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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차려입은 여자들이 아침부터 눈에 띈다. 워낙 변두리의 공단 밀집 지역이라서 성장을 한 여성을 만나기 쉽지 않아 의아한 생각이 들긴 하였지만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오후가 되니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아주머니들이 유쾌한 웃음을 웃으며 지나간다. 아무래도 평소와 달라 주방에서 일하는 미남씨에게 소리쳐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오늘이 싼빠푸니지에잖아요."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게 뭐하는 날인데?"
"아! 부녀절 몰라요? 여자들 날이요."
"어, 그렇구나. 오늘이 '세계여성의 날'이네. 근데 여자들이 모여서 어디 가는 건데?"
"아이고, 다들 놀러가는 거지요."

"그래? 중국에선 여성의 날을 중요하게 여기나보지?"
"그럼, 한국은 안 그래요?"
"뭐 요즘은 매스컴에서 짤막한 보도도 하고, 여성단체들이 기념식도 하고 그러긴 하지만 대부분 별 생각 없이 지내지."
"그래요? 여긴 오늘이 여자들 명절이에요."

"하하하 그래서 자기 아침부터 퉁퉁 불었구나?"
"불긴 누가 불어요."
"불은 것 같은데? 진작 말하지 그럼 내 오늘 가게 문 닫고 쉬었을 텐데…."

"오늘 같은 날 장사해야지 왜 문을 닫아요.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면서…."
"장사 안 되니 핑계대고 노는 거지. 어떻게 지금이라도 문 닫을까?"
"됐어요. 이따 저녁에 손님들 많을지 알아요? 그리고 나야 어차피 갈 데도 없는데요 뭐."

부녀절이라서 그런지, 다른 날 저녁 때보다 주문이 좀 많았다. 춘절에 고향에 간 복무원이 돌아오지 않아 주방아줌마가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나도 곁에서 도울 일이 많았다. 아줌마와 함께 주방에서 일을 하는데 가게 문이 열리면서 주방아줌마 남편이 불그레한 얼굴로 들어선다. 아줌마가 반갑게 뛰어나가 맞이하자, 불쑥 꽃다발을 가슴에 안겨주고는 덥썩 끌어안으면서 큰소리로 "동무! 사랑하오"라고 하지 않는가. 

한국의 40~50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또래 조선족 남자들 역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닭살스런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터라, 내 충격은 더 컸다. 더구나 홀에는 식사를 하는 손님들도 있었는데 전혀 개의치 않는 그 용기에 내가 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내 표정을 눈치 챘는지 얼른 포옹을 풀고는 "사모님 죄송합니다. 오늘이 부녀절이라허"하면서 민망해 한다.

"아이고 죄송은 무슨, 보기 좋은데요. 근데 우리 남편은 오늘이 뭔 날인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응수하니 그제야 호탕하게 웃는다. 그런데 그가 얼버무리면서 한 "부녀절이 돼서…"라는 말이 내 신경을 묘하게 자극했다.

여성들이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는 중국 '부녀절'

4년 전 중국살이 초기, 뭔가 독립적인 일을 하고 싶어 작은 식당을 운영하던 중 겪었던 3·8부녀절에 대한 에피소드다. 난 이날에서야 비로소 중국에서 '세계 여성의 날'이 '3·8부녀절', 혹은 '부녀절'로 불리며 성대한 행사가 치러진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 땐 이미 중국살이 2년차로 전 해에도 부녀절을 분명히 지냈을 텐데 기억에 없어 동생에게 알아보니 우리공장엔 결혼한 여성이 없어서 이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부녀절은 초점을 '여성'이 아니라 '아내나 어머니'에 맞춘 기념일이다.

중국, 특히 조선족 사회에서 3·8부녀절은 여성 최고의 날이라고 한다. 연변에선 보통 마을 단위로 여자들이 모여서 노는데 아예 큰 식당을 통째로 예약해서는 먹고 마시며 춤추고, 아주 질탕하게 논다는 것이다. 전에는 노인들과 젊은이가 모두 모여 함께 놀았는데, 요즘은 끼리끼리 따로 노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 촌정부에서는 마을마다 금일봉을 하사하며 촌장이 노는 자리에 나타나 격려도 한단다. 

이날엔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조선족 남정네도 아내를 위해 식사 준비며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에 빨래까지 도맡아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어머니께 감사 편지를 써서 드리게 하는 등 이날을 부녀자들의 명절로 인식하도록 교육한다. 집을 떠나 도회지에서 직장에 다니는 자식들도 이날은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하고 선물과 꽃다발을 보낸다. 그러니 이날만큼은 여성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호강하는 날인 셈이다.

부녀절의 명절 분위기는 대도시보다는 농촌일수록 더 성대하다고 한다. 농촌에서 부녀절을 크게 명절로 즐기는 이유는 이날을 새해 들어 마지막 노는 날로 인식해서란다. 3월8일이 지나면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므로 그 준비로 바빠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도시에서 오히려 더 요란한 모습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기념일을 겨냥한 고도의 상술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 이날 또한 선물을 주고받는 날로 인식되고 있으며, 부녀절을 겨냥한 단체관광도 봇물을 이룬다고 한다.

여권이 상당히 신장되어 있는 중국, 그러나...

여성의날은 1908년 3월8일, 미국 여성노동자들이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에서 기인한다. 독일의 노동운동가인 클라라 제트킨이 제창하여 1910년 3월8일 처음으로 여성의 날로 기념하였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유엔은 1975년에 3월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선포하였고, 우리나라도 우여곡절 끝에 1985년부터 이날을 '세계여성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중국 부녀절의 역사는 우리보다 훨씬 유구하다. 1924년 3월8일 광주에서 행한 중국공산당 제1차 3·8기념회의가 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49년 중앙인민정부에서 3월8일을 부녀절로 제정해 전국의 여성들이 반나절 휴식하도록 결정하면서 정식 기념일이 되었으며, 각종 기념 의식과 축제를 벌임으로써 이날을 명절로 부각시켰다.

중국은 여권이 상당히 신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위관리들의 여성 비중도 매우 높은 편이다. 마오쩌둥이 "하늘을 떠받치는 절반은 여성이다(婦女能頂半遍天)"라며 여성의 지위 향상을 촉구하였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현재 중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같은 동양권인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부녀절을 여성의 명절로 부각시키며 여성권익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면에는 오히려 여성을 더 비하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말 중에 가장 흔한 것이 바로 '싼빠'다. 이것은 '계집' 혹은 '년'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싼빠의 어원이 바로 3·8부녀절에서 온 신조어라고 한다.

겉으로는 여권신장, 속으로는 비아냥

내가 이 말의 어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부녀절이다. 여직원이 한 남직원에게 "오늘이 부녀절인데 선물도 안 주냐?"며 선물을 사달라고 조르자 "오늘 선물 받고 좋아하는 여자들은 모두 머저리다, 제 스스로 싼빠가 되는 거다"하고 응수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여직원이 귀찮게 해서 얼결에 급조한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흔히 쓰는 비속어 '싼빠'란 말이 정말로 3·8부녀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여성을 위한다는 날을 남성들은 여성를 천하게 지칭하는 비속어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여성들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별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그렇다면 중국여성의 지위향상은 자연스런 문화현상이 아니라 관 주도의 억지춘향인 셈이 된다. 아니 어쩌면 여성을 더 쉽게 부려먹으려는 남자들의 잔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관 주도의 여권신장 정책으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의식이 전환되지 않는다면 그 효과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양성평등", "여성 만세"를 외쳐도 속으로 비아냥거린다면 함께 존중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 뿌리 깊은 여성 차별이 하루아침에 해소되긴 어렵겠지만, 관 주도의 정책에 찬물 끼얹으려는 의식만 없어도 그 길이 그렇게 멀고 험하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작년부터 우리 회사에도 결혼한 여성이 많아지면서 여성들의 요구가 늘어나기도 했고, 또 여성이 대다수인 우리공장에서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날을 조촐하게나마 기념하고 있다. 올해는 마침 일요일과 겹쳐 모두 쉬는 조용한 부녀절이 되긴 하였지만, 휴일이라고 나섰던 외출에서 꽃다발 들고 좋아하는 여성들을 만나는 것이 왜 이리 씁쓸한지 모르겠다.


태그:#세계여성의 날, #3.8부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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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살면서 오블에 <고단한 삶의 놀이터>란 방을 마련하고 타국살이의 고단함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블로그 운영한 지가 일 년 반이 되었으나 글쓰기에 대해 늘 자신이 없어 좀 더 체계적이고 책임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시민기자 활동을 신청합니다. 주로 사는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주부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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