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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 대성당에서 본 예수의 탄생의 묘사한 색유리.
 딜리 대성당에서 본 예수의 탄생의 묘사한 색유리.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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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비시 성당. 동티모르 국민 대부분이 성당에 다닌다. 평일에는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성당에 가는 주일만큼은 멋을 낸다.
 마우비시 성당. 동티모르 국민 대부분이 성당에 다닌다. 평일에는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성당에 가는 주일만큼은 멋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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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촌을 둘러보고 우리가 간 곳은 대성당이었다. 이곳은 동티모르에서 본 성당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성당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당연히 문이 열려 있으리라고 생각했기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이래서야 어디 성당을 구경이나 할 수 있겠나,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려는데 성당 앞쪽의 쪽문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그는 성당을 둘러보는 우리를 쪽문으로 안내했다.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성당 사무실이다. 낡은 타자기가 놓여 있고, 사무용 책상도 있다. 그 문을 통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넓었다. 천 명이상이 한꺼번에 미사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의 규모라고나 할까. 너무 넓어서인지, 썰렁한 느낌이었다. 밖은 푹푹 찌고 있었지만 성당 안은 의외로 시원했다.

성당 안에는 오래 묵은 먼지 냄새가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실제로 성당 안 여기저기에는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그렇다고 사용하지 않고 굳게 닫아놓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성당 안의 긴 의자들은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던 것이다. 성당이 너무 넓어서 제대로 손질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 위의 벽에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붙어 있었고,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놓여 있었다. 성당 안은 전체적으로 퇴락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위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올라가 보니 철문으로 가로 막힌 채 자물쇠가 물려 있었다. 하지만 그곳 말고 다른 곳에 올라가는 곳이 있었다. 다른 통로가 있는데 굳이 문을 잠근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렇게 올라간 2층에는 쓰다만 의자나 마루를 뜯은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 있었다.

성당 안에는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하다못해 신부님이라도 볼 수 있으려나 했으나, 없었다.

이 성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2층의 색유리창이었다.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새겨진 유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색유리창에 머문 햇빛 때문에 그곳은 아름다운 조명처럼 빛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색유리창에는 조금도 낡거나 퇴락한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밝고 싱싱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펄떡이는 듯한 생명력마저 느껴졌다.

동티모르를 돌아다니면서 성당은 참 많이 보았다. 지역마다 크고 작은 성당들이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성당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도 성당은 일요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만 문을 여는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일요일 아침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성당에 간다고 했다.

이들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성모 마리아 기념행사를 딜리 시내에서 하는 것은 보았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나름대로 신경 써서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깜찍한 드레스에 고운 구두를 신고 있기도 했다. 미사를 드리는 분위기 역시 무척이나 경건했다.

딜리 대성당 내부의 화려한 색유리(왼쪽), 가톨릭 행사에 참여한 소녀. 동티모르에는 지역 곳곳 마다 성당이 있으며, 성인 탄생 축일 행사등 종교 행사가 많이 열린다.
 딜리 대성당 내부의 화려한 색유리(왼쪽), 가톨릭 행사에 참여한 소녀. 동티모르에는 지역 곳곳 마다 성당이 있으며, 성인 탄생 축일 행사등 종교 행사가 많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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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 시내의 한 성당 내부 모습.
 딜리 시내의 한 성당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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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사제들, 독립 위해 노력... 벨로 주교, 노벨평화상 수상

동티모르에 관한 일반정보를 보면 국민의 98%가 가톨릭이라고 나와 있다. 이 나라가 포르투갈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던 1975년에 가톨릭교도는 20%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98%가 되었을까?

이는 인도네시아 때문이라고 한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가 포르투갈의 지배에서 벗어나던 해 동티모르를 침공해 그 이듬해 27번째 주로 합병해 버렸다. 이때부터 동티모르의 진짜 비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하거나 죽어갔던 것.

동티모르의 현재 인구가 100만 명 선인 것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 국민들은 인도네시아 치하에서 더 가난해졌다. 국토는 황폐해졌고. 그 흔적은 아직도 동티모르 여기저기에 남아 있어 어딜 가나 쉽게 눈에 띈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사람들이 사용하던 포르투갈어와 테툼어 사용을 금지했고, 종교 역시 강요했다. 동티모르 사람들의 70~80%가 토속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로 하여금 이슬람, 가톨릭, 불교, 기독교, 힌두교 중 하나를 선택해서 등록하도록 했다는 것.

종교가 없는 자는 '신을 부정하는 자', 즉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동티모르 사람들의 80% 이상이 가톨릭교도가 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그 수가 늘었다고 한다. 동티모르의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이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노력한 것도 가톨릭교도가 늘어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벨로 주교를 꼽을 수 있다. 동티모르에서 태어나 신부가 된 벨로 주교는 라모스 호르따와 함께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물론 이들 외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은 많다. 사나나 구스마오 총리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탄압과 암살 위협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벨로 주교는 1996년, 현재 동티모르 대통령인 호르따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딜리 대성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아이들.
 딜리 대성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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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금요일 아침, 다시 이 성당을 찾았을 때,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성당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성당 안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교복이 다른 것을 보니 여러 학교에서 온 학생들인 것 같았다.

일부 학생들은 성당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몇 여학생은 의자에 앉아 차분한 모습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고, 몇몇 학생들은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자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우리에게 던졌다.

이 성당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정확하게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비데오'라고 했고, 우리가 렌트한 차량의 동티모르 인 운전수는 '마이루 비데'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성당의 정확한 명칭은 아닌 것 같다.

택시를 타고 성당 이름을 알려주었을 때 택시기사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참으로 난감하다. 본 것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명칭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지 않는가.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5일부터 15일까지 10박 11일동안 동티모르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태그:#동티모르, #벨로주교, #딜리,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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