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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의 외경. 주변 고층 건물과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지만 고풍스럽고 단아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의 외경. 주변 고층 건물과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지만 고풍스럽고 단아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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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에서 바라본 임시정부 청사의 내부.
 정문에서 바라본 임시정부 청사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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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29일 이른 아침, 안개가 잔뜩 낀 중국의 임시 피난 수도 충칭(重慶). 시 중심가 치싱강(七星崗) 롄화츠(蓮花池) 38호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마당에는 20여명의 군복 입은 젊은이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들의 표정은 모두 엄숙하고 비장했다. 청년들 옆에는 안경 낀 중년의 지휘관 이범석 장군이 청사 전면을 바라보며 서 있다. 시계가 7시를 가리키자, 두루마기를 입은 중키의 한 노인이 안개를 가로질러 청사 안에서 나왔다. 단아하면서 신념에 찬 모습의 그는 안경 너머로 도열한 젊은이들을 응시했다.

아직 20대 초중반에 앳되면서도 긴장된 모습의 청년들. 노인은 자신을 우러러 보는 젊은이들의 눈빛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아무 말 없이 두루마기 안주머니에서 작은 회중시계 하나를 꺼내서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4월 29일은 내가 13년 전인 1932년 윤봉길(尹奉吉) 군을 죽음으로 보내던 날이오. 또 지금이 바로 그 시각인 아침 7시요. 상하이(上海)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시라카와(白川) 대장 등을 죽였던 그 의사 윤봉길이 나와 시계를 바꿔 차고 떠나던 날이오.

같은 날인 바로 오늘 윤 의사와 꼭 같은 임무를 담당할 여러분을 또 떠나보내는 내 심중이 괴롭기 한이 없구려." (김준엽 저, <장정, 나의 광복군 시절> 참조 재구성)

비장감 어린 어조로 말을 잇던 노인은 바로 백범(白凡) 김구(金九)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다. 그는 또 다른 사지로 떠날 젊은이들의 모습에 더욱 목이 메어져 갔다.

그로부터 다시 60여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세월의 역겁 속에서도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롄화츠 청사는 오늘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루 종일 찾는 이 없이 쪽문만 빼곰히 열어 놓은 채 깊은 적막감에 휩싸여 있다.

1941년에 제정되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1941년에 제정되어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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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을 피해 중국 전역을 떠돌아 다녀야 했던 임시정부.
 일제의 침략을 피해 중국 전역을 떠돌아 다녀야 했던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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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거센 핍박을 가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공세가 강화되자,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임정의 이주에는 국민당 정부의 도움이 컸다. 1937년 11월 국민당은 당시 중국 수도인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에 있던 임정 요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배 한 편을 마련해 주어 후난(湖南)성 창사(長沙)로 이동케 했다.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지면서 임정의 대가족은 떠돌이 생활을 지속했다. 1938년 7월 창사를 떠나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로 옮겼고 다시 푸산(佛山), 광시(廣西)자치구 류저우(柳州) 등지를 떠다녔다. 잠시 동안 류저우에서 지내던 임정 요인들은 일본군이 턱밑까지 밀려오자, 구이저우(貴州)성 구이양(貴陽)과 준이(遵儀)로 이동했다.

1939년 3월에는 충칭 바로 아래에 있는 치장(綦江)에 도착했다. 치장 시기 임정은 이념으로 갈라진 좌우익의 합작으로 7당 통일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임정이 충칭의 1차 청사인 양류제(楊柳街)에 입성한 것은 1940년 8월. 난징을 떠난 지 2년 9개월 만에야 안정된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임시정부는 충칭에서도 네 차례나 청사를 옮겨야 했다. 당시 충칭은 날마다 밤낮없이 계속되는 일본 공군의 폭격으로 안전지대를 찾기 힘들었다. 충칭은 산과 언덕이 많았지만, 양류제는 평지여서 폭격에 쉽게 노출되었다. 이에 임정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스반제(石板街)로 청사를 옮겼다.

이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반제 일대가 폭격으로 큰 화재가 나서 청사를 다시 우스예샹(吳師爺巷)으로 옮겼다. 1944년 국민당 정부가 마련해 준 롄화츠 38호로 마지막 이주를 단행했다. 오늘날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로 통칭되는 롄화츠 청사다. 임정은 이곳에서 민족해방을 맞이하고 한반도와 해외 곳곳에 흩어져 있던 우리 겨레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그 중에는 1944년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도 있었다. 김 전 총장은 남몰래 임정의 소식을 듣고 병영을 탈출했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6000여㎞를 걸어 10개월만인 1945년 1월 충칭에 도착했다.

김 전 총장은 롄화츠 청사 대문 위에 한글로 쓰인 '대한민국임시정부' 현판과 꼭대기에 걸린 태극기를 보고 너무나 감동했다. 그는 "건물을 보고 감격한 것은 생전 처음"이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태극기에 정성껏 경례했다"고 훗날 기록했다.

1호 건물 1층 중앙홀에 전시된 롄화츠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극기와 김구 주석의 흉상.
 1호 건물 1층 중앙홀에 전시된 롄화츠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극기와 김구 주석의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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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하고 소박한 김구 주석의 집무실. 한복 두루마기, 박은식 선생의 서적 등 김구 주석의 당시 생활상을 사실과 가깝게 복원했다.
 검소하고 소박한 김구 주석의 집무실. 한복 두루마기, 박은식 선생의 서적 등 김구 주석의 당시 생활상을 사실과 가깝게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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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생각보다 잘 단장되어 있다. 정문 위에 붙여진 대한민국임시정부 현판을 뒤로 하고 청사 안에 들어서면, 가파른 언덕에 위에 건물들이 이어져 있다. 왼쪽으로 2층짜리 1호 건물이 있고 오른쪽으로 2~3층의 2,3,4,5호 건물이 줄지어 붙어 있다.

본래 1호 건물은 서무국과 선전국 사무실로 사용됐다. 지금은 1층에는 중앙홀에 김구 주석의 흉상과 임정이 사용한 대형 태극기를 걸려있는 등 다양한 자료를 전시한 진열관으로 변모했다. 이 진열관에는 1919년 상하이에서의 임정 수립부터 1945년 해방 후 임정 환국까지의 각종 자료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객들로 하여금 임정이 걸어왔던 역사 전모를 이해토록 한 것이다.

진열관 반대편 2호 건물 1층은 임시의정원 회의실 겸 식당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헌법에 명시된 최고기구였던 임시의정원에서는 1919년에 구성된 이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모두 39차례의 회의가 개최됐다.

2호 건물 2층은 외무부 사무실과 외무부장 및 외무차장의 집무실로 이용됐다. 이어진 3호 건물은 3층으로 되어있는데, 1층에는 내무부와 경위대 사무실, 2층은 재무부 사무실, 3층에는 김구 주석 집무실과 국무위원회 회의실이 있다.

김구 주석 집무실의 옷장 옆에 한복 두루마기가 걸려있다. 서가에는 박은식 선생이 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놓여 있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김구 주석과 함께 청사 내 거주했던 조소앙 선생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삼균주의연구소를 두고 학문 정진에 몰두했다. 조 선생 옆방에 거주했던 이시영 선생 또한 조그만 풍로에 친히 밥을 지어 드시면서 조국해방의 의지를 불태웠다.

국민당 정부의 지원이 있었지만, 임정 대가족은 생활이 극도로 어려웠다. 쌀에 밥을 쪄서 콩나물국에 소금을 타 하루 세끼를 연명할 정도였다. 이러한 궁핍한 생활에다 안개 많고 습도 높은 충칭의 기후는 100여명의 임정 가족들을 괴롭혔다. 적지 않은 요인 가족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중에는 김구 주석의 장남 김인도 포함되어 있다.

2호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임시의정원 회의실.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의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으로 삼았다.
 2호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임시의정원 회의실.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의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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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도시 재개발로 사라진 임시정부 요인들 및 그 가족들이 묵었던 한인촌과 사망자의 공동묘지.
 지금은 도시 재개발로 사라진 임시정부 요인들 및 그 가족들이 묵었던 한인촌과 사망자의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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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건물 2층에는 광복군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재미동포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창설됐다. 독립성과 자주성을 지닌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다. 광복군은 대한제국 군인들의 항일무장 투쟁정신을 계승하여, 2차 세계전쟁 발발 후 연합군의 일원으로 수많은 대일 작전에 참가했다.

중국 내에서 편성된 1,2,3지대는 중국군과 긴밀히 협조하며 전장에서 정보수집과 선무공작에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진열관에 전시된 다양한 문헌과 사진은 이러한 광복군의 활약상을 잘 보여준다. 특히 1944년 5월부터는 미국 전략정보처(O.S.S)의 특수훈련에 참가하고 국내 진공작전계획이라는 합동작전을 수립했다.

1945년 4월 김구 주석의 배웅을 받았던 20여명의 젊은 전사들은 바로 진공작전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은 충칭에서 O.S.S 훈련캠프가 있던 시안(西安)으로 출발했다. 장준하, 김준엽 등 광복군 특공대는 잠수함과 낙하산으로 국내에 침투할 예정이었지만, 예상보다 빠른 일본의 항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국 내에는 충칭 뿐만 아니라 상하이, 항저우, 난징, 류저우 등 여러 도시에 임시정부 청사가 산재해 있다. 임정 환국 이후 오랜 역사의 풍상과 급격한 도시 개발로 대다수 청사는 철거되거나 원형이 심하게 훼손됐다.

충칭의 롄화츠 청사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데에는 한 사람의 공로가 컸다. 바로 독립운동가 이달(李達) 선생의 딸인 이소심(李素心) 여사다. 이달 선생은 1920년대 후반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과 활동했고 1930년대에는 상하이의 남화한인청년연맹에 활약했다. 충칭으로 온 뒤에는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광복군 제1지대 등에서 일하던 중 1942년 사망했다.

아버지를 여읜 뒤 이 여사는 중국인 어머니와 함께 충칭에 남았다. 현지에서 의사로 성공하여 1980년대에는 충칭시 인민대표까지 지냈다. 이 여사는 한국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며 살았는데, 1980년대 말 충칭시가 도시재개발을 수립하여 롄화츠 청사를 헐 계획임을 알았다.

임시정부의 군대였던 광복군 조직표. 광복군의 초대 사령관은 이청천 장군이었다.
 임시정부의 군대였던 광복군 조직표. 광복군의 초대 사령관은 이청천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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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이 입었던 군복. 광복군은 군관법을 정해 부대 내 조직체계를 엄정히 했다.
 광복군이 입었던 군복. 광복군은 군관법을 정해 부대 내 조직체계를 엄정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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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과 중국은 수교조차 되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소심 여사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롄화츠 청사의 보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한중 정부에 '청사를 지켜 달라'고 청원을 꾸준히 벌여 1991년 양국 정부 간의 대화가 시작됐다.

도시계획 변경문제와 청사 거주주민의 이주대책으로 난항을 겪던 협상은 1994년에서야 타결됐다. 1995년 1월 독립기념관과 충칭시의 협조 아래 롄화츠 청사에 대한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같은 해 8월 11일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구지(舊地)'라는 공식 명칭으로 복원 기념식이 거행됐다.

그 뒤 1999년 롄화츠 청사는 한국 기업들의 도움을 얻어 훼손된 건물을 보수하고 진열관을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광복군 창설 60주년이었던 2000년 9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개관 했다. 현재 롄화츠 청사는 충칭시 문물보호단위 65-38호로 제정되어 있기도 하다.

롄화츠 청사 외에 충칭에는 임시정부 관련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중 투차오(土橋) 한인촌은 1940년 8월 치장에서 충칭으로 옮겨온 임정 요인과 그 가족 100여명이 살던 곳이었다.

임정 대가족은 충칭에 도착한 지 20일 만에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12㎞ 떨어진 투차오 마을에 정착했다. 국민당 정부가 둥칸(東坎)폭포 아래 기와집 3채를 지어주고 1채를 매입해 옮겨 살도록 한 것이었다. 오늘날 투차오는 도로공사로 폭포가 사라졌고 마을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한인촌에는 강철공장이 들어섰는데, 무성한 잡풀과 벽돌 무더기만이 집터였음을 알 수 있다.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기념식이 열렸던 자링빈관(嘉陵賓館)도 사라졌다. 지금은 새로이 건축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충칭시기 임정 요인과 그 가족이 묻힌 허상산(和尙山) 한인묘지는 쓰레기 처리장으로 변해있다.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송병조 선생, 김구 주석 어머니 곽낙원 여사, 아들 김인 등의 묘지는 자취조차 찾기 힘들다.

충칭시기 3차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우스예샹 1호의 퇴락한 모습. 표지석만이 여기가 임시정부 청사가 소재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충칭시기 3차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우스예샹 1호의 퇴락한 모습. 표지석만이 여기가 임시정부 청사가 소재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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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룽루 37호에 위치한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 건물 앞쪽은 상가로 변했지만 뒤편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저우룽루 37호에 위치한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 건물 앞쪽은 상가로 변했지만 뒤편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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롄화츠 청사에서 500여m 떨어진 우스예샹의 3차 임시정부 청사는 아직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대로변에서 골목길을 들어가면 금세 무너질 듯한 폐가와 같은 우스예샹 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앞에 충칭시 문화국에서 세워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지'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양류제와 스반제에 있던 1,2차 청사가 일본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데다 도시개발로 사라진 것에 비하면, 우스예샹 청사는 시간의 무게를 안고 굳건히 서있는 셈이다. 임정이 우스예샹에서 머문 기간은 1년도 안 되지만, 김구 주석은 <백범일지> 하권의 대부분을 집필했다.

당시 예순일곱이던 김 주석은 "하루가 다르게 늙고 병 들어가고 있으니, 상하이시대를 죽자꾸나 하던 시대라 하면 충칭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 하겠다"고 하소연했다. 백범의 탄식처럼 지금 우스예샹 청사도 죽음을 앞두고 있다. 충칭시가 도시계획에 따라 1~2년 내에 이 일대를 재개발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저우룽루(鄒容路) 37호에 위치한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도 풍전등화의 처지는 마찬가지다. 충칭에서 노른자위 땅인 이곳은 10여년 전부터 재개발된다는 소식이 무성해 언제 헐릴지 모른다. 실제 주변은 모두 현대식 고층빌딩으로 에워싸져 있다.

광복군은 인적 기반을 확대하고 선전활동을 위해서 1943년 전선이 가까운 시안으로 총사령부를 이전했다. 하지만 중국군과의 협력과 군사지원문제 해결을 위해서 본부는 충칭에 그대로 유지했었다. 2차 대전 발발 이후 일본군에 징용됐던 청년들이 탈출하여 충칭을 찾아오면서 광복군은 큰 규모를 갖추게 됐다.

현재 건물 전면은 웨이위안(味苑)이라는 식당이 들어서 있고, 뒷면은 한 식품회사가 사무실로 쓰고 있다. 변형된 앞면과 달리 건물 뒷면과 2층 사무실, 3층 망루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과거 광복군 전사들이 사무실로 사용했던 2층의 여러 방은 비어 있다. 광복군이 훈련했던 건물 내 마당도 보존이 잘 되어 있다.

1호 건물 2층 광복군 진열관에 소장된 태극기. 광복군 군인들이 환국 전 기념으로 사인과 글귀를 남긴 것이다.
 1호 건물 2층 광복군 진열관에 소장된 태극기. 광복군 군인들이 환국 전 기념으로 사인과 글귀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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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전에 자신의 심정을 담은 글귀를 적은 환국기념 서명포.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전에 자신의 심정을 담은 글귀를 적은 환국기념 서명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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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충칭 도심의 3,4차 청사와 광복군 본부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보금자리이자 겨레의 등불이었다. 이곳에서 일제 패망과 조국 광복의 감격을 맞이했지만, 오늘날 그 기쁨을 함께 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족 동포인 이선자(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진열관 부관장은 "2000년 인천과 충칭 간 직항편이 개통되면서 한때 관람객이 늘어났지만 최근 2~3년 사이에는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다"고 말했다. 그는 "롄화츠 청사를 찾는 사람은 95% 이상이 한국인들인데 관람객이 너무 없어서 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전했다.

"하루에 1명도 오지 않는 날이 적지 않다"는 이 부관장의 토로는 청사 보존의 어려움을 넘어 독립투사들의 혼을 배우는 현장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중국 내륙에 사장되다시피 방치된 우리 역사 유적에 더욱 많은 관심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여행Tip1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충칭시 위중구(渝中區) 치싱강 롄화츠 38호에 있다. 청사의 개방시간은 9:00~17:30이다. 입장료는 무료다. 최근에는 청사를 찾는 관람객이 적어 한국어를 구사하는 가이드는 없다.

청사는 도심에 있어 찾아가기 아주 쉽다. 도보로 치싱강 방향으로 10여분 걸어가면 도로변에 청사를 소개하는 표지판이 서있다. 단체 예약을 위한 전화번호는 (023)6382-0753이다.

우스예샹 청사는 허핑루(和平路) 5호에 있다. 롄화츠 청사를 구경한 뒤 퉁위안먼(通遠門) 바로 아래 있는 터널을 지나 아래 방향의 길로 200여m 걸어가면 된다. 골목길 안에 있기 때문에 표지석이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광복군 본부는 중심가인 제팡베이(解放碑)에서 서쪽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건물 앞에 웨이위안이라는 음식점 간판이 있어 찾기 쉽다. 식당 내에서 식사하고 지배인에게 정중히 요청하면 건물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다.

퉁위안먼은 명나라 때 건설된 충칭성에서 유일하게 남은 성문과 성벽이다.
 퉁위안먼은 명나라 때 건설된 충칭성에서 유일하게 남은 성문과 성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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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을 묘사한 청동상으로 여행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공성전을 묘사한 청동상으로 여행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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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Tip2

롄화츠 청사에서 우스예샹 청사를 가는 도중에 있는 옛 충칭성의 일부인 퉁위안먼과 성벽이 있다. 본래 충칭은 17개의 문을 지닌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371년 명나라 홍무제가 건설한 충칭성은 청나라 초기 중수를 거쳐 600여 년간 세월의 풍상을 지켜왔었다.

충칭성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충칭이 서구 열강에 개항되면서부터다. 도시가 커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성벽 해체가 이뤄졌다. 해체된 성벽 돌은 대부분 건축 자재로 재사용됐다.

오늘날 사라진 충칭성에서 유일하게 성문과 성벽이 모두 남아있는 곳이 퉁위안먼이다. 뒤늦게 충칭성의 역사적 가치를 깨달은 충칭시 정부는 2005년 퉁위안먼 일대를 새롭게 단장했다. 성벽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었고, 일대 유실된 성벽을 재보수했다. 퉁위안먼에는 공성전을 묘사한 청동상도 설치하여 여행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임시정부, #광복군, #임정, #충칭, #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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