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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여든둘 막순씨와 마흔살 창길씨는 둘도 없는 술친구
 여든둘 막순씨와 마흔살 창길씨는 둘도 없는 술친구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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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순씨와 알고 지낸 건 한 6년 되나 봐요. 그분들은 외롭게 살던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남들과 쉽게 마음을 열고 친하게 지내는 것도 잘하지 못해요. 막순씨도 그랬지요. 자주 만나는데도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집안에 소주병이 있더라구요. 물어보니 식사 때 반주로 한두 잔씩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됐구나 했지요."

자원봉사자 정창길씨(40)는 박막순 할머니(82)를 "막순씨"라고 부른다.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정감 있게 들리는 "막순씨". 할머니 역시 젊은 남자에게 "막순씨"라고 불리는 것이 싫지 않으신지 "지랄한다" 하면서도 수줍게 얼굴을 붉히신다.

지금은 할머니의 둘도 없는 친구이며, 애인이며, 아들이 되었다는 정창길씨. 하지만 처음부터 두 사람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쌀도 갖다 주고 김치도 담가 주며 자주 드나들었지만 할머니에겐 그저 업무상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구청직원과 다름없는 '남'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길고 외로운 독거생활 끝에 마음마저 꼭꼭 걸어 잠근 할머니. 정창길씨는 그런 할머니에게 용기를 내어 먼저 소주잔을 내밀었다. 보통은 봉사자들끼리 나가서 식사를 하지만 그날은  짬뽕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시켜 마음먹고 할머니와 마주 앉았던 것이다.

"처음엔 이놈이 왜 이러나 하는 눈치더니 한잔, 두잔 나누어 마시면서 말문을 여시더라구요. 외롭고 괴로울 때마다 소주로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술친구가 생겼으니 좋으셨던 거지요. 그 뒤로는 가끔 가서 술친구도 해 드리고 하소연도 들어드리고 그랬죠. 요즘엔 몸이 약해지셔서 술을 전혀 못 하시지만 그땐 소주 두병도 너끈했어요. 그러다보니 우리 막순씨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된 거예요. 이거 다른 할머니들 알면 샘내시겠는데. 허허허."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마을에 자란 그의 선택

어르신들에게 드릴 김장을 하던 날
 어르신들에게 드릴 김장을 하던 날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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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유쾌한 정창길씨. 그에게 본인의 어린 시절은 어땠느냐고 물으니 대뜸 "저 고생 무지하고 자란 사람이에요" 한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식량을 구했다 해서 '득량도'라 이름 지어진 전남 고흥군의 작은 섬이 정창길씨 고향이다.

"중학교 갈 때까지(1976년경) 우리 섬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차도 없었어요. 우유라는 것도 6학년 때 처음 먹어봤어요. 육지 갔던 아버지가 가져오셨는데 뭐가 밍밍한 게 그렇더라구요. 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육지로 중학교를 다니러 왔는데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우와~ 정말 대단하더라니까요."

섬에서 나와 홀로 자취를 하면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가내수공업 수준의 작은 봉제공장을 운영하던 형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형네 집에서 기거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적응이 잘 안 되더라구요. 제가 동급생들보다 나이도 많고 사투리도 쓰는데다 사는 것도 차이가 나고... 암튼 졸업만 기다리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공부는 관심이 없고 얼른 취직해서 돈을 벌고 싶었거든요."

군대를 갔다 온 창길씨는 농협의 유통직 사원으로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 1년 계약직이지만 일만큼은 열심히 하는 타입이라 계속 근무할 수 있었고 윗사람 눈에 들어 훗날 자기 가게를 내는데 큰 도움을 받기까지 했다고.

"워낙 없는 집에 여러 형제들 속에 자라다보니 나 먹고 살기 바빴어요. 나 살기도 어려운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어디 있어요. '봉사' 그런 건 잘 사는 사람들이나 하는 걸로 알고 살았죠."

그런 창길씨가 봉사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약 10여 년 전쯤이다.

"월급쟁이 그만두고 나와 쌀가게를 차렸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근처 교회에 다니신다는 분이 독거노인들에게 쌀 지원하는 일을 한다면서 교회로 쌀을 가져다 달라고 하잖아요. 저야 제 쌀 팔아주니 좋았지요. 처음엔 교회로 주문한 쌀만 가져다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쌀을 전달할 봉사자가 바쁜 일이 생겼다면서 저보고 대신 독거노인 집까지 배달해 줄 수 없겠느냐고 하지 뭐예요. 허허허. 그날부터 코가 콱 낀 거예요."

5일 동안 방치된 독거노인을 구하다

할머니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남으로 꼽히는 정창길씨
 할머니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남으로 꼽히는 정창길씨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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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작은섬 득량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가 돼서야 처음 서울 땅을 밟아 보았다는 정창길씨. 그에게 서울은 꿈의 도시였으며 서울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고향에서 올라와 열심히 일을 해도 고작해야 월세 살고, 전세 사는 입장이었지요. 전 서울에서 우리가 제일 가난한 줄 알았어요. 서울엔 거지도 없고,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솔직히 부자들이 부럽고 내 처지가 불만스러웠지요. 그런데 처음 쌀을 가져다 드리러 가서 그 생각이 딱 깨졌어요."

아무리 반 지하라고 그런 반 지하는 처음이었다는 정창길씨. 쌀을 드리려고 문을 여니 악취가 진동을 해서 차마 집안으로 들어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엔 대문 밖에서 함께 간 자원봉사자가 나오길 기다리며 할머니들이 주신 요쿠르트만 받아먹고 돌아오곤 했어요. 그런데 몇 번 가니 차차 마음이 바뀌더라구요. 솔직히 그 더럽고 냄새나는데 들어가서 청소랑 빨래를 해드리는 봉사자들을 보고 너무나 감동을 받았어요."

쌀 배달을 하다 보니 하다 못해 형광등이 나가도 손을 볼 수 없어 어두운 방에서 지내야 하는 어르신들 사정이 눈에 들어 왔다는 정창길씨. 쌀을 가져다 드리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았다. 집안에 소소하게 고장난 것들을 찾아 수리를 해드리는 것이었다. 고장 난 형광등을 고쳐 어두운 방에 불이 들어왔을 때 할머니들은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며 기뻐하셨다고.

자신의 힘들고 고단한 삶에 늘 불만이 많았던 그는 봉사를 통해 정화를 경험했다. 어르신들의 감사와 칭찬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착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으며 스스로도 자신이 뿌듯하고 대견하게 느껴져 오히려 어르신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한 달에 세 번, 하루에 열 집을 다니지만 전혀 무리가 되지 않아요. 이젠 습관이 돼서 이것 때문에 다른 일에 지장을 받지도 않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 자원봉사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저는 봉사하러 간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어머니 집에 놀러 간다 생각해요. 어머니 집에 자원봉사하러 간다는 사람은 없잖아요."

초창기 봉사 나간 남편 대신 혼자 가게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졌던 아내도 이제는 전폭적으로 남편의 봉사를 응원한다. 봉사를 나간 시간 동안에는 가게일로 신경 쓰게 하지 않는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그의 봉사가 더욱 힘 있고 신났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정진욱 11세. 정유정 8세)도 마찬가지다. 아빠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자랑스러워하며 아빠와 함께 봉사를 나가길 원한다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애들은 데리고 다니지 않으려고 해요. 몇 번 같이 나가보니까 할머니들이 자꾸 애들에게 용돈을 주시는 거예요. 몇 집 돌고 나니 애들 주머니에 10만원이 들어있더라구요. 물론 이쁘다고, 내 손주같다고 주시는 건 알지만 이건 아니다 싶더라구요."

봉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몇 년 전 한 할머니의 목숨을 구했던 일화를 들려준다.

"임대아파트에 살던 독거노인이셨는데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 갔더니 문이 잠겨있고 조용하더라구요. 그런데 이상하게 안에서 악취도 나고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지요. 밖에서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할머니가 쓰러져 계신데 그 상태로 5일이나 된 거예요. 눈만 간신히 뜨시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돌아가셨지요. 119 불러 병원에 입원시켜드리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시잖아요."     

그때부터는 쌀 전달보다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정창길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교류를 해왔던 노인 분들이 한분씩 돌아가실 때면 충격에 오랫동안 마음을 앓는다고 한다.

"아직도 득량도에 어머니가 계시구요. 장인, 장모님과는 함께 살고 있습니다. 모신다기 보다는 제가 처가살이하는 쪽이지만요. 봉사활동 하면서 부모님에 대한 마음도 많이 달라졌어요. 우리 부모님 건강하게 우리 곁에 살아 계신 것만도 너무 감사하구요. 저는 어머니, 아버지가 수도 없이 많아요. 친어머니, 장인, 장모님, 박막순 어머니, 조광식 어머니. 모두  똑같은 어머니, 아버지들이세요. 이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사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후원은 사회복지법인 우양으로 부탁드립니다



태그:#독거노인, #자원봉사,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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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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