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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인명사전 예산 전액 삭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2003년 12월에 터진 끔찍스런 사건 말이다. 16대 국회의원들이 친일 인명사전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는 것이다. 당시 별 생각없이 TV 뉴스를 보던 난 난데없이 터진 황당 뉴스에 할말을 잃고 말았다.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니, 나라가 거꾸로 가나? 어떻게 친일 인명 사전 예산을 삭감할 수 있지? 제정신인가?'

잘못된 과거조차 반성치 못하는 권력에 대한 실망이 컸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였던 난 이에 대한 비판 기사를 100번이라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사를 쓴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21살 기자 지망생이었던 난 잘못된 현실 앞에서 지레 겁먹고 안된다는 패배주의에 물들어 버렸던 모양이다.

끔찍했던 <친일인명사전> 예산 삭감, 만약 오마이뉴스가 없었더라면?

가슴 벅찼던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의 시작, 지켜보던 나는 마음이 울컥 했다.
 가슴 벅찼던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의 시작, 지켜보던 나는 마음이 울컥 했다.
ⓒ 오마이뉴스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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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무나 절망적이던 그 순간, 여느 영화의 멋진 주인공처럼 <오마이뉴스>가 나섰다. 2004년 1월의 일이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친일인명사전> 발간 비용을 모으는 캠페인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한 누리꾼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국민 모금 운동을 보자 차갑게 식어 버렸던 내 가슴 속 열정도 다시 두근두근 뛰었다. 광복절까지 국민 모금으로 5억원을 모으겠다는 계획. 정말 굉장했다.

'그런데, 정말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약간의 의아함도 들었지만 울컥하는 감동을 막을 길이 없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울컥한 모양이다. 국회의 처사에 분개했던 국민들의 성원이 들불처럼 번져나갔으니 말이다. 그래서 광복절 이전까지 5억원을 모으겠다던 당초 계획은 모금 하루 만에 1800명의 참여, 5천만원 모금액을 돌파한 기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부탁, 2004/01/09 오후 8:30:31
오마이뉴스는 이 내용을 삼일절까지 톱으로 걸고 삼일절날 모두 함께 결산을 보는 기사를 걸도록 해주세요, 끝까지 지켜볼거구요...혹시 기사쪽의 톱이 불가능하다면 광고로라도 잘보이는 곳에 걸어주시죠...올 겨울이 왜 이상스레 따뜻하나 했더니 이렇게 우리 동포들의 가슴에 뜨거운 열정이 숨어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未覺(ojssjy), 2004/01/09 오후 2:41:44
차떼기당이 박살나고 있지않나, 접때는 김구 암살 진상조사를 위한 모금이 있더니만, 이번 에는 친일청산 모금이라....아무렴 내야지요. 미력하나마 내야지요. 오마이뉴스 감사하오. 네티즌님들 감사하오. 내가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그때 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잘못된 역사를 고치려고 하는 개개인의 열망이 이렇게 대단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뜨거운 목소리는 내 마음을 전율시켰고 덕분에 나의 패배주의와 회의주의는 조금씩 깨지고 있었다.

당시 국민들의 목소리는 하나하나가 가슴 벅찼다. 기름때 묻는 노동자에서부터 친일했던 조상의 과오를 반성한다는 사람까지 저마다의 사연은 심금을 울렸다. 이건 정말 기적이야, 라고 생각했다.

내 젊은 날, 가슴 찡한 기사로 기억될 <압록강 행진곡> 기사

압록강행진곡 가사
 압록강행진곡 가사
ⓒ 독립기념관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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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발간을 향한 국민들의 꿈은 한 여름 꿈처럼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나흘만에 1억원 모금액을 넘어서는 결과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염원을 담은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가 쌓여 큰 바위를 뚫고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5억원도 요원한 꿈이 아니었다.

국민들의 뜨거운 염원을 지켜보면서 내게도 작은 소망이 하나 생겼다. 나도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정말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실력 없는 대학생 기자 주제에 <친일인명사전>에 관련된 기사를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관련 기사를 쓰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러던 하루였다. 유명 인터넷 사이트에 들렀다가 우연히 한 누리꾼이 올린 친일 인명 사전 발간에 동참하자는 글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게시글에서 흘러나오던 배경음악이 귓가를 맴돌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독립 군가였다. 눈물이 왈칵 났다. 얼마나 마음이 찡했는지 모르겠다. 2004년 1월 14일 오후에 찾아온 운명적인(?) 독립군가였다.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 처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우리는 한국 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박영만 작사, 한유한 작곡>

게시글 밑에는 이 게시글 속 배경음악이 뭐냐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나도 궁금한 마음에 알아보니 이 독립군가의 이름은 <압록강행진곡>이었다. 독립군가가 생소했던 20대에게, <압록강행진곡>의 강건한 음율과 가사는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시글에는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가 함께 있는 사진이 있었고 '독립군진공작전, 팔도 독립군은 거병하라'는 구절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 계좌번호가 씌여져 있었다. 나는 이 <압록강행진곡> 관련 내용을 얼른 기사로 옮겨 썼다. 2004년 1월 14일 오후, <"친일사전 편찬은 독립군 진공작전">이라는 기사제목을 달고, 압록강 행진곡 군가 파일(배경음)을 기사에 넣어서 오마이뉴스에 송고를 했다.

[관련기사] "친일사전 편찬은 독립군 진공작전" (2004년 1월 15일자)

그리고 잠시 후, 기사가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반응이 뜨거웠다. 당시 <친일인명사전> 성금 모금 열기와 맞물려서 기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던 것이다. 기사 조회수는 6만9천에 달했고 댓글은 250여개나 달렸다. 조금 더 놀라운 사실은 <압록강 행진곡> 군가가 주요 방송 뉴스와 뉴스툰 플래시에도 인용되어 세상에 전파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일 뒤, 모금을 시작한 지 11일 만인, 2004년 1월 19일 새벽 3시, 드디어 <친일인명사전> 모금 5억 돌파가 이루어졌다. 국민의 염원이 한데 뭉쳐 기적을 결국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친일인명사전 모금 5억달성 기념 '오프라인 모임'이 울려퍼졌던 <압록강 행진곡>의 그 감동을. 그즈음 시기와 맞물려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수록된 <압록강 행진곡>을.

돌이켜보면 기사를 쓰고 나서 그때처럼 기분이 뿌듯했던 적은 별로 없던 것 같다. 올바른 역사를 만드는 데 티끌만큼이라도 동참했다는 일종의 참여의식 때문인 것 같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우리 조상의 독립군가를 전파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그리고 그 독립군가가 <친일인명사전> 발간 비용을 모금하는 데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렇기에 <압록강 행진곡>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남게 되었다.

암울한 세상, 과거에서 용기를 얻다

<친일인명사전> 모금액 5억원이 달성되었을때,  박도 선생님과 권중희 선생님이 들고 계시던 가슴 벅찬 저 휘호. '민족혼은 살아있다'
 <친일인명사전> 모금액 5억원이 달성되었을때, 박도 선생님과 권중희 선생님이 들고 계시던 가슴 벅찬 저 휘호. '민족혼은 살아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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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친일인명사전> 모금 캠페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캠페인은 내 자신에게도 용기를 갖게 만들어줬다. 현실의 높은 벽에 주눅들어 기사쓰기를 머뭇거렸던 기자 지망생에게 '부단히 기사를 써라, 그러면 세상은 티끌만큼이라도 바뀔 것이다'라는 진리를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문득 추억에서 벗어나 현실을 보니 2009년, 27살이 된 내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내 어리버리함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래도 <친일인명사전> 모금 캠페인 이후 나는 꽤 용감해진 것 같다. 적어도 취재를 할 때는 두려움 없이 덤벼들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열정이 생기자 꿈 같은 일도 많이 일어났다. 일일히 나열할 수 없는 많은 일들.

그래도 무엇보다 가슴 뿌듯한 일은 <오마이뉴스>에 현재까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티끌만큼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회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400여편 정도의 기사를 세상에 내밀 수 있었다는 것, 분명 오마이뉴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돌이켜보면 기사를 쓸 여건을 만들어준 것은 고마운 일인데 제대로 고맙다는 표현도 못했던 것 같다. 글쓰는 사람의 꼬장꼬장한 자존심 정도랄까.

고마움을 뒤로 하고 다시금 현실을 본다. 이전보다 오늘의 세상은 많이 나아졌는가?라는 물음을 불쑥 던진다.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작금의 현실은 희망이라곤 쉽게 찾을 수 없는 암울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철거민들이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하고, 무자비한 연쇄 살인이 자행되는 사회, 하지만 그 사회의 권력은 연쇄살인을 홍보지침으로으로나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안타깝게도 정의가 힘을 잃고 수많은 음모가 횡행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한 명의 글쟁이로서 힘이 빠지는 세상,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으련다. 우리에겐 기적을 만들어낸 과거가 있으니깐, 불의에 맞서서 희망을 만들어낸 역사가 있으니까 말이다. 오마이뉴스와의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을 추억하며 나즈막하게 <압록강 행진곡>을 불러본다. 가슴 한쪽에선 다시금 용기가 생긴다. 불의의 세상에 맞설 뜨거운 용기가….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때문에 생긴 일> 응모글입니다



태그:#압록강행진곡, #친일인명사전모금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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