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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지기와 아기는 먼저 일산 처가에 가 있습니다. 저는 성당에 가져다줄 사진이 있고, 고양이밥을 주어야 하며, 집안 물이 얼지 않도록 이틀에 한 번은 오가야 하기에 잠깐 인천집으로 돌아와 집치우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일을 마치고 집을 나설 무렵, 설을 하루 앞둔 날인데 도서관에 찾아온 분들이 있습니다. 애써 찾아오셨기에 도서관 문을 땁니다. 도서관 손님들은 신나게 사진을 찍다가는 《인간가족》이라는 사진책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한테는 ‘사진과평론사’에서 낸 해적판과 1957년에 나온 첫판(영어로 된)이 모두 있어서, 두 권을 찾아내어 건네줍니다. “어디 있는지 다 알아요?” 하고 물으시기에, “제가 사서 읽으며 간직한 책이니까요.” 하고 말씀해 줍니다.

 

사진찍기를 좋아하시는구나 싶어서, 1929년에 일본에서 찍은 《세계사진연감》이며, 기무라 이헤이가 낸 《街角》이며 보여줍니다. 1949년에 덴마크사람이 낸 《아름다운 덴마크》도 보여줍니다. “덴마크를 찍은 이이는 세계사진사에 이름을 못 올리는 분이에요.” 하니까 놀랍니다.

 

그러나, 참말 그렇습니다. 이 아름다운 덴마크 흑백 사진책을 사람들한테 보여줄 때마다 한결같이 ‘대단히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며 놀랍니다만, 덴마크 삶터를 사진으로 보여준 이이는 ‘알아보는 몇몇 사람’한테만 남겨지고 생각되고 읽힐 뿐입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을 알아도 ‘조셉 브라이텐바흐’를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강운구’를 알아도 ‘이해선’을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나마 ‘주명덕’이나 ‘김기찬’쯤은 알지라도 ‘안승일’이나 ‘양해남’ 같은 이름은 얼마나 알는지 궁금합니다.

 

작품모음을 펴내어도 제대로 알려지기 어려우나, 작품모음을 내지 않는 가운데 꾸준히 자기 길을 걷는 사진쟁이는, ‘세계사진사’뿐 아니라 ‘한국사진사’나 ‘인천사진사(또는 서울사진사 또는 대전사진사 또는 춘천사진사 따위 모두)’에는 이름 석 자 걸치지 못해요.

 

 

전철을 타고 일산으로 옵니다. 대화역에 내려 한참 버스를 기다리는데, 낯선 외국사람이 영어로 “아 유 포토그래퍼?” 하고 묻습니다. “예스.” 하고 대꾸하니, “굿!”이라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이 추운 날에도 사진기를 어깨에 걸쳐메고 있는 모습이 남다르게 보여졌을까요. 춥든 덥든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한편, 짐이 많건 적건 아기를 안건 업건 사진기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매무새는 사진찍는 이한테는 밑바탕이라고 느낍니다. 그다지 ‘굿’일 모습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고개를 숙여 “땡큐.” 하고 대꾸하면서 싱긋 웃어 줍니다.

 

옆지기 어머님은 설을 앞두고 여러 날 동안 먹을거리 마련에 바쁩니다. 설날 아침에도 새벽 다섯 시부터 일어나서 일합니다. 음성에 있는 우리 어머니도 이무렵 졸린 눈을 비비고 홀로 일어나 차례상을 마련하고 있으셨을 테지요.

 

차례를 마치고 절하기를 끝낸 다음, 처가 식구들 사진을 찍습니다. 째깍이를 돌려서 저도 함께 한 장 더 찍습니다. 처가 식구들은 예전처럼 많이 모이지 못하는데, 그렇더라도 이처럼 한 자리에서 떡국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대목으로도 서로서로 반갑습니다. 저희 식구들도, 음성에 계신 어버이와 다른 피붙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 부모님 댁에 모이는 다른 피붙이는 그리 안 많습니다. 작은아버지나 고모나 이모나 외삼촌이나 사촌동생을 본 지 퍽 오래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적에 다 함께 사진을 찍은 일이 없었다고 느낍니다. 제가 한창 사진을 배워서 찍던 때에도 “사진 찍자!”고 팔짱 끼고 붙잡아 이끌어도 함께 찍지 않았습니다. 중고등학생인 사촌동생들은 ‘쪽 팔려’서 싫다고 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습니다. 어른들은 아마 그날 온 피붙이가 모이지 않았으니 반쪽짜리 사진이 되겠구나 싶어 내키지 않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쪽짜리 사진이 되든 1/3짜리 사진이 되든 1/4짜리 사진이 되든 뜻이 있다고 느낍니다. 모두 모인 사진은 모두 모여서 뜻이 있으며 반갑습니다. 몇몇이 모였을 때에는 몇몇이 모인 대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아무도 안 모였다면, 우리는 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다른 피붙이한테 탈이 있어서 못 모일 수 있는 한편, 우리한테 탈이 있어서 모이기 싫을 수 있습니다. 지금 삶은 지금 그대로 받아들이며 차분히 곰삭이고 되새기는 가운데, 다음 맞이할 명절은 새로워지기를 바라고, 새로워지도록 애쓰며, 새로워지게끔 비손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기한테 고모할머니 되는 분이 아기를 안거나 업을 때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옆지기가 그림책이나 만화책을 들고 아기한테 보이며 소리내어 읽을 때 사진 몇 장 찍습니다. 옆지기 사촌동생이 절할 때 사진 두어 장 찍습니다. 윷놀이 하다가 찍고, 감과 능금 깎을 때 찍습니다. 업힌 아기가 잠들 때 찍고, 처가 식구ㆍ친척이 둘러앉아 텔레비전 볼 때 찍습니다. 모든 모습이 사진감입니다.

 

모든 모습이 우리가 보내는 오늘 하루입니다. 모든 모습이 사진 한 장으로 담기며, 이다음 한가위나 설에, 또 이다음 한가위와 설에 새 이야기가 됩니다. 아기는 한 해 두 해 자라며, 자기가 떠올리지 못하는 어린 날을 돌아보거나 되새기는 밑거름으로 삼게 됩니다.

 

 

아기가 새근새근 자다가 쉬를 누고는 깹니다. 왼손으로 글을 쓰고 오른손으로 아기를 얼러 줍니다. 아기가 안아 달라 칭얼거려서 왼손으로 안고 오른손으로 사진기 들고 옆방으로 갑니다. 옆지기와 아이들이 셈틀놀이를 합니다. 사진 몇 장 찍는데 아기가 움직이다가 사진기하고 머리를 콩 박습니다. 에구구. 사진기 내리고 마루로 나와 아기를 토닥토닥하며 미안하다며 머리 쓰다듬습니다. 고모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와서 아기를 함께 어르니 이내 조용해지면서 활짝 웃습니다.

 

외할머니는 여러 날 고단함이 쌓인 탓에 푹신걸상에 드러누워 쉽니다. 두 어린 삼촌은 방에서 놀다가 마루로 나오는데, 눈은 텔레비전에 가 있습니다. 아기와 놀아 주는 사람은 거의 할머니들뿐입니다.

 

문득, 이런 삶을 글로 남겨주는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앞서 《내 어머니 이야기》라는 만화책이 나왔고, 이 만화책에는 ‘어머니ㆍ할머니ㆍ외할머니’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몇 권 없기는 하지만 소설이나 수필에 이와 같은 여느 삶 이야기가, 그러니까 어머니랑 할머니랑 외할머니 이야기가 더러 적혔다고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그림은? 사진은? 그림이나 사진에서 ‘어머니ㆍ할머니ㆍ외할머니’ 삶을 꾸밈없이 담아낸 적이 있었을까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해 보는데, 좀처럼 떠오르지 않습니다. 나라안이나 나라밖이나 글쎄? 글쎄? 하는 생각뿐.

 

 

늙어 쭈그렁 살결이 가득한 할머니 얼굴을 돋보이게 찍은 사진은 꽤 많습니다. 《석정리역의 어머니》 같은 사진책도 드문드문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 얼굴이나 겉모습이나 옷차림을 넘어서, 할머니 여느 삶이 오롯이 보여지도록 담은 사진책은 못 보았다고 떠오릅니다.

 

자기 식구나 자기 아이나 자기 둘레 사람한테 눈길을 뻗쳐, 자기 가까이에서 깊이 파고드는 사진은 일구지 못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래도 바깥에서만 사진감을 얻으려고 하는 우리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한테 있는 너른 사진감은 보지 못한 채, 우리한테 깃든 깊은 사진감은 느끼지 못한 채, 스스로 집없는 사람마냥 떠돌이로 사진질을 하는 우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깥사람이건 안사람이건, 오래도록 꾸준히 사귀며 마음을 열어야 사진이 나옵니다. 연예인 사진을 찍건 동네사람 사진을 찍건 다르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찍건 잘사는 이웃을 찍건 똑같습니다. 오랜 너나들이를 찍는다고 할 때에도 오래도록 꾸준히 사귀어 마음과 마음이 맞은 다음에야 사진기를 들 수 있습니다. 쉽게 들 수는 있어도 쉽게 담아낼 수 없는 사진이며, 함부로 들 수 있으나 알뜰히 담아낼 수 없는 사진입니다. 겉스침 만남으로는 겉스침 사진뿐이며, 속어울림 만남이어야 속어울림 사진입니다.

 

내 삶을 찍는다고 사진작품이 안 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식구를 찍는다고 사진예술이 못 될 일이 없습니다. 아예 딴 사람을 다루어야 ‘객관’이 살아날까요. 내 둘레 가까운 사람을 다룬다고 늘 ‘주관’에 치우치고 말까요.

 

누구를 찍느냐를 살필 때에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담아내느냐를 먼저 살피고, 늘 꼼꼼히 되짚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흔한 사진감을 다룬다고 흔한 사진에 머물지 않으니까요. 안 흔한 사진감을 파고든다고 안 흔한 사진으로 뻗어나가지 않으니까요. 흔한 내 눈길과 흔한 내 손놀림과 흔한 내 생각 때문에 흔한 사진이 나옵니다. 땀흘리는 내 눈길과 손놀림과 생각 때문에 땀이 배인 사진이 나옵니다. 사랑이 깃든 내 눈길과 손놀림과 생각이라면, 사랑이 듬뿍 담긴 사진이 이루어집니다.

 

그림을 그리며 내 마음과 눈에 가장 아름다이 여겨지는 모습을 담듯, 글을 쓰며 내 넋과 가슴에 가장 사랑스레 여겨지는 이야기를 담듯, 사진을 찍으며 내 눈길과 손길에 가장 애틋하게 여겨지는 삶자락을 담습니다.

 

붓질 한 번에 온마음 쏟고, 펜질 한 번에 온기운 쏟으며, 단추질 한 번에 온얼을 쏟습니다. 비록 김치 한 접이와 식은밥 한 그릇일지라도, 어버이가 아이한테 차려 주는 밥에는 온사랑이 담깁니다. 우리 둘레 삶자락을 담을 때에도 온사랑을 담기 마련이며, 온사랑을 담지 않은 사진은 아무리 멋스럽거나 예쁘장해 보여도 가슴팍을 울리지 못합니다. 눈물과 웃음을 선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부터 제 둘레 사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굳이 멀리 찾아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멀리 찾아나설 만한 돈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저는 늘 제 깜냥껏 제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옆지기, 피붙이, 아기, 동무, 헌책방 일꾼, 골목집 이웃, 자전거 즐김이, 책마을 일꾼 ……. 이러는 동안, 찍는 저와 찍히는 뭇 님들은 서로한테 한 걸음 다가서게 됩니다. 서로 마음속 깊이 이어지는 이야기 하나 구슬처럼 엮입니다.

 

 

사진기가 가전제품마냥 집집이 퍼졌을 뿐더러, 사람마다 한 대씩 갖추게 된(손전화기 때문에) 오늘날, ‘넘치는 사진물결’ 사이사이 ‘믿음과 사랑 담은’ ‘찍새 곁 고맙고 반가운 이’ 삶자락 사진을 기다립니다. 흔하게 찍는다고 하지만, 하나도 흔하지 않는 ‘식구들 사진’을 기다립니다. 널려 있다고 하나, 조금도 안 널려 있는 ‘동무들 사진’을 기다립니다. 중형이나 대형 사진기로만 담아낼 수 있는 삶자락 사진이 아닙니다. 공짜 손전화기 사진으로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는 삶자락 사진입니다.

 

겉멋 아닌 속멋 키우는 사진을 꿈꿉니다. 겉눈 아닌 속눈 보듬는 사진을 바랍니다. 겉차림 아닌 속차림으로 거듭나는 사진을 사랑합니다.

 

인천집으로 돌아가면, 처가 식구들 사진을 하나씩 만들어 놓고, 한 분 한 분 찾아뵈며 드릴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태그:#사진, #사진말, #사진찍기, #사진기,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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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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