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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안국역에서 낙원상가 방면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운현궁의 맞은편에 고풍스런 서양식 건물이 하나 보인다. 바로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건물의 외형선을 살펴보면 아래에서 위로는 수직의 고딕방식을 취한 듯하고, 출입문이나 창문 등은 부드러운 아치형태 곡선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한 눈에 보아도 준수한 용모의 건물이다.

흐린 하늘 아래 성자의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
▲ 천도교 중앙대교당 흐린 하늘 아래 성자의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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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교당 마당에서 아이들이 포즈를 취했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중앙대교당 마당에서 아이들이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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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당의 외벽은 주로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렸고, 부분적으로 밝은 화강석을 이용하여 전체적인 건물의 이미지는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칙칙하고 허름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색과 흰색으로 건물의 입체면을 적절하게 안배하고 구성한 것이 예사로운 감각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감히 보여줄 수 없는 빼어난 수준이다.

강당의 지붕은 맞배지붕 형식으로 종탑의 바로크 형식 지붕과는 대조를 이루면서도 조화롭게 어울리는 품격을 갖췄다. 특별히 장식적인 요소를 부각시킨 것도 없고, 특별히 화려하게 꾸미려 한 의도도 엿보이진 않지만, 좌우대칭으로 양팔을 벌린 것처럼 창을 배치하고 균형을 맞춘 안정감은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힘들고 고단한 사람들이여, 모두 내게로 오라!" 하는 성스러운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듯하다.

정문 안으로 들어가 흐린 하늘 아래 서있는 한울님 예배당을 바라보니 그 자체로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지나치게 엄숙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경박스럽게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 소박하고 경건한 차림새로 서있는 중앙대교당의 용모는 은근하게 중독성이 있어 좀처럼 쉽게 눈을 떼기가 어려워 보였다. 때문에 나는 중앙대교당 앞마당에 걸음을 잡힌 채 기단에서부터 지붕을 거쳐 첨탑, 하늘로 이어지는 숭고한 상승을 감상할 수 있었다.

'천도교'는 1860년 최제우 선생이 창시한 동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에 의하여 1905년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천도교의 중심 사상은 '인내천' 사상이다. 인내천 사상이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의미가 함축된 것으로 그 핵심은 인간에 대한 평등주의적 세계관이다. 즉 사람을 차별 없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말하고 가르치는 원초적인 인간 사랑의 종교가 인내천이다.

이것은 특별히 다른 종교에 비해 신비롭지도 않고, 평범하다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평범성 속에 품어진 보편성은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인 천도교가 가진 위대한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처럼 지극히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대중성을 가진 천도교가 오늘날 '왜? 어떤 까닭으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전폭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스스로의 의문을 접하며 헛갈림을 느꼈다.

온통 붉은 고추잠자리가 도시의 밤하늘을 모조리 장악한 채 무수히 떠있는 모습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 서울을 봉헌하고픈 소망을 가진 독실한 장로님이 대통령인 나라 대한민국. 지금의 천도교 중앙대교당보다 적어도 몇 배는 크고 거대하며 권위적인 예배당의 건물들이 종교권력의 광기를 번득이며 군웅할거하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 나는 돈과 권력, 종교의 맹신성이 치밀하게 결탁하여 궁핍한 삶에 지친 백성들의 혼탁한 영혼을 교묘히 지배하는 이 나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운명에 대해 생각하며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사람들의 영혼을 평화롭도록 위로하고, 모든 존재가 서로 존중하며 아름답게 공생하는 길을 제시하는 종교의 참된 의미가 망가뜨려진 오늘의 무거운 십자가를 생각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정문 밖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탑 천도교 중앙대교당 정문 밖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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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대교당 정문 오른쪽에 있다.
▲ 독립선언문 배부 터 천도교 중앙대교당 정문 오른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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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대교당 건물은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중의 한 사람이었던 손병희 선생에 의해 건립이 추진되었다고 하며, 300만 천도교도들의 성금을 모아 일제시대인 1921년 2월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곳은 천도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 이외에도 일제식민지 시절 항일운동의 거점이었으며, 소파 방정환 선생이 중심이 되어 펼친 어린이 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으로 정문의 오른쪽에는 당시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3 • 1독립선언문 배부터 표지석이 있고, 왼쪽으로는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 탑'이 세워져 있다.

'가만, 아하,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이 곳은 바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 구체적으로 발현된 실천적 종교의 표본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것이었구나.'

나는 도로변 길가에 선 채 회색빛 하늘아래 고요한 성자의 모습으로 서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한 동안  바라보다가 한 줄기 실바람처럼 스쳐 다가온 인식의 각성을 실감했다. 그러한 실감을 소득으로 얻은 나는 비로소 발길을 옮겨 몇 발치 아래 오른쪽으로 난 인사동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사동 쌈지길 건물 안의 벤치에 앉히고서 추억을 남겨 주었다.
▲ 쌈지길 건물 안의 벤치 인사동 쌈지길 건물 안의 벤치에 앉히고서 추억을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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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앞에 선아이들
▲ 인사갤러리 앞 갤러리 앞에 선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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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으로 접어들자 고미술품 상점과 화랑이 즐비하고, 표구사와 기념품가게, 음식점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서울 도심 속에 이렇게 멋스럽고 낭만적이며,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전통미와 현대적인 생활디자인이 조화를 이루어 공존하는 퓨전의 문화적 공간이 살아있다니 다행스러웠다. 나는 내게 아무것도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 골목 안 미술품 가게와 화랑들의 그냥 그 모습을 감상했다. 유리창 너머 쇼윈도에 진열된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물건들과 작품들을 공짜로 실컷 눈요기했다. 나는 그렇게 매력적인 정취가 충만한 골목을 일부러 천천히 여유롭게 걸었다.

골목에서 더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경인미술관'이 있었다. 이 곳은 가끔 인사동에 들를 적에 언제나 빼먹지 않고 찾아오게 되는 나만의 자기중심적인 특별한 공간이다. 몇 개로 나눠진 여러 개의 전시실에 들러 그림도 구경하고, 조각품도 감상하고, 간혹 작가들과 만나 털털한 담소를 나누기도 하며 행복한 문화적 영양소를 듬뿍 공급받는 충전소이다. 미술관 한 가운데 정원의 벤치에 앉아 예술에 대해, 삶에 대해 한껏 폼을 재며 누리는 나만의 명상은 고급스럽지만 사치스럽지는 않다. 게다가 여름이면 시원한 솔잎 냉효소차, 겨울이면 따뜻한 모과차나 대추차, 가을이면 향기가 진한 국화차 한 잔으로 마음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소담스런 분위기가 멋들어진 미술관 입구
▲ 경인미술관 소담스런 분위기가 멋들어진 미술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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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전시실 마루에 앉아 있다.
▲ 경인미술관 전시실에서 아이들이 전시실 마루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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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인미술관은 구한말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흔적이 선명하게 존재하는 역사적 공간이다. 이 곳은 급진 개화파로서 '갑신정변' 3일 천하의 주역이었던 박영효가 살았던 집이다.  그는 1936년부터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동아일보사 사장을 거쳐 1907년 이완용 내각 궁내부 대신을 역임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 소생의 딸인 영혜옹주의 남편이기도 했던 박영효.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 전개된 정치적 격변기의 행위와 처신에 관한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서 '박영효'라는 사람은 분명 역사적인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에 의해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가 최초로 그려져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1882년 외교사절 신분으로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만들어 걸었다고 전해지는 태극기의 제작에 관련한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참 아이러니한 생각이 든다.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 앞에 무능하고 비굴한 신하에 의해 우리나라의 얼굴이자 표상인 태극기가 그려지고 만들어졌다니...

경인미술관 안에는 아직 소담스런 정원과 한옥이 남아있다. 하지만 원래 있던 박영효의 한옥은 1983년 이 곳이 미술관으로 재건되면서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현재의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져 있다고 한다. 서울의 8대가 중 하나로 전해지던 집이라니 대갓집으로서의 그 규모나 고급스러움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법하다.

경인미술관 정원에서 즐거운 아이들
▲ 미술관 안의 정원 경인미술관 정원에서 즐거운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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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인미술관을 나와 '수도약국'과 '동양다예' 상점이 있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걸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고풍스런 물건과 길거리 장사꾼들의 특이한 퍼포먼스 같은 즐거운 행위를 재미나게 구경했다. 그러면서 인사동 남측 진입로 입구에 자리한 남인사 놀이마당을 지나고 건널목을 건너니 탑골공원이었다.

탑골공원은 인사동(仁寺洞)이란 이름의 유래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인사동 동네는 조선시대에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던 곳으로 '큰 절골' 즉 한자로는 대사동(大寺洞)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종로구 일대의 옛 이름을 '관인방(寬仁坊)'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제시대 일본이 우리나라를 자기들 멋대로 편리하게 지배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관인방의 '인'자를 따고, 대사동의 '사'자를 따서 인사동으로 지었다고 하니 그들의 조잡한 행태가 우습기도 하다. 하여튼 인사동은 조선시대 도성 안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였던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 그러므로 지금의 인사동이란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근원을 제공하는 것은 다름 아닌 탑골공원인 것이다. 따라서 탑골공원 안에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대원각사비 등이 그 역사와 유래를 증거 하기 위해 오롯이 남아있다.

탑골공원의 정문이다.
▲ 삼일문 탑골공원의 정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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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이 새겨진 기념탑
▲ 3. 1운동 기념탑 독립선언문이 새겨진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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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천도교의 3대 교주이다.
▲ 손병희 선생 동상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천도교의 3대 교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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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당시의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표현해 놓았다.
▲ 3.1운동 부조 3.1 운동 당시의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표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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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펼쳐져 서있는 3 • 1운동 기념탑을 볼 수 있었다. 독립선언서가 새겨진 기념탑 아래에는 몇몇의 노인들이 선언문의 글귀를 읽어보거나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 모습이었다. 3 • 1만세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이 곳에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었던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굳세고 강건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팔각정도 있었다. 그 밖에 1966년에 제작한 3 • 1운동 부조가 당시 그날의 생생한 현장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한 채 공원 동쪽의 외곽을 빙 둘러 있었다.  

탑골공원은 영국인 외교관 브라운의 건의에 의해 1895년 경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처음 공원의 이름은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던 자리인 까닭으로 탑골공원이었다가, 탑의 인도식 불교용어가 파고다인 이유로 파고다공원으로 바뀌었고, 다시 1992년 옛 지명을 따서 탑골공원으로 되돌려졌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탑골공원 안을 천천히 걸으며 그 이름의 유래로부터 전해져 온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이것저것 차분히 살펴볼 수 있었다.  

비바람의 풍화에 의한 훼손을 방지하고자 궁여지책으로 유리 보호막을 덮어 놓았다.
▲ 원각사지 10층 석탑 비바람의 풍화에 의한 훼손을 방지하고자 궁여지책으로 유리 보호막을 덮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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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팔각정 뒤편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었다. 그러나 불쌍하게 있었다. 거대한 유리온실이나 현대식 빌딩처럼 생긴 곳에 갇혀있는 듯 옴짝달싹 못하게 보이는 모습이 거북하기까지 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탓에 비바람에 풍화되고 산화되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궁여지책이라고 한다. 문화유산의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한다지만 그래도 아쉽기 그지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음은 어쩔 수 없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국립중앙박물관 안에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계승한 동생뻘의 탑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대리석 탑으로 기단부터 탑신부까지 온갖 동식물과 인물상이 빈틈없이 조각된 현란한 조각기술과 비례의 조화가 일품인 용모를 가진 탑이다.

몸돌에는 가장 넓은 면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보살, 비천 등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거의 모방한 모습으로 기왓골이나 마루, 추녀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기발한 의장과 다채롭고 화려한 무늬의 구성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탑의 진수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걸작이었다.
보호막에 갇힌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사람
▲ 기도 보호막에 갇힌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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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유리막 안에 갇혀 보호되고 있는 신세이나 그 아름다운 품위나 화려한 격조의 미모는 조선시대는 물론 우리나라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석탑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빼어난 모습이었다. 나는 첫눈에 반하고야 말았던, 늘씬하면서도 균형미가 특출하며, 회백색의 얼굴빛을 가진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이미지를 가슴에 꼬옥 안고서 도심 속 역사박물관이라 할 인사동 도보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25일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도보 답사 코스 : 천도교 중앙대교당 - 경인미술관 - 탑골공원



태그:#인사동, #경인미술관, #탑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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