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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겨울과 물

 

 이틀 집을 비운 사이 물이 얼어붙은 인천집에서 언 수도를 녹이느라 발버둥을 치다가 두 손을 듭니다. 날이 확 풀릴 때까지 기다릴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집 앞 지하상가 뒷간에서 볼일을 보고 물을 떠 와서 집 보일러에 부어 주기로 합니다. 물은 얼어도 보일러는 살았으니 나도 살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물을 못 만지며 살아야 하니 이모저모 고달프기 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쌀과 감자와 고구마를 씻을 수 없어 힘듭니다. 빨래도 못하지만, 빨래감은 일산으로 들고 가서 하면 그럭저럭 되지만, 인천집에 머물며 밥해 먹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뭐, 지난 겨울도 지지난 겨울도 지지지난 겨울도, 해마다 물이 어는 일을 똑같이 겪으면서도 잘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충주 산골짜기에 살 때에는 물이 얼어 두 달 남짓 샘가로 올라가 길어다 썼습니다. 서울에서 살 때에는 물이 얼면 일터에서 물을 받아 와 밥해 먹는 한편, 빨래감은 새벽 일찍 일터에서 빨래를 하곤 했던 일을 떠올립니다. 서울에서 지낼 때에는 새벽마다 볼일 보며 애먹었는데, 전철역은 여섯 시가 거의 되어서야 비로소 문을 열고, 밤 열두 시 무렵이면 문을 닫았어요. 집 둘레 열려진 공중화장실 찾느라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전철역 뒷간에서 손과 낯을 씻습니다. 모처럼 만지는 물이라 반갑습니다. 이 겨울을 나고 봄과 여름과 가을이 지나면 새로 맞이할 겨울철에는 어찌 될까 헤아리는데, 내 삶은 앞으로도 겨울마다 물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는 어떨까. 겨울마다 물이 어는 집에 사는 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찌 바라볼까. 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꾸리는 삶을 싫어할까. 자기는 어버이와는 다른 길을 걷겠다고 하려나. 물 쓰기 고단한 나날을 보내면서 우리 둘레 물 모자라 아파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줄까.

 

 생각에 잠기다가 책을 펼치고, 책을 펼치다가 꾸벅꾸벅 졸고, 다시 깨어나 기지개를 켠 다음 책을 좀더 읽으니 용산역입니다.

 

 

 (2) 헌책방 가는 길

 

 용산역에서 표를 끊고 밖으로 나옵니다. 용산역은 언제 와 보아도, 광장 쪽 나들목을 찾기 어렵습니다. 길알림판이 제대로 안 붙어 있기도 하고, 길그림도 보이지 않습니다. 헌책방 〈뿌리서점〉을 드나든 지 열일곱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도록 단골로 자주 드나들면서도 ‘고속철도역으로 새로 지은 뒤’부터는 몇 번씩 이리저리 헤매고 나서야 나들목을 겨우 찾습니다. 오늘날 건축업자나 건설기사들은 하나같이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일 텐데, 이들은 전철역이나 기차역을 왜 ‘사람들이 드나들 곳을 손쉽게 찾아보기 어렵도록’ 해 놓는가 궁금해지곤 합니다.

 

 용산역 광장 한복판에 촘촘이 선 나무 사이를 걷습니다. 바닥에 풀이 있는 나무가 아니라, 조그마한 통에 박아 놓은 나무들입니다. 이렇게 나무통을 세워 놓으면 ‘멀리서 내다 보기에 그럴듯하게 보일’는지 모릅니다만, 이 사이를 걷기란 나쁩니다. 마주오는 사람과 부딪히게 되고, 나란히 걷는 사람으로서는 둘이 함께 걷기에 좁습니다. 마지막으로, 용사의집 앞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이곳에 이마트 주차장으로 들어설 길을 뚫는 바람에, 예전에는 건널목 없이 느긋이 다니던 길이 꽤 번거로워집니다. 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 사람 나고 차 났으며 사람 다니기 좋자고 차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 아주 나쁜 우리네 길로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을 정육점 고기처럼 빨간 불빛으로 비추며 팔고 있는 골목이 건너다보이는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꺾습니다. 좁다랗고 길며 어두운 사잇길을 빠져나와 오른편, 여성단체협의회 건물 지하에 자리한 헌책방 〈뿌리서점〉 앞에 섭니다. 용산역이나 이마트 둘레, 또 빨간 등불 넘실거리는 골목까지 넘실대던 사람들은 바로 고 옆에 자리한 헌책방 둘레에서는 뜸해집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용산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몇 사람쯤 1975년부터 용산에서 터줏대감처럼 헌책방 살림을 꾸리는 곳이 있음을 알고 있을까 싶습니다. 헌책방이 있음을 안다고 딱히 훌륭할 일은 없을 테며, 헌책방이 있음을 모른다고 잘못되거나 안타까울 일은 없습니다. 다만, 헌책방을 모르고 헌책방에 깃든 책을 모르는 일은, 아침놀과 저녁놀이 얼마나 고운 빛인가를 모르는 일이면서, 밤하늘을 채우는 별빛과 달빛을 못 알아보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요즘 도시사람들이야 아침놀은커녕 저녁놀조차 바라보지 않을 뿐더러, 도시에서는 노을 구경을 할 생각조차 안 합니다. 밤이면 번쩍번쩍거리는 술집거리를 거닐며 놀 뿐, 하늘을 채우는 달과 별을 올려다보지 않습니다. 노을과 별이 없다고 아쉬울 일 없고, 노을빛과 별빛을 모른다고 대학졸업장을 못 따거나 일류회사 취직이 안 되는 일 또한 없습니다. 헌책방과 헌책을 모른다고 대입시험점수가 안 나올 일이 없고, 세상 소식과 지식에서 동떨어진다든지 1억짜리 연봉이 깎일 일 또한 없어요.

 

 

 (3) 새책방, 어린이책, 조선일보, 에이즈 사진

 

 오늘은 모처럼 날이 환할 때 〈뿌리서점〉에 닿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모질게 불어 날이 훨씬 춥습니다. 바깥에서 사진 몇 장 찍은 다음 안으로 들어갑니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 안쪽으로 들어서는데, 왼쪽과 오른쪽에 그동안 겹겹이 쌓였던 책탑이 보이지 않습니다. 헉. 무슨 일이지? 마침 〈뿌리서점〉 아저씨가 밑으로 내려오셨기에, “책을 다 치우셨나 봐요?” 하고 여쭙니다. “어, 허허허, 구조조정 해야지.” “이 책들 치우시느라 힘드셨겠어요.”

 

 몇 차를 치우셨을까 생각하다가는, 몇 차에 이르는 책을 나르느라 여러 날 동안 얼마나 등허리가 휘었을까 생각하다가는, 이 책들이 좋은 새 임자를 만나지 못하고 그예 파묻혀 버리겠구나 생각하다가는, 중국 연길시 조선족 도서관이 생각나고, 인표어린이도서관이 생각나고, 고향 인천에서 없애려는 시립도서관이 생각납니다.

 

 (나중에 보니 책은 한 권도 안 사고 나간) 젊은 두 사람이 꽤 큰 목소리로 이 책은 어떻고 저 책은 어떻고 하면서 떠듭니다. 뭐 하느라 저희끼리 저렇게 떠드는가 하고 슬며시 들여다보니, 일본 잡지 쌓아 놓은 데에서 잡지를 뒤적이면서 히히덕거립니다. ‘그래, 헌책방이라 모든 책이 골고루 있으니, 일본 잡지 뒤적이면서 떠들고 히히덕거리는 아이들도 찾아올 테지.’

 

 주절주절 떠들던 아이들이 나가고 나서, 그 아이들이 있던 자리 옆 종교책 꽂힌 책시렁을 둘러보다가 《블라디미르 막시모프/이종진 옮김-창조의 칠일》(분도출판사,1980)이라는 두툼한 소설책을 봅니다. 옛 소련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나 서방세계에서 소설쓰기를 이었다는 막시모프 님은 요즈음도 글쓰기를 할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날 옛 소련에서 쫓겨난 이들은 오늘날 러시아를 어떻게 돌아볼지, 자기들 머무는 서방세계나 미국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합니다.

 

 《이경훈-책은 만인의 것》(보성사,1984)이 보입니다. 다른 헌책방에서도 곧잘 보던 책이고, 예전에 한 번 사서 들춰본 일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줄거리가 무엇이었는지는 거의 생각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집어듭니다. 책이란 한 번 읽는다고 다 읽어낼 수 있지 않으니 다시 읽어도 좋을 테지, 하고 생각합니다. 책이란 읽는 나이와 때와 곳마다 새삼스럽게 새겨진다지, 하고 생각합니다.

 

.. 기다 즁이찌로오 씨는 요즈음 서점에 가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서점이 슈퍼마켓과 같다는 것이다. 만화, 무크, 문고와 같이 회전율 위주의 매장으로 점령되어 이런 책들은 자기 서재에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또 슈퍼마켓과 같다는 점은 어떤 서점이나 같은 책밖에 진열되어 있지 않다는 불만이다. 즉 슈퍼마켓에 가면 많은 물건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이익을 고려한 상비상품이 장내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서점에 갈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  (76쪽/1981.9.10.)

 

 헌책방 나들이를 모르는 적잖은 분들은 ‘헌책방에 무슨 볼 만한 책이 있어요?’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우리 나라에서 교보문고 같은 데에 가면 무슨 볼 만한 책이 있나요? 우리 나라 도서관에는 어떤 볼 만한 책이 있어요?’ 하고 되묻습니다. ‘인터넷 교보문고에 뜨는 책 말고, 매장 교보문고에 갔을 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책 가짓수는 몇 가지나 될까요? 교보문고 크기와 견주어 1/100도 안 될 만큼 작은 헌책방에 꽂힌 책 가짓수는 몇 가지나 될까요? 어느 쪽이 더 가짓수가 많은지도 궁금하지만, 어느 쪽이 한결 다양성이 살아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하고 덧붙입니다.

 

 우리 나라 새책방은 동네책방뿐 아니라 교보와 영풍처럼 큰 새책방조차도 ‘구멍가게 진열대’와 다를 바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익을 고려한 상비상품이 장내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는 1980년대 일본 책방 모습이었다는데, 2009년 한국 책방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 일본의 어린이들은 월등히 많은 책 속에서 마음대로 책을 골라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닌가 ..  (306쪽/1970.1.30.)

 

 그나마 2009년 오늘날 한국에서는 어린이책이 엄청나게 쏟아집니다. 그야말로 엄청나게 쏟아집니다. ‘어린이책은 수준이 낮아서 관심이 없다’고 하던 ‘이름나고 손꼽히던 인문학 출판사와 문학책 출판사’들 가운데 오늘날 ‘어린이책을 안 내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아예 ‘어린이책 내는 새끼 출판사’를 따로 만들어 꾸리기도 하며, 이제는 ‘어린이책 발행종수와 판매실적’이 그 인문학과 문학 출판사에서 ‘어른들만 읽는 인문학과 문학책 발행종수와 판매실적’을 훌쩍 뛰어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나라 어린이들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어린이책에 둘러싸인 채 즐거운’가 묻고 싶습니다. 오늘날 이 땅 어린이들은 ‘나라안 창작은 찾아보기 드문 가운데 나라밖 번역이 거의 모두를 차지한 흐름’에서 얼마나 신나게 책을 즐기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니, 초등학교 6학년을 지나 중학교 1학년이 되고부터는 ‘책다운 책’이란 한 권조차 손에 쥘 수 없게끔 되어 있고, 오로지 초등학교 6학년까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 수십만 가지에 이르게 된 오늘날, 이 나라는 아이들한테 아름답고 즐거운 곳인지 묻고 싶습니다. 믿을 만하다는 모임에서 엮어내는 ‘좋은 어린이책 추천목록’만 해도 수백 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 되어, 아이들은 ‘아이인 동안에 다 읽어낼 수조차 없이 많은 추천도서가 있는’ 터전은 아이들한테 얼마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가 묻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아이를 생각하거나 걱정하거나 사랑하면서 어린이책을 만드는지, 그리고 이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되어 살아갈 텐데, 아이들이 아이 때를 거쳐 푸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는 길에 즐겁게 길동무 삼을 책을 얼마나 마련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만화책 《이원복-뉴스 뒤집어보기》(조선일보사,1996)를 봅니다. 다른 신문사하고는 그리 안 가까운 듯하고 오로지 〈조선일보〉하고만 가까운 이원복 님은, 〈조선일보〉를 놓고 ‘보수주의를 담아내는’ 신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원복 님이 생각하는 ‘보수’와 국어사전에 실리는 ‘보수’ 풀이와 한국땅에서 펼쳐지는 ‘보수’ 모습은 하나도 같지 않다고 느낍니다.

 

.. 수직적인 경영 체제보다 더 큰 문제는 현지 책임자들이 인사 이동에 의해 수시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겨우 2∼3년 지내게 될 곳인데 힘들여 그 나라 말을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영어로 해결하려고 든다. 이런 자세부터가 현지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코리아에서 온 경영주가 자기네 말로 격려도 해 주고 대화에 응해 주기도 한다면 이미 정신적으로 강한 연대의식이 성립된 바나 다름없을 것이다. 몇몇 대기업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고 영구 현지 근무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는데, 이런 제도는 더욱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는 한 나라 문화의 기본이자 얼이다. 내 나라 말 하는 사람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는 없는 법이다 ..  (332쪽)

 

 한 나라 문화를 이루는 밑바탕이자 얼이라고 하는 말이라 한다면, 〈조선일보〉는 어떤 말을 어떤 글로 담아내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조선일보〉는 세상 흐름을 아예 모르쇠하거나 등돌릴 수는 없었는지, 예전처럼 한자 드러내어 쓰기는 거의 안 합니다. 〈조선일보〉도 99.9% 한글쓰기를 합니다(이제는 99.99%라 할 만하다고 느끼고, 앞으로는 99.999%까지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신문이름은 한자로 적고, 인터넷판은 알파벳으로 적지만, 기사 사이사이 자기 신문사 이름을 적을 때까지 ‘朝鮮日報’나 ‘chosun.com’처럼 적는 일이란 없습니다. ‘조선일보’와 ‘조선닷컴’으로 적을 뿐입니다.

 

 사진책 《양종훈-AIDS in Swaziland》(PhotoArt,2006)를 봅니다. 영어로만 적힌 책을 넘겨보면서, 한글판은 없나 하고 알아보니 2007년에 사진예술사에서 한글판이 따로 나왔습니다. 영어판이 먼저 나오고 한글판이 나중에 나온 셈인가 싶군요.

 

 그나저나 영어판이고 한글판이고, 사진이 얼마나 사진으로 말을 거는가를 살펴봅니다. 양종훈 님은 사진학과 교수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많이 움직이는 분이니, 이런 분이 에이즈 문제를 사진으로 다룰 때에는 좀더 눈길이 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진책 《AIDS in Swaziland》를 보았을 때에는, 그동안 나온 숱한 ‘에이즈 다룬 사진책’하고 무엇이 다른지를 못 느끼겠습니다. ‘스와질랜드 에이즈’를 다룬다고 책이름으로 밝히는데, 사진책 어디에서 ‘스와질랜드 삶과 문화’를 남달리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에이즈를 사진으로 다루는 눈길’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왜 에이즈를 사진으로 다루려 했고, 사진으로 에이즈를 다루면서 우리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지 궁금합니다. 책을 펼치며 사진을 보는 내내 ‘왜 이런 사진을 찍어 왜 이런 책을 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한국땅 사진작가와 사진학과 교수님들이 넘지 못하는 울타리를 이분 또한 못 넘고 있을 뿐인지 알쏭달쏭합니다.

 

 

 (4) 아이들 앞에서

 

 《김종필-J.P.칼럼》(서문당,1971)이 보입니다. 어느 헌책방에서나 굴러다니고 있는 책입니다. 얼마나 팔리고 얼마나 읽히는지 모릅니다만, 헌책방 몇 군데 슥 돌면 열 권쯤 사들일 수도 있습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딱히 고를 만한 책이 보이지 않는 날, 가끔 끄집어내어 넘겨보곤 했는데, 오늘은 이래저래 다른 책을 골랐는데에도 한번 끄집어내고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김종필 님이라 하면 정치 권좌에서 아주 물러난 뒤라 비로소 궁금해졌다고 할 텐데, 정치 권좌나 권력에 조금도 힘을 미치지 못하는 그 김종필 님이 한창 힘을 뻗치고 있을 무렵 낸 책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들여다봅니다.

 

.. 돌이켜보면, 아빠는 아빠 나름대로 이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겠다고 심혈을 기울여 쏟았던 것이지만 세상사 여의치가 않아 기약 없는 외유의 길에 올랐던 1963년 2월, 네 나이 열세 살이었다. 김포공항에서 항공기 트랩까지 뛰어올라왔던 너는, “아빠, 왜 가는 거야? 영영 못 돌아오는 게 아냐? 난 싫단 말이야.”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던 그날 … 네가 중학생이 되고 불과 한 달 후부터 야기된 한일회담 반대를 둘러싼 학생 데모 사태로, 아빠는 6월 8일 두 번째 외유를, 마치 연례행사 모양 떠나게 되었었다. 보스턴의 하아버어드 대학에서 수강하면서 여수와 고적감을 달래는 유일한 위안은 고국으로부터의 편지였는데 어느 날 낙백의 아빠를 더욱 심기소침케 한 것은 네가 학교 가기를 꺼려한다는 사연이었다. 아빠는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해서 일일민민했는데 귀국 후 들으니 암연했던 것이다. “얘들아, 예리 아빠는 이완용이래. 우리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으려다 쫓겨나갔다잖아. 야당 사람들 얘기로는 엄청난 돈을 일본에서 남몰래 받았대나 봐.” .. (63∼65쪽)

 

 《J.P.칼럼》에서 아빠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기도 하던 딸아이는 어느새 예순이라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참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고 느껴집니다. 지금 이분, 김종필 님 딸아이는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까 궁금해서 인터넷에 이름 석 자 넣고 찾아보기를 해 보는데, 어느 경제잡지에 나온 기사 한 토막에 ‘아빠는 딸은 쌀장수를 하고 아들은 물장수를 한다고 놀려요’ 하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김종필 님 딸아이는 식품유통 쪽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J.P.칼럼》에 김종필 님 아이들 이야기는 몇 대목 안 나옵니다. 아무래도 당신 아이들하고 함께 지내던 시간이 짧았기 때문일 텐데, 그 짧은 이야기에 엿보이는 ‘학교에서 따돌림받는’ 대목은 쉬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김종필이라고 하는 사람이 ‘또다른 이완용 짓’을 했다고 하여도 그 일은 김종필이라는 사람 몫이지, 김종필이라는 사람이 낳아 기른 아이들 몫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가 사람을 죽이는 짓을 했든, 어버이가 도둑질을 했든, 어버이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든, 우리는 그 어버이가 한 짓 때문에 그 어버이네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따돌려서는 안 됩니다. 김종필 님 아이들이 ‘자기 그릇에서 저지르는 잘못이 있을 때’ 나무라거나 탓할 수 있을 뿐입니다. 노무현 옛 대통령과 이명박 지금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무현 님네 아이들이건 이명박 님네 아이들이건 홀로선 사람이요 당신 그릇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당신들 어버이한테 엄청난 힘과 돈이 있다 하여 당신들한테도 힘과 돈이 물려질 수 없고, 당신들 어버이한테 얄궂은 허물과 잘못이 있다 하여 당신들한테도 허물과 잘못이 물려질 수 없습니다. 목숨은 물려주어도 이름은 물려줄 수 없고, 사랑은 이어주어도 돈은 이어줄 수 없으며, 믿음은 나누어도 힘은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 세상은 목숨과 사랑과 믿음이 아닌 이름과 돈과 힘만 물려주고 있을 뿐이지만.

 

 《쟈크 엘룰/쟈크엘룰번역위원회 옮김-뒤틀려진 기독교》(대장간,1990)라는 책을 봅니다. 샛장수 아저씨들이 추운 날씨에도 자동차와 오토바이에 책짐을 가득 싣고 와서 책방 앞마당에 부려 놓는데, 이 가운데 이 책 하나가 눈에 박힙니다. 〈뿌리서점〉 아저씨가 샛장수 아저씨들한테 책을 사들이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저 책도 골라 주시기를’ 빌었고, 〈뿌리서점〉 아저씨는 어김없이 이 책까지 헌책방 책살림으로 거두어들였습니다.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맨위에 얹힌 《뒤틀려진 기독교》까지 집어들면서 책값을 셈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른 이 책은 덤으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어, 이 책 대단히 이름난 책인데, 그냥 주시면 안 돼요.” “괜찮아, 괜찮아, 여기에도 책들 많은데.”

 

..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는 이 비유를 듣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자는 반석 위에 세워진 사람과 같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반석은 듣는 것과 행하는 것 모두이다. 그런데 두 번째 부분에 더 구속력이 있다. 즉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세워진 자와 같다는 것이다 … 교회는 단순히 우리 사회의 이념들과 행동양식들을 꼭 그만큼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은 마치 교회가 어제와 엊그제의 그것들을 받아들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 돈과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 왜냐하면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영원한 행동은 인간의 자유인데, 이는 참 자유를 뜻하는 것이지 인간의 자율의지라든가, 독립이나 일관성이 없는 것에 대한 추구는 아니다 ..  (15, 21, 29, 31쪽)

 

 처제들한테 선물해 줄 영어 그림책 몇 가지까지 셈하고 나서 가방에 차곡차곡 담습니다. 끙차 하고 둘러메니 제법 무겁습니다. 무거운 책가방 등에 메고 사진가방 앞에 메니 전철역까지 걷는 길에 몸이 후끈해집니다.

 

 다시 전철을 탑니다. 종로3가를 거쳐 일산으로 가는 먼길에 읽을 책이 여럿 생겨 즐겁습니다. 전철에는 책을 읽는 사람 드문드문 보이고, 공짜신문 한동안 펼쳤다가 선반에 휙 집어던지는 사람 몇 있으며, 손전화나 노트북 게임을 하는 사람 제법 있으며, 안아서 자는 사람과 서서 전화 거는 사람 여럿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형이상학적인 책이나, 영지주의적 계시를 담은 거룩한 책, 또는 완전한 인식론적 체계나 완벽한 지혜 등을 보내지 않고 한 인간을 보내셨다 ..  (49쪽)

 

 

 하늘에서는 책이 아닌 말씀이 아닌 사람을 내려주었다면, 사람들이 사람한테 무엇인가 나누어 주려 한다면 책이 아닌 사람을 나누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돈을 나누어 준다든지 밥을 나누어 준다든지 집을 나누어 준다든지가 아니라, 사람을 나누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돈을 나눈다 하여도 사람 냄새가 배인 돈을 나누고, 밥을 나눈다 할 때에도 사람 손길이 깃든 밥을 나누며, 집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사람 손때가 묻은 집을 나누어야지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살찌우는 책을 읽을 때에도 책에 담긴 줄거리가 아닌 책에 줄거리를 짜 넣은 사람들 마음과 손길과 눈길을 받아들이고, 책을 선물할 때에도 무슨무슨 줄거리를 다룬 책이 아니라 이 책을 고른 사람 사랑과 믿음을 고이 담아서 건넬 수 있어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주엽역쯤 되니 비로소 자리가 납니다. 아주 잠깐 앉아 다리쉼을 한 뒤 대화역에 내립니다. 이십 분쯤 찬바람에 벌벌 떨다가 버스로 갈아타고 옆지기네 식구들 있는 집으로 들어갑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용산 <뿌리서점> / 02) 797-4459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태그:#헌책방, #뿌리서점, #어린이책, #책,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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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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