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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안개처럼 엷고 희미하게 눈이 내렸습니다. 1월 1일 늦은 밤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내린 눈이니 서설(瑞雪)이었던 셈입니다. 경인년(庚寅年) 백호의 해를 맞으며 '고양올레'회원들이 새 해맞이 첫 걸음을 하는 날, 하늘에서도 포근한 눈을 내려 정겹게 화답해 주신 모양입니다.

중산 안곡습지 공원 입구 팔각정에 모여 인사를 나누며 새 해맞이 첫 걸음을 시작했다.
▲ 고양올레 새 해맞이 첫걸음을 시작하며... 중산 안곡습지 공원 입구 팔각정에 모여 인사를 나누며 새 해맞이 첫 걸음을 시작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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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 자락 안곡습지 공원 입구에 있는 팔각정에 모여 회원들과 새 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설렘과 반가움이 가득한 손잡음에 털털하고 수줍은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연상케 하는 콩설기 떡 한 덩이씩과 몇 개의 귤을 모두가 기쁘게 나누며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걸음을 내딛어 눈 쌓인 고봉산의 품으로 향했습니다.

걸음 중 습지공원 건너편에 잠시 멈추어서 몇 해 전 고봉산과 안곡습지를 개발에 의한 훼손으로부터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던 고양시민들의 열정과 의지를 되새겨보기도 했습니다. 일행은 나지막한 언덕,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걸으며 하얀 눈 덮인 숲과 길을 아이처럼 순진하게 환호하며 나아갔습니다.

어린 아이들처럼 종종 줄을 지어 걸으며 고양시를 느끼고 누렸습니다.
▲ 경인년 고양올레 첫걸음은 행복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처럼 종종 줄을 지어 걸으며 고양시를 느끼고 누렸습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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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으로 향하는 눈 쌓인 언덕길을 걸으며 마냥 즐겁게 웃었습니다.
▲ 눈 쌓인 길을 걸으며 함박 웃었습니다. 고봉산으로 향하는 눈 쌓인 언덕길을 걸으며 마냥 즐겁게 웃었습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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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고봉산의 남쪽 자락을 거슬러 오르며 하얀 입김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고봉산성' 터에 도착했습니다. 산성 터까지 약간의 오르막을 걸어 오르느라 어느새 등줄기엔 땀이 배어났습니다. 일행들과 함께 준비해간 떡, 귤, 조촐한 전 한 접시, 막걸리 한 통을 고봉산성 터 빈 곳에 차려놓고서 이른바 '시행제'(始行祭)를 올렸습니다.

고양시를 아우르는 산과 들과 물과 하늘의 신령께 고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고양올레' 모든 회원들의 평화롭고 의연한 걸음에 힘들고 불행한 기운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해달라며 기원했습니다. 더불어 고양시가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 환경과 생태를 잘 배우고 살리며, 모든 시민들이 누구나  함께 어울려 행복하게 걸을 수 있는 작은 길, 착한 길을 욕심 없이 열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 염원했습니다.

길은 어떤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독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감히 누구에 의해서도, 누구의 어떤 이해와 기득권의 구축을 위해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길은 비우는 곳입니다. 고양시의 길은 그 누구에 앞서 이미 이름 없는 많은 시민들이 새벽에도 밤에도 걸었던 길이고, 오래 전 산길을 따라, 들길을 따라, 물길의 곁을 따라 걸었던 민초들의 삶이 오롯이 흔적으로 남겨진 역사의 길입니다. 그 만인의 길을 겸손하게 열고, 찾고, 연결하는 우리의 걸음이 의롭고 강건해지기를 두 손 모았습니다.

축문을 태우며 경인년 올 한 해 강건하고 무탈한 걸음이 되게 해 달라고 염원했습니다.
▲ <고양올레> 새 해맞이 시행제(始行祭) 축문을 태우며 경인년 올 한 해 강건하고 무탈한 걸음이 되게 해 달라고 염원했습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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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막걸리 한 잔을 음복하여 마시니 가슴도 시원했지만, 머리 속까지도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새 해 들어 첫 걷기에 참가한 모든 일행들도 함께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모아 '시행제'를 올리고서 남겨진 음식과 술 한 잔씩을 덕담으로 나누니 참 좋았습니다. 어머니의 포근한 촉감처럼 살살 내리는 하얀 눈을 맞으며 고봉산성 터 한 곳에 둘러선 일행들의 입가에는 한바탕 웃음꽃이 만발했습니다.

고봉산 정상으로 향하는 곳에서 왼쪽 '영천사'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산의 꼭대기에 우람하게 선 군사시설 철탑을 바라보며,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전국 곳곳의 산에 쇠말뚝을 박았던 일제의 만행이 연상되니 씁쓸했습니다. 하루 속히 남과 북의 적대적 대치와 피곤한 대결이 종말을 고하여 저 흉측한 철탑이 송두리째 뽑혀지기를 소망했습니다. 우리 고양시를 한 아름 품에 감싸 안고 있는 북한산, 고봉산, 덕양산, 견달산, 개명산 등에 곳곳을 점유하고 있는 대결과 분단의 산물인 군부대와 시설이 시민의 품으로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봉산의 서북쪽 눈 쌓인 소나무 사잇길을 오순도순 걸어 나아갔습니다. 선생님 따라 소풍 나온 어린 아이들처럼 종종종 줄을 지어 걷다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놀라 넘어지면서도 비명이 아닌 한바탕 호탕한 웃음을 크게 웃을 수 있으니 엉덩이엔 상처였겠지만 마음에는 보약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들 웃음 가득한 발그레한 얼굴들이 좋아 보였습니다.

마른 솔잎이 푹신하게 깔린 눈 쌓인 오솔길을 걷는 느낌은 사뭇 상쾌했습니다. 미끄러움도 완화해 주고 발바닥 아래를 편안하게 해주는 쿠션은 느낌이 괜찮았습니다. 더욱이 소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흐르는 은은한 솔향기 '피톤치드'는 가슴 양쪽의 허파를 깨끗하게 소독하며 채워주었습니다. 우리는 길을 위해 어떤 것도 준비하지 못했고, 아무런 것도 주지 못한 채 그저 걸으며 누리고 있을 뿐인데, 길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한량이 없는 듯했습니다.   

고양올레 일행들은 눈 쌓인 미끄러운 산길을 서로 돕고 챙겨가며 조심스럽게 걸었습니다.
▲ 눈 쌓인 언덕길을 조심스레 걸었습니다. 고양올레 일행들은 눈 쌓인 미끄러운 산길을 서로 돕고 챙겨가며 조심스럽게 걸었습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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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숯고개(지금의 탄현)'였던 고봉산과 황룡산 사이 골짜기를 지나 동쪽 언덕 위로 100 미터쯤 걸으니 황룡산 '금정굴'이 있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으로 고양 파주지역이 북한군에 점령되었다가 9.28수복이 된 후 한 달 여 동안 이 지역 일대에서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 곳은 북한군 점령 하 인민위원회에 협력한 부역자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적법한 절차 없이 무참하게 집단 총살된 현장입니다.

금정굴은 금을 캐는 수직굴이었다고 하는데, 어린 아이를 비롯해 부녀자들, 노인에 이르기까지 20~40명씩 끌고 와서 총살한 후 암매장 했다고 하며, 1995년 유족 주도로 현장 유해발굴이 이루어져 확인된 결과 희생자는 최소 153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일행은 그 곳에서 잠시 머물며 우리 역사의 혹독한 비극의 현장을 확인했습니다. 생명보다 귀하고 값진 가치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인데, 이념과 체제의 차이로 인하여 무고한 동족을 참혹하게 학살하다니...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진상을 규명하여 희생자들의 영령과 유족들을 위로하는 일일 것이고, 이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 생명의 가치를 거룩하게 증거 하는 상생 평화의 공원으로 거듭나도록 함께 노력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걷는 고양시의 길에 이처럼 아픈 역사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 더 이상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길은 걷는 자들에게 언제나 유쾌함만을 주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가슴 아픈 역사를 더듬어 깨닫게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해 뼈저린 교훈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길이 가진 생명성, 역사성, 심오한 영성의 철학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새 해맞이 첫걸음으로 길을 걸으며 마음의 나이도 한 살 더 먹습니다.

금을 캐던 수직굴인 금정굴은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부역한 자를 색출한다는 이유로 민간인 수 백명을 무참하게 총살하여 암매장한 비극적 역사의 현장입니다.
▲ 황룡산 금정굴 앞에서... 금을 캐던 수직굴인 금정굴은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부역한 자를 색출한다는 이유로 민간인 수 백명을 무참하게 총살하여 암매장한 비극적 역사의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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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굴을 뒤로하고 황룡산의 능선을 따라 계속 걸어 나아갔습니다. 걷는 도중에는 마치 휴전선 철책 길을 걷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힘없이 서있는 녹슨 철책이 길고 거북하게 있었습니다. 그 철책 옆을 무심코 걷는 시민들이 있었고, 우리 일행도 그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시민들의 평화로운 산책길, 호젓한 걸음길에 드리워진 그늘이었고, 흉물이었습니다.

숲 속에 길이 있는데, 철책의 길이었고, 그 길을 걷는 시민들에게 체제와 이념의 대결을 암시하고, 무의식적으로 고착화 하는 철책의 표시가 엄존하는 길은 좋은 길이 아닙니다. 이 철책의 길이 하루 빨리 열리고 걷혀 평화로운 길, 사람과 자연이 서로를 살리는 공존의 길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황룡산 능선의 끝자락에 도달하여 굳이 길이라 할 수 없는 산비탈을 조심스럽게 헤쳐 내려왔습니다. 일행 중에는 눈과 낙엽으로 섞이고 덮여있는 길 아닌 길을 내려오며 힘 빠진 다리의 긴장을 놓아 미끄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위험한 지경은 아니었고, 푹신하였기에, 또 걸음의 벗들이 기꺼이 손을 잡아주었기에 걱정 없이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더 이상 말 할 나위 없는 삶의 원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눈과 낙엽이 섞여 푹신한 감촉으로 밟히는 작은 숲길을 아이들처럼 걸었습니다.
▲ 어린 아이들처럼... 눈과 낙엽이 섞여 푹신한 감촉으로 밟히는 작은 숲길을 아이들처럼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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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산 자락 아래 성석동에는 완산부원군 양도공 이천우의 묘역이 있었습니다. 비전문가인 범인이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와 지형은 훌륭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조카(이성계의 형님 환조의 아들)인 이천우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를 때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도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배산임수의 형세와 동남향의 자태로 자리매김한 묘역은 죽은 자의 유택이었지만, 산 자의 집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일행들과 함께 이천우 묘역 아래에 둘러 모여 '고봉제' 편액이 걸린 고색의 제실을 살피고, 마침 우리들의 인기척을 듣고 밖으로 나오신 양도공파 종친 후손과도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섬기어 받들고 있는 조상에 대한 자부심과 가문에 대한 자랑이 약간은 과도하게 들리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조상에 대한 그것마저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예의상 친절하게 들어주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태조 이성계의 조카이자 조선 개국공신이기도 한 양도공 이천우 묘역 앞에서 당시의 역사를 짧게나마 살피고 더듬어 보았습니다.
▲ 완산부원군 양도공 이천우 묘역 앞에서 우리 일행은 태조 이성계의 조카이자 조선 개국공신이기도 한 양도공 이천우 묘역 앞에서 당시의 역사를 짧게나마 살피고 더듬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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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것은 양도공 이천우가 나이 들어 은퇴할 무렵, 태종께서 훌륭한 공신이었던 이천우 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하였고, 이에 이천우는 어구에 있던 두 마리의 송골매를 원한다 했다고 합니다. 즉 태종이 매사냥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소홀히 함을 충언으로 고하고 이에 태종은 감복하여 두 마리의 송골매(사냥매)를 하사하였다고 하니 지금 무덤 앞 좌우 양편에 대리석으로 새겨 놓은 이응도(二鷹圖)가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유품이자 소품인 셈입니다.

우뚝 솟은 철탑이 보이는 고봉산 정성을 배경으로 '고양올레' 회원들과 단체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
▲ 고봉산 정상을 배경으로 한 단체 사진 우뚝 솟은 철탑이 보이는 고봉산 정성을 배경으로 '고양올레' 회원들과 단체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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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모두 마치고 옛골 시골밥상에 모여 앉아 나물 가득한 보리밥에 막걸리 한 잔을 나눠 마시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 시골밥상 걷기를 모두 마치고 옛골 시골밥상에 모여 앉아 나물 가득한 보리밥에 막걸리 한 잔을 나눠 마시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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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이천우 묘역을 지나며 새 해맞이 첫 걷기여정을 약 3시간 만에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눈 내린 산길을 걸었던 오늘의 걸음이 혹시 미끄럽고 무거웠을지라도 마음만은 뿌듯한 보람으로 가득 찼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가까운 근처 시골밥상에 들러 갖가지 나물을 보리밥에 섞어 비벼 먹으며 '고양올레' 새 해맞이 걸음에 동행했던 시민 벗들과 생각을 나누고, 정을 나눌 수 있음은 큰 행복이었습니다.

고양시민 여러분, 이 건강하고 보람찬 '고양올레' 걷기여행에 행복하게 동행하지 않으시렵니까?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 2일 '고양올레' 회원들과 함께 안곡습지공원 ~ 고봉산성 터 ~ 영천사 ~ 황룡산 금정굴 ~ 황룡산 능선길 ~ 양도공 이천우 묘역 까지 약 8km '시행제'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고양올레'는 다음 카페 cafe.daum.net/gyolleh 를 운영합니다.



태그:#고양올레, #고양올레 새 해맞이 걷기, #고양올레 걷기, #고양올레 시행제, #고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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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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