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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의 음산한 공기는 매섭고 차가웠습니다. 어둠이 아직 사방에 깔린 고요한 12월 하순의 새벽을 뚫고 ‘서울역’에 도착해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KTX 고속열차에 올랐습니다. 열차에 오르니 열차 안이 마치 따스한 온풍으로 가득 채워지는 기다란 풍선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열차표를 확인하고서 두리번두리번 자리를 찾아 좌석에 앉았습니다.

 

의자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오랜만입니다. 처음엔 1984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었고, 두 번째로는 1994년 아내와 결혼식을 치른 후 자동차를 몰아 신혼여행이랍시고 전국일주를 할 때 경주를 들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학여행 때는 기차를 타고 갔었습니다. 신혼여행 때는 조그만 소형차를 직접 운전해서 경주를 갔었습니다. 그 이후 만 14년이 지나서야 겨우 큰 맘 먹고 다시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새벽에 집을 나서 출발하느라 잠을 설쳐서인지 눈을 감고 의자에 머리를 기대니 스르르 잠깐의 졸음이 몰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승무원이 끌고 지나가는 음료수 판매용카트 바퀴의 작은 진동이 덜컹거리는 찰나 깜짝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나는 꿀맛 같은 순간의 단잠 속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학창시절 경주에 갔을 때의 아련한 기억들이 꿈속에서 되살아나 당시의 친구들 모습, 불국사와 석굴암의 모습, 그 밖의 여러 가지 것들이 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그것들의 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조각조각 이어져 꿈속에서 나를 흥분하게 하고, 설레게 했습니다.

 

하루 동안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옛 신라의 고도 경주여행이 발달된 교통수단으로 인해 가능해진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고속열차를 타고 가면서 천 년 고도 신라의 땅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살펴보는 황홀하고 가슴 벅찬 여행을 꿈꾸며 또다시 얼마동안 눈을 감았습니다. 

 

고속열차는 두 시간이 채 안 되어 동대구역에 도착했고, 미리 기다리고 계시던 버스기사님을 만나 경주로 향했습니다. 경주로 가는 도중 나는 잠깐의 한눈도 팔지 않고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신라의 ‘벌’과 산과 하늘, 그리고 도시 곳곳에 베어있는 옛 신라의 흔적과 느낌을 촘촘히 관찰했습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천마총’이었습니다. 천마총은 신라시대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대릉원’ 안에 있었습니다. 천마총은 약 1400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져 많은 방문객들을 안으로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무덤 안에는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는 ‘하늘을 나는 말의 그림이 그려진 말의 유구’가 있었고, 금ㆍ은으로 장식된 허리띠, 철로 만든 칼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화염을 뿌리치듯 아니면 구름 위를 질주하는 듯한 ‘천마도’의 역동적인 동세(動勢)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금ㆍ은의 장식을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가공한 부장품들을 통해 오래 전 신라 장인(匠人)들의 열정과 집중력을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무덤이 만들어진 구조를 볼 수 있도록 해놓은 단면을 고개를 들어 쳐다보며 그 시대 사람들의 놀라운 창의력과 무덤 축조의 기술력에 감탄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수 십 기의 무덤이 제주도 화산지형의 작은 오름을 연상할 정도로 군데군데 완만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솟아 있었습니다. 나는 선 자리에서 그대로 한 바퀴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고대 권력자들의 무덤으로 뒤덮인 그 곳 ‘대릉원’에는 크기와 규모는 약간씩 달랐지만 당시의 왕과 귀족들이 꿈꾸었을,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영혼의 안식’에 대한 이기적인 욕망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흡사 낮은 구릉들처럼 보이는 거대한 무덤들의 군락을 바라보며 나는 칼을 쥔 자들의 권세 뒤편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피땀 흘린, 목숨을 건 힘없는 백성들의 노동이 있었음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대릉원’의 너른 무덤 군락을 한 동안 묵언으로 주시하며 죽은 자와, 죽지 못해 땅을 파고, 흙을 나르고, 돌을 파내며 쓰러졌던 자들의 운명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걸어서 호젓한 ‘미추왕릉’ 앞을 지나쳐 쌍봉낙타의 등처럼 보이는 ‘황남대총’을 스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근처에 있는 ‘첨성대’로 향했습니다.

 

대릉원을 지나는 중 저만치 앞에 우뚝 솟은 원통형 술병 모양의 첨성대가 보였습니다. 멀리서 한 눈에 보아도 자연스런 황금비율로 흘러내린 단아한 곡선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첨성대는 소박한 한옥의 처마선과 세련된 고려청자 매병의 허리선이 조화를 이룬 듯한 ‘몸짱’ 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첨성대의 네모난 기단과 원통형 허리선과 꼭대기에 놓여진 우물 정(井)자 형태를 관찰했습니다. 기단부터 꼭대기까지 28단으로 쌓여진 각석 몸돌의 개수가 모두 362개라고 합니다. 1년을 음력으로 계산하면 362일 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내게는 그런 해석이 썩 실증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나로서는 미스터리한 구석이 많지만 천문관측시설이었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연구와 분석이 현재까지 권위적 설득력을 얻고 있으니 근거 없이 건방지게 깝죽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여전히 의구심이 드는 것은 있었습니다.

‘만약, 별을 관측하려 했다면 별을 더 잘 볼 수 있는 더 높은 곳이나 산 위에 설치하지 않고 왜 편평한 낮은 평지 위에 설치했을까? 왜 규모도 그리 크지 않고, 꼭대기에 올라서도  천체를 안정적으로 관측하기 어려운 비상식이며 협소한 구조로 만들어졌을까?...’

 

그밖에 첨성대로 올라가는 통로나 방법 등에 관한 의구심은 더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 앞에 서서 유심히 관찰하고 추정해보는 얕은 식견과 안목만으로는 쉽사리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대 신라인들이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숭배를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상징적 조형물이 아닐까’ 하는 그저 내 나름의 당돌한 해석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첨성대가 가진 조형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담은 채 혼자만의 몽상을 즐기며 그 곳을 천천히 걸어 나왔습니다. 

 

‘신라의 아낙들이 첨성대를 중심으로 둥근 모양으로 손에 손을 잡고 서서 ’강강술래‘를 하 듯 사뿐사뿐 돌아가며 백성들의 ’무사평안‘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춤을 추지 않았을까?...’

 

나는 새벽부터 쉴 새 없이 이어져 온 천 년 고도(古都) ‘신라투어’를 잠시 멈추고 첨성대 근처에 있는 경주 쌈밥집으로 가서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한 상 가득히 차려진 과분한 성찬을 보니 먹지 않았는데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저절로 들 정도였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허기진 배를 얼른 든든하고 즐겁게 채우고 나서 다시 다음 장소로 움직였습니다.  

 

신라의 궁궐터인 월성(반월성)터에 도착해서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한적하게 산책하듯 올랐습니다. 반월성터 너른 풀밭은 참나무 마른 낙엽으로 온통 덮여 있었습니다. 겨울이었지만 오히려 만추의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벌판에서 아이들과 낙엽 한 줌 씩을 손아귀에 집어 들어 하늘 위로 뿌리며 분위기 있는 신라의 오후를 만끽했습니다. 

 

반달 모양의 옛 신라궁궐터에 서서 주변의 풍경을 샅샅이 내 눈의 동영상으로 녹화했습니다. 언제고 다시 기억을 떠올리더라도 생생하게 생각날 수 있도록 나는 가늘고 쳐진 작은 눈의 미간을 일부러 찌푸리며 강렬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반월성 터 성곽 주변에는 임금님들이 여름에도 시원하고 찬 음식을 드실 수 있도록, 일 년 내내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인 ‘석빙고’가 있었습니다. 외형을 보면 마치 무덤처럼 생긴 얼음 창고는 입구를 철창으로 막아놓아 직접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석빙고와 연결된 성곽의 오른쪽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았다는 석빙고의 비밀에 대해 곰곰이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석빙고의 지붕 위에는 3~5개의 환기구가 보였습니다. 아마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비밀의 열쇠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공기의 순환, 즉 더운 공기는 차가운 공기를 만나면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이용하여 환기구를 설치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석빙고 내부 안쪽에 있는 움푹한 홈과 바닥으로부터 시원하고 찬 공기가 위로 올라가 돔처럼 생긴 석빙고 내부를 시원하게 순환하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 기록에 의하면, 얼음을 종이에 싸서 차곡차곡 쌓은 다음 그 위에 짚이나 왕겨를 덮어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석빙고를 뒤로하고 걸어 나오는데 아이들이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모름지기 얼음 창고 옆에서 얼음 생각을 하니 자꾸 ‘얼음과자’가 먹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반월성의 석빙고를 조금 지나 맞은편에 있는 ‘안압지’로 향했습니다. 안압지는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여 오리와 기러기가 한가롭게 날아다니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시인들에 의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하는 호수입니다.

 

안압지는 반월성 궁궐의 별궁자리로 추정되는데, 겨울이라선지 호수의 물 위에는 무성한 갈대와 부평초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청량한 하늘아래 세련된 자태로 배치된 전각이 있었고, 건물의 흔적으로 남은 주춧돌과 빈터가 있었습니다. 호수와 건물들의 배치는 자연스러웠고, 그 간격과 어우러짐은 치밀한 입체구성으로 디자인되어 매우 조화로웠습니다.

 

건물 난간에 손을 짚고서 호수를 향해 숨을 상쾌하게 한 번 내쉬었습니다. 허파에 가득 찼던 묵은 날숨을 모조리 뱉어내자 순간 가슴이 트이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회복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줄기 바람이 내 얼굴의 뺨에도 잔잔한 호수의 뺨에도 스리 살짝 스쳤습니다. 나는 몇 초 동안 살며시 두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화려한 연회와 잔치가 벌어지던 이 곳 안압지에서 나비처럼 아름답게 춤추던 무희들을 생각했습니다. 또한 ‘주색가무’로 껄껄거리던  왕족들의 호탕한 쾌락의 잔치를 상상했습니다. 나는 마치 꿈을 꾸듯, 그 옛날 이 곳 안압지에서 벌어졌던 화려한 연회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찰나의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버스는 경주외곽도로를 타고 토함산 북쪽 자락을 지나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지었다는 ‘감은사지’를 들렀습니다.

 

감은사지는 휑하니 절터만 남은 것은 아니었고, 남매처럼 형제처럼 두 개의 탑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기운차고 견실하면서도 장중한 모습의 3층 석탑은 어스름한 오후의 회색빛깔로 그 앞에 펼쳐진 황량한 겨울 들판과 먼 산을 묵묵히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경상도 사내처럼 무뚝뚝해 보이는 두 개의 탑이 질박하고 믿음직스럽게 선 모습을 보며 나는 ‘무척 매혹적이다’ 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3층 석탑은 화강암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축조된 것으로, 신라시대의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 탑을 유심히 보지 않고 혹 소홀히 본다면 마치 시멘트콘크리트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탑이지만 그 질감이 독특했습니다.

 

한편 탑의 몸돌 부분에는 천진한(?) 아이들의 낙서로 보이는 분필 글씨 같은 흰 글씨가 아직도 군데군데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안타깝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1960년 경 발굴조사가 이뤄지기 전까지 여기가 시골동네 아이들의 산중 놀이터처럼 이용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탑 옆에서 안타까움에 한 숨을 푹푹 쉬어대는 나를 보며 저만치 뒤따라오신 버스기사님이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말이지요, 도굴범들이 말이지요, 탑 속에 불상이나 책이 들어 있으면 훔쳐 꺼내다가 팔아먹으려고 말이지요, 심지어 다이너마이트로 탑을 폭파시키기까지 했다 아입니까? 내 참 우스워서...”

 

아쉽지만 감은사지와 이별하고서 동해바다 감포 앞바다에 잠들어 계신다는 문무대왕을 만나기 위해 버스에 올라 감포 해변으로 향했습니다. 10분도 채 안 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바다와 갈매기 떼를 보니 왠지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푸른 물결의 파도가 바람을 타고 모래밭으로 기어오르려는 듯 하얀 거품을 쏟으며 덤벼들었습니다. 아이들과 나는 짠 내 나는 동해바다의 바람을 만나 신나게 껴안았고, 무작정 달려드는 파도를 피해 도망치며 “호호호~ 히히히~ 깔깔깔~” 멈출 수 없는 웃음으로 정말 행복한 해변의 놀이를 실컷 즐겼습니다. 

 

저만치 바다 위에 돌섬으로 ‘문무대왕 수중릉(대왕암)’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수많은 갈매기들에게 등을 내주어 쉴 곳이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대왕암은 바람과 파도에 날개가 지친 갈매기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갈매기들에겐 휴식의 섬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침입하는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리라’며 바다 속에 장골된 문무왕의 설화가 오롯이 떠오르는 저 바위섬은 몹시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한참동안 감포 앞바다의 바람과 파도와 어울리며 미친 듯 신나게 놀았습니다. 한 개구쟁이 녀석은 겨울바다의 낭만에 빠진 나머지 행복한 모습으로 주저 없이 첨벙 바다에 발을 빠뜨렸습니다. 나는 즉흥적이지만 순간적으로 발산되고 있는 저들의 폭발적인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굳이 제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그칠 줄 모르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나또한 절로 그들에게 전염되고 있는 것처럼 입가에서 웃음이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감포 앞바다 대왕암의 문무왕대께 오래도록 강령하시라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나는  바다를 등지고 뒤를 돌아오기 전 아쉬운 듯 끼륵 거리고 있는 갈매기 떼와도, 아무런 불평 없이 밟혀주었던 무수한 모래들과도, 짭짤했지만 신선하고 친근했던 바람에게도 애틋한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어스름해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현기증 나는 토함산을 넘었습니다. 토함산 꼬부랑 고갯길을 넘어 내려오는 도중 속은 울렁울렁 거렸고, 머리는 핑~ 어지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산 아래 내려 보이는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의 모습은 차분하고도 고요했습니다.

 

어둠을 서두르는 듯한 하늘의 빛은 내게 조바심을 갖도록 했습니다. 해서 나는 축지법을 사용한 듯 걸음을 재촉하여 불국사 입구로 들어섰습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국사를 찾은 관광객은 여기저기 꽤나 많아 보였습니다. 고송(古松)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불국사 ‘자하문’ 아래에서 겸손히 고개를 들어 석공들이 혼으로 돌을 다듬고, 불심의 정열로 깎아 만든 백운교, 청운교, 칠보교, 연화교를 올려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고개를 왼쪽에서 시작해서 서서히 오른쪽으로 향하며 속세에서 불국으로 오르는 구도의 다리와 계단을 쳐다보았습니다. ‘안양문’에서 시작한 시선은 ‘범영루’를 거쳐 ‘자하문’을 지나 맨 오른쪽의 ‘좌경루’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넋을 놓고 바라보던 어느 순간 나도 물래 눈물이 날 것 같은, 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의 변화가 찾아옴을 짜릿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 이상한 노릇이었습니다.

 

“평소 무신론자로 살아온 나에게 겨울날 저녁 무렵에 들른 신라의 대가람 불국사의 느낌이 이다지도 내 마음을 스산하고 강렬하게 흔들었단 말인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좌경루 오른쪽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으로 무비자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서자 바로 눈앞에 하얀색 환자복장으로 가려져 서 있는 탑이 있으니 다름 아닌 다보탑이었습니다. 며칠 전 TV뉴스에서 다보탑의 보수에 대한 소식은 접했었지만 막상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니 적잖이 걱정되지 않았습니다. 난간에 틈이 생겨 그 틈새 사이로 물이 스며들고, 그것으로 인해 점점 부식이 심해지면 안 될 일이니 속히 치료를 해야 할 형편으로 보였습니다.

 

섬세하고 여성적이며 세련된 자태를 가진 다보탑의 미모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마음은 안타까웠지만, 서쪽으로 몇 발치 떨어진 곳에 단아하고 고고한 모습으로 묵직하게 서 있는 석가탑을 보게 되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얼른 가까이 다가가서 그와 얼굴을 서로 대면했습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균형이 매우 뛰어나게 생긴 그의 몸매는 단정하고 침착했습니다. 초라하리만큼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의 소박한 몸을 바라보며 나는 오히려 현대디자인 개념의 ‘단순성의 미학’을 생각했습니다. 그 옛날 아사달이라는 석공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빼어난 수작(秀作)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며 그의 묵직하고 자존심 있어 보이는 안정감이 참으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대웅전을 한바퀴 돌아보며 오랜 세월 동안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기도가 쌓이고 또 쌓인 신라의 고찰을 깊숙이 감상했습니다. 그리고서 ‘대웅전’을 지나고 ‘무설전’을 지나 ‘극락전’으로 갔습니다. 극락전에 이르자 마당 안 한 곳에는 황금돼지상이 있었습니다. 극락전 편액 뒤에 은밀하게 그려져 있던 황금돼지를 찾아내어 뭇 중생들의 곁으로 왕림시킨 부처님의 유쾌한 구도의 뜻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나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겨울날 저녁 불국사 뒤 곁을 걸으며 ‘비로전’과 ‘관음전’을 차례대로 들러 살폈습니다. 비록 지친 몸을 이끌고서 꼼꼼하게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간직한 불국사 곳곳에 깃든 신라 불교의 역사성을 접하게 되니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습니다. 은근한 화려함과 고색의 빛깔,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토함산 자락 그 자리에 좌정하고 있는 부처님 나라 ‘불국사’에 안기니 진실로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의 시간을 되새겨보며 어둠이 내려앉은 불국사 경내를 돌아 나와 좌경루 앞에 흐르는 맑은 샘물 한 바가지를 벌컥 마셨습니다. 시원하게 목구멍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들어가는 한 모금의 물은 순간, 내 혼탁한 잡념의 정수리를 때리는 죽비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모금의 물은 칼칼한 목구멍 안의 먼지와 때, 이기적 번뇌와 욕심을 버리지 못한 한 사람의 부족한 중생의 영혼과 심장까지도 깨끗이 씻겨주는 자비의 생수였습니다.    

 

나는 짧은 하루 동안 꿈을 꾸었던 모양입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한 치의 쉴 새도 없이 구름을 타고서 고대 신라인들의 삶과 죽음과 예술과 문화를 두루 구경하는 역사여행을 했던 모양입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서울로 가는 KTX 고속열차에 몸을 실어 의자에 머리를 기대니 어느새 스르르 자동으로 눈이 감겼습니다. 그리고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새 또 꿈을 꾸었던 모양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2월27 일 KTX 고속열차를 타고 하루만에 당일로 담사여행 다녀온 뒤 쓴 글입니다. 

# KTX 경주 당일답사여행 정보 : 시중 여행사 상품 중 KTX 당일상품 예약 - 현지 연계버스 이용하여 이동 - (가이드 없이 경유 코스별로 자율적으로 관광- 따라서 미리 경유할 곳에 대한 사전조사 필요하며, 자신이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을 주안점으로 여행을 계획하는 것이 효과적임.)


태그:#경주답사, #신라, #첨성대,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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