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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넘게 일하던 주방아주머니가 그만두었습니다. 주방장이 그만둔다고 하면 전 솔직히 겁이 납니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는 하지만 조선족과 한국인은 확연히 다른 문화 때문인지 서로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만 둔 아주머니도 대여섯 명이 들락거린 이후에 자리를 잡았으니까요.

이번에는 제발 한 번에 딱 우리와 맞는 아주머니가 오길 간절히 바랐지만 역시나 그건 제 꿈일 뿐이었습니다. 요즘은 문 닫은 한국 업체가 많아 사실 조선족 아주머니 인력이 남아도는 실정이지만 그렇다고 서로의 요구에 합당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구인요청을 하자마자 전화는 빗발치는데 오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조선족 아주머니들이 선호하는 조건을 우린 갖추지 못했거든요. 부식재료를 사다주기 때문에 시장 다니는 재미도 없는데다 주방 일을 잘 아는 까다로운 시어머니(?)가 둘이나 있는 우리공장은 항상 2순위랍니다.

무작정 기다릴 수 없으니 일단 일하다 더 좋은 일자리가 생기면 갈 요량으로 오는 아주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그만두면 안 된다. 꼭 다음 사람과 인수인계를 해야 한다. 안 그러면 급료는 3개월 후에 지급한다"고 누누이 설명하기 때문에 일한 돈을 당장 받아가기 위해 그만두는 이유도 참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니 저 또한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말다툼이 생기기도 하지요.

이번에도 별 일 아닌 것으로 문제가 커졌습니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 남편과 외출을 하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새로 온 주방아주머니가 애가 아파서 일을 할 수 없다며 당장에 가겠다는 겁니다. 통화를 하다 보니 심각한 병은 아니고 어린애들이 흔히 앓는 가벼운 병 같습니다. 아이를 공장 숙소로 데려 왔다는 말에 오늘밤은 함께 지내고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자고 설득했습니다.

다음날 시장을 보면서도 마음이 급해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출근한 남편이 인터넷에 구인공고를 올려선지 제 전화기엔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습니다. 급히 주방으로 올라가니 출근 후엔 적막강산인 숙소가 아이의 노는 소리에 소란스럽습니다. 뛰노는 걸 보니 그다지 염려할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아이는 얼굴에 노란 약을 덕지덕지 발랐습니다.

"수두 앓는구나? 병원엔 다녀왔어?"
"네, 병 옮는다고 유치원에서 못 오게 합니다."
"수두가 전염성이 있어서 그래. 뭐 크게 염려할 병은 아니고, 긁지 않도록 조심시켜. 어차피 며칠은 지나야 낫는 병이니까 조급하게 생각 말고. 엄마랑 며칠 같이 있으면 되겠네. 일 못할 만큼 아이 상태가 나쁘진 않구먼."
"애가 유치원엘 못 가니까 할매가 보기 힘들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데리고 안 왔어요."
"그래 잘했어. 아이 키우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는 거야. 눈치 보지 말고 편안하게 데리고 있어. 어차피 돈벌이 할 거면 어디가나 마찬가지야. 저만한 나이에 아플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고, 그때마다 일 그만두겠어? 그냥 우리 집에 있어. 문제 생길 때 며칠 데리고 와 있는 것은 봐 줄게. 애까지 돌보려니 힘이 더 들겠지만 그거야 어쩌겠어? 엄마 된 죄지. 안 그래?"
"네, 어제는 애가 아프니까 그만 제 정신이 아니라 화를 냈어요. 미안합니다."
"그 심정 나도 잘 알지. 그리고 나 애들 참 좋아해." 

엄마와 언쟁하는 모습을 창문으로 보았으면서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 천진스런 아이다. 어찌나 개구쟁이인지 5년이 넘도록 흠집 하나 없던 숙소의 모든 벽을 추상화로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할머니가 도저히 아이를 볼 수 없다고 한 말씀이 이해된다.
▲ 개구쟁이 성호! 엄마와 언쟁하는 모습을 창문으로 보았으면서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 천진스런 아이다. 어찌나 개구쟁이인지 5년이 넘도록 흠집 하나 없던 숙소의 모든 벽을 추상화로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할머니가 도저히 아이를 볼 수 없다고 한 말씀이 이해된다.
ⓒ 고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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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끝내고 나오려는데 아이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고 걱정을 합니다. 설거지 마치고 저녁식사 간단히 준비해 놓고 병원에 다녀오라 했습니다. 제육볶음에 상추쌈만 있으면 모두 좋아하니 여러 반찬 준비할 필요 없다며, 제육볶음은 내가 양념한다고 재료 준비만 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외출복 차림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지금 집에 가야겠다고 합니다.

"갑자기 그럼 어떡해? 그럼 아침에 말했어야지. 구인공고도 다 지웠는데 뭐야 지금. 회사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곳인 줄 알아? 그만큼 편의를 봐줬으면 됐지. 또 뭐가 불만이라 그러는데? 사람 구해지면 그때 인수인계하고 가. 그냥 가버리면 다른 직원들 밥은 어떻게 해? 사장님도 한국 가서 그잖아도 바빠 죽겠는데 정말 짜증나게 왜 그래?"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목청이 커집니다. 내 큰소리에 이 아주머니도 감정이 상했나봅니다.

"그럼 애가 더 심해졌는데도 그냥 있어요? 병원에 다녀오면 늦어서 저녁을 언제 해요? 어제 사모님이 거짓말 한다고 할까봐 애만 보이고 가려다, 오늘 얘기하자고 해서 있었는데 애가 점점 심해지잖아요. 사람 구할 때까지 있으려도 갈아입을 옷도 없단 말예요. 몰라요. 애가 잘못되면 회사에서 책임지세요."

정신없이 퍼부어대고는 사무실 문을 탁 닫고 나갑니다. 전 그저 어안이 벙벙합니다. 저녁을 하기 싫다는 건지, 애 아픈 것이 우리 책임이라는 건지, 도무지 감도 잡을 수 없습니다. 동생도 없이 출고를 해야 해 마음은 바쁘고,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근데 잠시 후 애 아버지가 전화를 해 또 한바탕 퍼붓습니다. 당장 일한 급료 계산해서 보내지 않으면 자기들 방식으로 처리하겠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묵묵히 듣고 있다 그냥 조용히 그러나 아주 쌀쌀하게 "아저씨가 상관할 일 아니니 전화 끊으라" 하고 전화기를 닫아버렸습니다. 

'온 지 겨우 일주일 밖에 안 됐으니 받아야 할 급료가 얼마나 되겠나? 그것 때문에 저러는 거라면 그냥 줘서 보내고 사람 구해질 때까지 내가 하자' 맘먹고 있는데 다시 사무실에 나타난 이 아주머니 태도가 아주 괘씸합니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날 완전히 임금 떼먹은 악덕업주로 몰아붙입니다. 동정적이던 내 마음이 싹 돌아섰습니다. "절대로 못 줘. 맘대로 해봐" 쏘아붙이고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병원 가는 기색이 없어 저녁준비를 하는 줄 알았는데 아이와 방에서 놀고 있습니다. 기가 딱 막혔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팔 걷고 식사준비를 했습니다. 시간이 촉박해 사무실 여직원을 불러 상을 차리게 하고, 밑반찬 찾느라 여기저기 문을 여닫으며 부산을 떠는데도 모른 척 합니다.

제육볶음의 구수한 냄새가 아이의 식욕을 자극한 모양입니다. 아이는 자꾸 주방을 기웃거리고 엄마는 매몰차게 잡아당깁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습니다. 철부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여직원에게 아이 불러 밥을 먹이라 이르고 사무실로 내려왔습니다.

"없이 산다고 그렇게 사람 깔보는 거 아닙니다." 그 아주머니의 마지막 말이 자꾸 걸립니다. '내가 뭐라 했기에? 자격지심이겠지.' 무시하면 할수록 더 귀에 쟁쟁합니다. 이대로 보내면 또 한동안 마음이 불편할 것이 뻔합니다. 마음 불편한 것보다야 몸 고단한 것이 훨씬 낫습니다. 제가 지기로 했습니다.

동네 어귀에 나가서 아이 옷을 한 벌 사왔습니다. 아이와 함께 밥을 먹던 애 엄마가 당황해 합니다.

"괜찮아 얼른 먹어. 밥 먹이고 나서 조심해서 씻기고 이걸로 갈아입혀. 수두는 청결이 중요해. 우리 공장은 어른 옷뿐이라서 동네 가게에서 하나 사왔어. 그리고 갈 준비하고 사무실로 내려와 급료 계산해 줄게. 구인공고 냈으니 사람 곧 올 거야 그때까진 그냥 내가 하면 돼."

사무실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습니다. 다시 주방에 가보니 일을 하고 있습니다.

"뭘 해? 집에 가라니까. 아까는 바쁜데다 무더위에 내가 밥 할 일이 아득해서 그랬는데 나도 밥 잘해. 걱정 말고 가. 아픈 애 보는 엄마 심정이 오죽했겠어. 그리고 나, 사람 깔보고 그런 사람 아닌데…."
"죄송해요. 아까는 애가 더 심해지는 거 같아서 앞 뒤 분간 못하고 제가 막말을 했지요. 아이 데리고 있어도 되면 사람 구할 때까지 있을게요."
"그래? 그럼 내가 고맙지."

자칫 서로 안 좋은 감정으로 헤어질 뻔했는데 화해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실 내가 밥하는 동안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모습에 얼마나 약이 오르던지 그 방의 전원을 꺼버리고 싶었지요. 근데 아이가 재미있게 보고 있어 차마 그러질 못했답니다. 결국 아이 때문에 벌어진 일, 아이로 인해 풀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무슨 오핸들 없겠습니까? 특히나 한국인과 조선족은 같은 언어를 쓰면서 확연히 다른 문화에 오해가 더 많은 편입니다. 조금만 비켜서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못 풀 일도 없는 것을.

주방아주머니와 말다툼 덕분에 '역지사지의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달았습니다.


태그:#조선족 , #주방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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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살면서 오블에 <고단한 삶의 놀이터>란 방을 마련하고 타국살이의 고단함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블로그 운영한 지가 일 년 반이 되었으나 글쓰기에 대해 늘 자신이 없어 좀 더 체계적이고 책임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시민기자 활동을 신청합니다. 주로 사는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주부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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