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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자식들하고 살고 싶지만 불가능한 걸 뭐. 요양원에서 마무리하게 되겠지."
"시설로 가야지. 자식들도 못할 노릇 나도 못할 노릇, 나중에 시설에 보내달라고 말했어!"
"달리 방법이 있어야 말이지. 이제는 다들 마지막에는 시설에 가있다 죽는 세상 아니야?"

속마음이야 끝까지 내 집, 아니면 자식들하고 가까이 지내는 삶을 원하지만 이미 바뀌어버린 현실을 어르신들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 노인복지를 하는 동료들이 모여 앉아도 마찬가지. 지금의 어르신들은 또 몰라도 우리 세대는 당연히 시설에 가야 되지 않겠는가로 이야기가 모아진다.

새로운 시설에 대한 견학이나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교육을 위해 요양원을 방문한 적은 있어도, 이번처럼 이렇게 오랜 시간 요양원에 머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장장 열다섯 시간 사십오 분 동안이라니.

내가 머물렀던 요양원의 이름은 '베고니아 요양원', 안내자는 소설가 '카미유 드 페레티'였다. '베고니아 요양원'은 소설 <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가 시작해서 끝나는 바로 그곳이다. 책은 어느 날 아침 9시에 시작해 15분 단위로 나뉘어 이야기가 전개되고 다음 날 새벽 0시 45분에 모두 끝난다. 

<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 표지
▲ 책 <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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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요양원의 기록 일지 같다. 그러면서도 씨줄 날줄로 엮이는 이야기들이 재미있어 단숨에 읽어나갈 수 있었다.

'베고니아 요양원'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느 한 곳 아프지 않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없다. 더 이상 혼자 생활할 수 없어 요양원에 입소했으니 그것은 어쩜 당연한 일. 그러나 몸이 좀 불편하고 판단력이 약간 흐려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의 삶과 반대로 사는 것도 아니니 그 안에서 온갖 일이 다 일어난다.

서로 단짝이 되고, 대놓고 따돌리기도 하고, 미워하며 질투하고 시샘하면서 뒤에서 흉보기도 하고, 사랑에 빠져 가슴 떨려하고, 사랑의 고백을 받아들여 함께 꿈 같은 시간을 나누기도 하고, 무시하고 자랑하고, 싸우기도 하고, 지나간 시절에 겪은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후회와 미련에 몸부림치고...그러다 누군가는 죽어간다...그리고 죽는다.

자식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잠시 머물다 가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해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해도 또 한 쪽에서는 그걸 알아듣는 듯 응대하기도 하고, 요양원 어르신들의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 틈엔가 내 정신과 감정도 뒤죽박죽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사람의 한 평생 삶의 마지막이 이렇듯 힘들고 아프고 헛헛하고 혼란스러운데, 그렇다면 도대체 한 인간의 성숙함과 무르익음을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바깥 세상을 모른 채 요양원 안에서 스물 네 시간 살아야 하는 삶. 그나마 일어나 앉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다면 식당과 휴게실과 로비라도 오갈 수 있겠지만 거동을 못하게 되면 침대에 그대로 못박혀 누워있어야 한다.

말을 하거나 들을 수 있다면 또 다행. 그마저 어려워지면 소통불능 상태에 빠져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러니 최선을 다한 생의 결과로는 참으로 허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오늘도 자기 앞의 생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힘들고 아파도 살아낸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므로. 나는 여기에 삶의 남루함 아닌 위대함이 숨어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구도 병들고 힘없는 노년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비록 몸도 마음도 정신도 힘을 잃고, 그 빛마저 흐려졌다 해도 끝까지 살아내는 우리 안의 그 힘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 앞에 놓여있는 노년이란 그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떤 교훈을 뒤에 남기고 떠날 수 있겠는가. 어렵고 힘들어도 끝까지 살아내는 것 자체가 생의 마지막에 진정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베고니아 요양원'과 그곳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일상을 구석 구석 들여다보게 해준 작가 카미유 드 페레티는 이 소설을 28세에 썼는데 노년과 노인에 대한 직관과 통찰력이 놀랍다.

이미 늙고 병들어 있으면서 여전히 늙고 병드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자신도 노인이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노인들을 싫어하는 마음, 생생하게 살아나는 과거의 기억들과 처절한 외로움. 그러면서도 늙어 비로소 알게 되는 생의 진실들, 인생과 나이와 시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 노년에도 삶을 지탱하는 끈이 되어주는 사랑.

작가의 명쾌한 정의와 표현에 힘입어 요양원에서 보낸 열다섯 시간 사십오 분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노년의 삶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아니라 진실을 목격하는 일이 힘들고 가슴 아팠지만 그래도 진실이 가진 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답을 찾는 일을 거들어 주기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 Nous vieillirons ensemble>(카미유 드 페레티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2009)



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

카미유 드 페레티 지음, 윤미연 옮김, 문학동네(2009)


태그:#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 #카미유 드 페레티, #노인, #노년, #요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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