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나무로 만든 얇은 발로 종이 섬유를 건져내는 진화촌의 한 제지 장인.
 대나무로 만든 얇은 발로 종이 섬유를 건져내는 진화촌의 한 제지 장인.
ⓒ 모종혁

관련사진보기


"마을 주민들 중 절반 이상이 종이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제지업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업이자,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요." - 장젠홍 진화(金華)촌 부촌장

중국 내륙 서남부에 자리 잡은 쓰촨(四川)성 자장(夾江)현. 자장은 자연이 수려하고 물이 풍부하기로 이름 높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가 많지 않아 주민 수는 많지 않지만,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딱 알맞은 자연조건을 지녔다.

쓰촨성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명승지가 무수히 많다. 그 때문에 자장은 쓰촨 내에서는 지명도가 높지 않다. 하지만 '서화지(書畵紙)의 고향'이라는 명성은 예부터 중국에서 으뜸이다.

자장에서 종이를 만든 것은 당나라 초기인 7세기부터다. 송나라와 원나라를 거쳐 점차 발전한 자장의 제지기술은 명청시대에 꽃을 활짝 피웠다.

청나라 강희제 때 자장에서 생산된 종이는 황실에 진상되는 공지(貢紙)로 지정됐다. 과거 시험의 공식 종이로도 널리 사용되면서, 생산량은 중국 전체의 30%를 넘어섰다.

1940년대 중일전쟁 시기 자장은 중국 최대 종이 생산지로 생산량, 종류, 품질 등 모든 면에서 으뜸을 차지했다. 당시 자장의 제지 공방은 5000여 개에 달했고, 관련 종사자는 8만 명을 넘어섰다. 한 해 생산량도 8만 톤 이상이었다.

오늘날 첨단 자동화 생산시설을 자랑하는 연해지방의 제지기업에 뒤처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지만, 제지업은 여전히 자장을 대표하는 중요한 산업 중 하나다.

자장현의 한 종이상점에서 파는 다양한 서화지. 자장은 중국 내에서 서화지의 고향이라 불릴 만큼 품질 좋은 종이를 생산하고 있다.
 자장현의 한 종이상점에서 파는 다양한 서화지. 자장은 중국 내에서 서화지의 고향이라 불릴 만큼 품질 좋은 종이를 생산하고 있다.
ⓒ 모종혁

관련사진보기


청 황실에서도 사용했던 1400년 역사의 수공 죽지

자장현청에서 서북쪽으로 10㎞ 떨어진 마춘(馬村)향 진화촌과 스옌(石堰)촌은 지금도 종이 제조를 주업으로 하여 살아가는 대표적인 마을이다.

두 마을에서 생산되는 종이는 자장 내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독특하다. 종이를 펼쳐보면 비단처럼 매끄럽고 부드럽다. 지질은 유난히 희고 유연하며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수묵성이 뛰어나다. 기계로 만든 종이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이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한 장 한 장의 종이가 모두 사람의 손길로 72차례의 작업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수공지(手工紙)이기 때문이다.

진화촌과 스옌촌에서는 지역 특산물인 대나무를 원료로 사용한다. 자장에는 백협죽(白夾竹)과 수죽(水竹)이 많은데, 섬유조직이 발달하여 종이의 원료로는 제격이다. 양잔야오 진화촌 촌장은 "마촌향 일대의 토질은 습하고 영양분이 많아서 어린 대나무의 섬유질이 사탕수수만큼 곱고 가늘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먼저 마을 주변에 널려 있는 대나무를 잘라 물에 담가 6일 정도 불려 놓는다. 다음 작업으로 섬유성분이 부드럽게 된 대나무를 잿물과 석회수에 담가 삶아낸 뒤 두드린다.

잿물과 석회수는 알칼리성이라 종이 성분의 산화를 방지하고 색의 변질을 막아주며 강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삶고 두드리는 과정에서 대나무 속의 불순물은 제거되고 질 좋은 종이 원료로 변한다.

대나무 발로 건져낸 종이 섬유.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는 상태다.
 대나무 발로 건져낸 종이 섬유.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는 상태다.
ⓒ 모종혁

관련사진보기


한 달 반의 기간에 72차례의 작업 과정을 거쳐 만들어져

삶아낸 대나무는 식기 전에 수조에 넣는다. 석회와 찌꺼기를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서다. 삶아서 처리한 원료에는 분산되지 않는 섬유가 남아 있다. 고운 입자의 종이를 얻기 위해 섬유를 짧게 끊어내고 강도를 높인다.

대나무가 완전히 분해되면 솜 모양의 펄프 상태가 된다. 대나무로 만든 얇은 발로 여기에서 섬유를 건져낸다. 발에 있는 섬유를 떼어내면 이때서야 물기를 머금은 종이가 나온다.

그 뒤 반나절 정도 시간을 들여 물기를 빼내고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분리한다. 종이는 바람이 잘 통하고 그늘진 벽에 붙여 말린다. 다 마른 종이는 대략 2m 40cm가 되는데, 100장을 한데 모아 반원형 모양의 칼로 한 번에 자른다.

이처럼 자장에서 생산되는 한 장의 전통 죽지(竹紙)는 한 달 반 이상의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다.

장젠홍 진화촌 부촌장은 "모든 과정에서 일일이 사람의 손길로 정성 들여 만들어지기에 완성된 종이는 천년을 견뎌낸다"며 "무엇보다 품질이 뛰어나 오늘날에도 중국 최고의 서화용지로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 자장 죽지는 중국 서화지 소비량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스옌촌 장인인 스야오중은 "지역의 토양과 대나무 뿐만 아니라 물도 중요하게 작용한다"면서 "전 작업 과정에서 산에서 흘러내리는 자연수를 사용하기에 최고 품질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물기가 빠진 종이를 한 장 한 장 분리해 내는 여인. 이렇게 분리된 종이는 그늘진 곳에서 최종 건조작업을 거친다.
 물기가 빠진 종이를 한 장 한 장 분리해 내는 여인. 이렇게 분리된 종이는 그늘진 곳에서 최종 건조작업을 거친다.
ⓒ 모종혁

관련사진보기


생산농은 줄고 행정제재는 늘어... "이대로라면 10~20년 후엔 존재하지 않을 것"

장인의 손길을 거친 자장 죽지의 명성은 드높지만, 앞날은 불투명하다. 전통 수공 죽지의 명맥을 이어가려는 젊은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장젠홍 부촌장은 "20년 전만 하더라도 진화촌 사람은 모두 제지 장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면서 "지금은 마을 주민의 40% 정도만 제지업에 종사하고 연령층도 40대 중반 이상의 중노년층"이라고 밝혔다.

과거 전통 죽지 생산에 종사했다가 전업한 리셴옌이 토로한 현실은 더욱 날카로웠다. 리는 "한 달 반 동안 72회의 과정을 거쳐 생산된 100장의 종이 가격이 불과 45위안(한화 약 7650원)"이라며 "힘들고 어려운 제조과정에 비해 판매가는 낮고 시장은 한정되어 있는데 누가 제지 장인으로 살아가려고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제조기간을 줄이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용되는 화학 용해액도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양잔야오 촌장은 "지난 1980년대부터 대나무를 불리거나 삶고 두드리는 과정을 단축하기 위해 용해액을 사용하는데 이게 심각한 수질오염을 야기했다"면서 "이를 인지한 정부 당국이 엄한 제재를 가하자 적지 않은 농가가 종이 생산을 단념했다"고 말했다.

주궈옌 자장수공지박물관 판매부장은 "지금도 마춘향 내 7개 마을에서는 7000여 명이 제지업에 종사하고 있다"면서도 "현재와 같이 생산농가를 위한 지원은 없고 단속만 지속된다면 10~20년 후 전통 수공 죽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완성된 종이는 규격에 맞추어 일도백장(一刀百張)으로 잘라낸다.
 완성된 종이는 규격에 맞추어 일도백장(一刀百張)으로 잘라낸다.
ⓒ 모종혁

관련사진보기



태그:#종이, #죽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