까. 그렇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2005년에 정선 고인돌에서 출토된 인골의 DNA 검사를 해보았다. 그 결과가 이상해서 인골의 일부를 일본과 이스라엘에도 보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고인돌에 묻힌 사람의 DNA가 영국인 DNA와 같다는 거예요. 고인돌의 유래는 유럽이라고 했지요. 고인돌이 많은 곳이 영국, 덴마크, 독일, 프랑스, 우크라이나에요. 고인돌 시대에 유럽에 아리아 인종이 살고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이동을 하게 됩니다. 이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인도에 정착해서 농업기술을 전하고, 또 인도에서 동남아,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농업기술과 고인돌문화를 함께 전파한 겁니다."

정리하자면 고인돌은 유럽에서 시작해서 지중해와 흑해 주변으로 전파된다. 중동과 중앙아시아는 건너뛰어 인도로 옮겨오고, 이후에는 해상로를 타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그리고 한반도와 일본에 도착한 것이다. 모두 농사를 짓기에 적당한 지역들이다. 일본에서 고인돌이 발견되는 곳은 규슈 지방이 유일하다.

고인돌의 전파경로와 연관있는 또 다른 이야기 한 가지. 인도에는 여러가지 토착어가 있지만 그중에서 드라비다어의 역사가 가장 길다. 이 드라비다어의 단어 중에 쌀, 벼, 밥, 가래, 씨, 메뚜기 등의 농사용어가 한국어와 똑같이 발음된다. 뿐만아니라 인체 부분 명칭, 호칭 등 한국어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인도에 살던 아리아인 농사기술자들이 한반도로 이동해 왔습니다. 그들이 농업기술을 가지고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벼농사 용어와 고인돌 문화도 한꺼번에 가지고 온거예요. 우리는 그 용어들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거구요.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관계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학생도 있습니다."

거석문화, 고인돌문화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인돌은 자신을 만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있다. 자신의 밑에 묻혀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선사시대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경로를 통해서 언제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유럽부터 한반도까지 퍼져있는 고인돌을 연구하다보면 고인돌이 알고 있는 이런 것들을 우리도 알게 될 것이다. 고인돌은 말이 없는 거석이기에, 그 속에서 많은 것들을 알아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김 이사장은 고인돌의 침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고인돌은 그냥 커다란 돌덩어리가 아닙니다. 침묵하면서 우리들한테 다 설명해주는데 우리가 관심이 없어서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지요."

강화도 오상리 고인돌
▲ 세계유산 고인돌 강화도 오상리 고인돌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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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인돌, #세계유산, #김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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