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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들이를 하는 동안, 아기가 고이 잠들어 주면, 두 사람은 히유 한숨을 돌리면서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거나 책을 쥐어듭니다. 느긋하게 책을 읽을 겨를이란 거의 없는데, 어쩌면, 책읽기보다 아기보기가 훨씬 우리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 주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아기 어르며 책을 읽기란 먼 나들이를 하는 동안, 아기가 고이 잠들어 주면, 두 사람은 히유 한숨을 돌리면서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거나 책을 쥐어듭니다. 느긋하게 책을 읽을 겨를이란 거의 없는데, 어쩌면, 책읽기보다 아기보기가 훨씬 우리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 주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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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 20만 원 -

옆지기가 씻고 빨래하고 머리 감는 동안, 아기를 안고 함께 놉니다. 이리저리 해야 하는 일감이 있지만, 아기와 함께하는 가운데 일감은 뒤로 미루어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일손이 많이 늦춰진다고 생각했는데, 하루이틀 흐르는 사이 아기 때문에 일에 매이지 않고 몸이며 마음을 쉬기도 하고 즐거이 놀 수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아기랑 놀아 준다기보다 아기와 함께 논다고, 아기가 저를 놀게 해 준다고 할까요.

한참 신나게 읽고 있었으나, 아기가 태어날 무렵 손에서 놓고 나서 오래도록 못 펼치고 있는 책이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한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한손으로는 이 책을 집어들어서 펼칩니다. "자, 오랜만에 책을 읽어 줄까? 이 책은 아기한테 재미있는 이야기일까?" 책을 펼칩니다. 책 사이에 끼어 있던 흰 봉투가 하나 툭 떨어집니다. 응, 뭐지? 봉투를 들어 봅니다. 겉에 아무 글도 안 적힌 봉투인데, 안에 뭔가 들어 있습니다. 헉. 10만원 수표 한 장과 1만 원짜리 종이돈 열 장.

무슨 돈이 여기에 있지? 잊어버린 돈은 아닌데. 누가 여기에 돈을 끼워넣었나?

옆지기한테 물어 봅니다. 옆지기도 이 돈이 왜 여기에 끼워져 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 집에 아기 보러 찾아온 누군가가 슬그머니 끼워넣은 돈이려나? 아무래도 그렇게 넣어 준 돈이 아닐까 싶은데, 도무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언제 이렇게 끼워졌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책만 잔뜩 있는데, 그 많은 책 가운데 제가 가까이 놓고 읽던 책이니, 이 책을 다시 펼칠 때쯤 '짠!' 하고 나타나며 기쁨을 선사해 주리라 믿고서 넣으셨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삶이 팍팍하지만 책읽기로 팍팍함을 풀자고 생각하며 즐겁게 펼칠 때, '그려, 거 보라구, 책에 길(살아갈 길)이 있잖여?' 하고 일러 주려고 넣으셨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마 우리를 생각해 주어서 이렇게 해 주셨겠지. 당신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고 이렇게 해 주셨겠지."

큰아버지를 처음 만난 아기. 큰아버지가 된 우리 형이, 그동안 아기를 찍어 놓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마주앉아 있습니다. 형은 늘 동생을 넌지시 살피면서 지켜 주는 든든한 길동무입니다.
▲ 친형과 아기 큰아버지를 처음 만난 아기. 큰아버지가 된 우리 형이, 그동안 아기를 찍어 놓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마주앉아 있습니다. 형은 늘 동생을 넌지시 살피면서 지켜 주는 든든한 길동무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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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 32만 원 -

목포에서 형이 찾아옵니다. 우리 아기한테는 큰아버지입니다. 우리 아기 사름벼리한테는 이모도 하나 외삼촌도 하나 큰아버지도 하나입니다. 그러나 고모는 없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아이 숫자가 크게 줄어든 오늘날이니, 살붙이 가운데 없는 사람도 많을 테지요.

형은 일흔 날 만에 아기를 봅니다. 동생은 한 백 날 만에 보았으려나. 인천과 목포가 멀기도 멀지만, 우리 식구가 형을 보러 목포로, 또 다른 살붙이를 보러 여러 곳으로 다니기가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네를 재개발로 밀어붙여 싸그리 없애려는 인천시 개발업자와 공무원하고 맞싸우는 큰일 때문에 틈을 쪼개지 못하기도 했지만, 저 스스로 벌여놓은 여러 일을 치르느라 느긋하게 움직이지 못한 탓입니다.

누런쌀과 두 가지 콩과 옥수수와 보리로 지은 밥에다가 카레를 끓이고 나물 두 가지를 씻어서 밥상을 차립니다. 형 입맛에 맞을지 걱정스럽지만, 우리 식구가 먹는 대로 차려 봅니다.

밥을 먹고 아기를 보고 옥상마당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눕니다. "은행은 자주 가냐?" "글쎄, 요새는 그다지." "은행에 가서 이것 좀 내 주라." 형은 버스터미널에서 떼었다는 벌금딱지 한 장을 내어밉니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버스터미널에서 담배를 피웠다며 경범죄로 2만 원을 내라는 딱지.

풋. 웃기는 딱지네. "뭐야, 버스기사들 맨날 터미널에서 담배 피워대는데, 무슨 벌금이야? 진짜 웃기네." "경찰들이 쫙 깔려 있더라고." 시외버스를 타려고 버스 타는 곳에 찾아갈 때면 으레, 허구헌날, 언제나, 버스기사며 수많은 사람들이 담배 뻑뻑 피워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단속하는 사람은 못 보았습니다. 버스 타는 곳에 경비원도 많고 경찰이 오가기도 하지만, 담배 태우는 사람보고 끄라고 말하는 모습은 못 보았습니다. 버스기사님들 담배 태우는 바로 뒤에 '금연'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음에도.

여느 때에는 가만히 두다가, 날잡아서 몰아치기 단속을 해서 건수 올리기를 하시나? 공공장소에서는 담배를 못 피우도록 하는 일이 옳기야 옳은데, 공공장소에서 피우지 말아야 하는 담배라면, '공공장소란 어떤 곳'이겠나? 버스터미널만 공공장소인가? 사람들 오가는 거님길도 공공장소이고, 공원도 공공장소이며, 광장도 공공장소입니다. 못 피우게 하려면 모든 곳에서 못 피우게 해야지, 아니, 처음부터 담배란 녀석을 만들지도 말아야지요. 담배연기는 터미널도 터미널이지만, 길에서 걸어다니며 피우는 사람들 연기가 더 끔찍하고 괴로운데 말입니다.

형은 가방에서 돈을 꺼내어 벌금딱지 사이에 끼워서 건넵니다. 나중에 보니 형이 끼워 놓은 돈은 1만 원짜리 서른두 장. 2만 원 벌금 내는 심부름삯이 30만 원?

'바람 부는 대로 간다'면서 집을 나서는 형한테, 저녁에 잠자러 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형은 손전화에 문자를 남깁니다. '바람이 그리 불면.'

아기를 안고 읽는 책은, 아기 없이 살면서 읽는 책하고 사뭇 다를밖에 없습니다. 치르거나 겪어 보아야지만 알 수 있는 책읽기입니다.
▲ 아기 안고 읽는 책 아기를 안고 읽는 책은, 아기 없이 살면서 읽는 책하고 사뭇 다를밖에 없습니다. 치르거나 겪어 보아야지만 알 수 있는 책읽기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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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책읽기, #책, #돈, #육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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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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