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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에 군것질을 하러 교문 밖에 나가지 못해서 밖에 있는 상인들에게 물건을 요구하고 돈을 건네준다. 꼭 우리나라 학생들과 비슷하다.
▲ 학생들 쉬는 시간에 군것질을 하러 교문 밖에 나가지 못해서 밖에 있는 상인들에게 물건을 요구하고 돈을 건네준다. 꼭 우리나라 학생들과 비슷하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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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쓰겠다고요?"

한국으로 꼭 보내야 할 메일이 있는데 파일만 하나 첨부해 보내면 되는 간단한 거였다. 그래서 '아, 그럼요. 그런 건 부탁도 아니지요. 걱정말고 쓰세요!'란 답변을 당연히 기다렸건만 선교사님의 반응은 내 기대와의 접점을 슬그머니 피했다. 선교사님은 칠판에 삼차함수를 풀러 나온 문과생처럼 고개를 아주 살짝 한번 털더니 이내 다시 질문을 해 왔다.

"이메일만 체크하는 건 괜찮은데 서버가 불안해서 보내려면 꽤 버벅댈텐데요? 혹시 첨부파일 보내나요?"
"네, 사진을 보내야 해서요. 그래서 이미 알집으로 줄여 놨습니다."
"사진이라…. 용량이…?"
"20MB 정도?"
"어이쿠!"

얘기를 하면 할수록 선교사님의 표정은 9회말 2사 만루 풀카운트에서 어떤 공을 던져야 할지 고민하는 투수의 표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흔적이 역력했다. 도대체 왜 그러실까? 쿠바의 인터넷 사용요금은 익히 파악해서 잘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호텔에서 시간 당 10불이 넘어가는 건 예사요, 유일하게 정부 관할 하에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에텍사(Etecsa)에서도 시간 당 6~7CUC(약 8불)이었다. 그래서 행여나 부담될까 봐 오래 쓰려고 하지도 않았다.

"혹시 인터넷 사용요금이 비싸다면 사용한 만큼 지불하겠습니다."
"그건 문제가 안 돼요, 그런데…. 일단 한 번 시도는 해 봅시다."

그리고 기다렸다, 기다렸다... 기다렸다

최근들어 집에서 창을 통해 물건을 매매하는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이들 중 나라에 신고를 하지 않고 영업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 거래 최근들어 집에서 창을 통해 물건을 매매하는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이들 중 나라에 신고를 하지 않고 영업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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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인터넷 접근이란 사실 쉽지가 않다. 당연히 정보접근에 대한 차단으로 인터넷 네트워크를 국가가 관리감시하긴 하지만 경제적으로도 아직 일반시민들이 활용하기에는 가격이나 서비스 시설 구비가 확연히 미흡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로그램이 미국에서 만든 XP가 대세인데 쿠바가 대척점에 있는 나라에게 남 좋은 일 시킬리 만무. 그나마 아쉬운 대로 정부는 자국민들의 정보검색은 차단하고 대신 국외 사람들과 이메일로만 접촉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았다.

김 선교사님은 다행히 인터넷 사용 신청을 했는데 이는 영주권 있는 외국인만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 그나마 광케이블도 아닌 전화모뎀에다가 한 달에 60시간만 쓰는 거라고. 요즘 유행하는 현장학습, 체험교육도 중요하다지만 아무런 탈출전략 없이 숨막히는 지식 정보화시대에 이러한 환경에서만 사는 것이 어찌보면 아비투스(Habi-tus, 개인마다 성장하면서 지니게 되는 계층적 권력 차이)의 당연한 귀결은 아닌지.

일단 익스플로어에서 포털사이트에 접속하는 데만 가뿐하게 2분 넘겨주시고, 다시 아이디 로그인 하는 데만 3분 더 걸려 주시는 이 느림의 미학(薇謔).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경구를 몇 번이나 마음판에 음각으로 새기고 나서야 겨우 편지쓰기 창이 열렸다. 잠시 숨을 고른 다음 간단한 내용을 쓰고 파일 첨부 클릭. 그리고 기다렸다, 기다렸다,…기다렸다.

적지 않은 시간차 뒤에 들리는 짤깍 화면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나서 컴퓨터에 재생되는 화면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지게꾼처럼 불안해 보였다. 화면이 다시 메일보내기 정상으로 돌아오고 잠시 조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화면에 뜬 문구.

'남은 시간 10시간 30분'.

뜨악! 의혹을 넘어 경악할 수준이었다. 아무리 느려터진 전화모뎀이라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진정 난 몰랐다.

"이거야 원 답답해서. 대체 쿠바에서 어떻게 사시나요?"
삭막한 버퍼링 현장을 목도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예상대로군요. 그래서 난 한국에서 메일이 오면 첨부파일이 있는 건 아예 그냥 삭제시켜요. 사진 한 장이라도 용량이 크면 미련없이 지웁니다. 서버 자체가 용량을 못 받아서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경우가 다반사거든요."

갑자기 하늘을 뚫은 듯한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거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이 비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 폭우 갑자기 하늘을 뚫은 듯한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거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이 비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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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쩐다? 큰일났다. 모 월간지 잡지사에서 요청한 원고 마감일인데 사진을 보내지 못하면 완전 도로아미타불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초조해졌다. 다른 사고도 아니고 설마 인터넷에서 문제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단 쿠바에서는 인터넷을 따로 찾아 쓰기가 어렵지요. 에텍사가 있긴 하는데 예전에 내가 첨부파일을 보내려고 메일접속을 시도해보니 그것도 USB는 통용이 안 되었거든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음, 호텔로 가기엔 가격도 너무 비싸고 속도도 보장 못하고. 그럼 내가 아는 할머니 댁에 한 번 알아볼게요. 거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학교 바로 앞에서 파는 튀김. 조악한 것 같아도 학생들에겐 인기가 좋다.
▲ 튀김 학교 바로 앞에서 파는 튀김. 조악한 것 같아도 학생들에겐 인기가 좋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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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상황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행여 안다고 해도 이런 시스템으론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이런 급한 상황에서는 역시 오래 체류한 덕으로 현지사정에 밝은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힘이 되는지 모른다. 원래 대책없이 철 없는 사람 주위로 하늘은 그것을 보상해 주기 위해 훌륭한 덕을 갖춘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는데 내 경우가 꼭 그러한 듯 싶다.

"마르따 할머니라고 원래는 할아버지가 한국인으로 이곳까지 이주해 오신 분이 계세요. 그 댁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멋, 외로움, 교양 두른 세련되고 지적인 한국계 할머니

쿠바 주류사회에서 쿠바 내 한인역사와 한국알리기 전도사로 활동 중인 올해 일흔의 마르따 할머니.
▲ 마르따 할머니 쿠바 주류사회에서 쿠바 내 한인역사와 한국알리기 전도사로 활동 중인 올해 일흔의 마르따 할머니.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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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쿠바 내 한인 역사를 재조명하며 한국과 쿠바간의 국제 교류에 일조하셨다는 유명한 한국계 쿠바노 할머니가 있다기에 옛날이야기도 나눌 겸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쿠바 자전거 여행으로 방문한 한국 청년들입니다."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카투리의 꽁지털마냥 살아있는 눈매를 살짝 치켜들어 웃는 멋. 그 사이로 언뜩 스치는 도도하게 포장한 외로움. 교양의 외투를 두르고 손님을 맞는 도회풍의 세련되고 지적인 그녀의 모습은 일흔이라는 나이를 무색케 했다.

마르따(Marta)할머니. 마에스트로 노르말리스타 대학 졸업(철학 석사). 초등학교, 중학교 교사, 대학교 교수 역임. '쿠바 교육훈장', '호세 테이 문맹퇴치상', 'FAR 40주년상(군)' 등등 수상. 어딘지 모르게 살짝 자신감이 엿보이던 그녀의 전적은 과연 화려했다.

역사학자였던 남편 라울(Raul)과 함께 평생을 교직에 몸담으며 특히 자신의 뿌리인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인의 쿠바 이민 역사를 집필하고 알리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행적이 별안간 궁금해졌다. 옆에 통역비서로 준호도 있겠다, 궁금한 점을 몇 가지 질문했다. 그녀는 이런 초보티 나는 질문에 익숙한 듯 표정하나 흐트러짐 없이 간결한 문체로 답을 주었다.

한인 이민사에 관한 책들. 마르따 할머니는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과 자료를 통해 연구한 정보들을 모아 한국과 쿠바에서 쿠바 내 한인역사를 책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 저서 한인 이민사에 관한 책들. 마르따 할머니는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과 자료를 통해 연구한 정보들을 모아 한국과 쿠바에서 쿠바 내 한인역사를 책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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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벌러왔지만 설탕값은 폭락하고 일자리는 없고…

- 할머니, 왜 한국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셨어요?
"부모님께서 한국인이셨지. 아버지께서 초기 이민 30년사를 쓰셨거든. 쿠바에 살면서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하셨어. 한국인으로서 쿠바에 살았던 30년이란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야. 1921년 초 이곳으로 이민자들이 몰려들어 왔는데, 그 때 할아버지는 한국에 남으셨고 할머니는 다른 한국인과 결혼해서 멕시코에 오게 되셨지. 멕시코에서 쿠바에 온 것은 설탕 때문에 경기가 좋아 돈 벌려고 왔는데 그 때가 바로 1921년이었어. 아버지가 세 살 때였지. 아버지의 삶이 곧 쿠바 속 한국인의 역사였던 거야. 그러니 내 아버지를 아는 것이 곧 한국을 아는 것이라 여겼고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 그 때 한국에서 멕시코로 간 이유가 있었나요?
"아버지가 세 살 되었을 때 할머니가 새 남편과 함께 아버지를 데리고 오신거야. 다른 이민조직과 그룹을 형성해서. 원래 멕시코에 온 목적은 부유함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오히려 가난과 맞부딪히게 되었어. 그 땐 그저 부유함을 얻어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었거든."

- 저도 한국인들이 애니깽이라 불리며 고생한 역사를 조금은 알고 있어요. 지난 번에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다녀왔거든요. 노동자로 왔다면 퍽이나 고달펐을텐데. 당시 쿠바에서 한국인의 위치가 어땠나요?

잠시 무언가를 찾던 그녀는 조그만한 통에서 안경을 꺼내 콧잔등에 밀어 올리고는 흐름을 놓친 듯 한 번 더 질문을 요청했다. 그리고는 다시 침착한 자세로 돌아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어 나갔다.

"한국인의 위치? 매번 속고만 살았는데, 뭐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지. 여기 맨 처음 왔을 땐 노동을 위해 왔어. 쿠바가 그 때 설탕을 재배했는데 제법 잘 됐거든. 그 소문을 듣고 준비해서 왔는데 와서 보니까 그 땐 이미 설탕 가격은 폭락했고, 그나마 일자리마저도 얼마 없었지 뭐야. 어찌나 고달팠는지 다른 일을 찾아야 할 정도로 형편이 없었지. 언어는 멕시코에서 배우고 와서 어렵지 않았는데 일이…."

- 그랬구나. 할머니, 할머니께서 어렸을 때 일본이 한국 침략했잖아요. 그건 아셨는지.
"알다마다. 그 당시 발행된 신문을 통해서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접했고, 교육도 받았어. 또 한국 사람들이 정보망을 통해 이런저런 소식을 알려주었거든."

"나? 난 한국인이면서 쿠바인이지"

쿠바에 한인 이민사를 설명하면서 "한국인으로 또 쿠바인으로 이곳에서 사는 것에 대해 만족한다"고 말했다. 한글학교와 책 저술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 한인 이민사 쿠바에 한인 이민사를 설명하면서 "한국인으로 또 쿠바인으로 이곳에서 사는 것에 대해 만족한다"고 말했다. 한글학교와 책 저술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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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중에 잠시 전화를 받던 그녀는 통화가 끝나자 다리를 다시 고쳐 올린 다음 계속 대화의 리듬을 이어갔다.

 - 음, 그럼 할머니는 본인이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세요.
"한국인, 쿠바인 둘 다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잖아. 그분들은 집안에서도 한글을 가르치셨어. 그 열정으로 한글학교도 세우셨고. 그 영향을 받아 나도 계속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또 한인 역사를 연구했던 거야. 또, 다른 사람이 나를 보기에 한국인이라고 보는 것도 있어. 하지만 쿠바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쿠바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해. 그래서 내 안에는 한국과 쿠바의 피가 같이 흐르지."

- 그러시군요. 근데 한국 여행자들은 쿠바에 대한 환상이 큰 거 같아요. 젊은이들에겐 체 게바라가 영웅시 되고 있기도 하고. 또 우리는 자유주의 국가인데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잖아요. 그런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예전에는 쿠바인이나 한국인 모두 가난했지. 하지만 쿠바는 말야, 집이 없는 사람이 없고, 음식도 있고, 다 직업이 있고, 교육도 무료고, 대학 등록금도 정부에서 내주거든. 그 뿐인 줄 알아? 내 딸은 쿠바인이랑 결혼해 스위스에 살고 있는데 나머지 둘째 딸은 스위스에 방문 중이야."

그녀는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보통 사람들은 꿈 꿀 수 없는 해외이주 및 방문을 통해 자신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특권층에 머물러 있음을 은연 중에 내비쳤다.사실 쿠바에서 스위스라면 고쳐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미지의 나라가 아닌가.

"집, 음식, 직업, 대학등록금 다 정부가 주지"

"그리고 난 쿠바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이 중에도 분명 가난한 사람이 있을거야. 그런데 또 아무리 가난해도 텔레비전, 집, 소파는 다 있지. 직업들도 자신이 출세할 수 있는 데서 아무 직업이나 찾을 수 있어. 모든 젊은이들은 대학졸업 여부와 관계없이 직업을 나라에서 주거든. 대학을 공부한 학생들은 전공에 맞는 직업을 주기도 해."

쿠바를 예찬하는 그녀의 주장엔 확실히 이상주의적 쿠바론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제 나는 그녀가 인생의 늘그막에 무엇을 더 갈망하는지 물어보는 일만 남게 되었다.

"글쎄, 난 지금이 행복한 걸? 굳이 한 가지 꼽자면 세계 평화? 호호호. 그냥 개인적으로 스위스와 쿠바에 있는 손자들이 잘 자랐으면 해. 그리고 하나 더 붙이자면 한국문화가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고."

한국의 문화는 한국을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 계속 전해지고 있다.
▲ 풍경 한국의 문화는 한국을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 계속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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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 그 자체가 한인 이민 역사로 설명되는 마르따 할머니와의 이야기. 대화 내내 옛날 옛적 전설을 듣는 것처럼 어찌나 신기함으로 도배됐던지 이야기의 동선을 따라오던 해도 제 분수를 잊어버리고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들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옆에서 계속 전화모뎀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시도를 하시던 선교사님.

"이거 도저히 안 되겠는데요. 도무지 연결이 되지가 않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마저 끊기는 건 아닌지 우울함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난 인터넷 쓰는 걸 거의 체념한 채 마르따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디 정 많은 한국사람 아니랄까봐 고국에서 온 청년들을 속절없이 그냥 보내겠는가.

"저녁 차릴테니 들고 가."

평소 같았으면 일단 괜찮다고 정중히 거절모션을 취했겠지만 어쩐지 저녁이 목적만은 아닌 것 같아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녀로선 언제 또 쿠바의 이 작은 도시에서 한국인을 만나게 될지 기약도 없을 터. 손자 같은 아이들 더는 해줄 건 없지만 그저 따뜻한 한 끼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 꼭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잔상을 보는 것 같다.

어둠속에 사그라지던 촛불, 다시 빛을 내기 시작하고

"드디어 방법을 찾았어요!"

마르따 할머니 가족과의 식사를 마치고 밤중에 선교사님을 다시 찾으니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 섬광처럼 스치는 예지란 바로 제3기관과 제3자를 통한, 말 갖다 붙이자면 '더블 서포트 시스템' 이메일 전송.

방법인 즉 이렇다. 어차피 선교사님과 마르따 할머니 댁에서 인터넷 사용은 이미 물 건너 간 상태다. 그리고 에텍사도 역시 사용불가. 호텔 역시 사용가능 불분명에 이미 시간도 늦었거니와 가격도 비싸 고려 대상 제외. 그런데 단 한 곳이 남아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바로 신학교 컴퓨터실에 해외에 이메일 정도는 전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설치된 것이다. 일단 장소는 결정됐다. 어둠 속에 사그라지던 촛불이 다시 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이제 제3자를 확보해야했다. 제3자란, 그 신학교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요금을 내고 컴퓨터 사용증명을 인증한 사람에 한해서만 일정 시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외부인인 내가 컴퓨터를 쓰게 된다면 명백한 불법행위가 되어 내가 들어가도록 방치한 사람들이 처벌을 받게 된다.

물론 이방인이 함부로 컴퓨터를 손댈 만한 어떤 조항도 없고, 허락도 되지 않는다. 더욱이 선교사님 역시 집에 컴퓨터가 있기에 굳이 학교에 따로 신청하지 않으셨단다. 그래서 물밑 작업으로 연줄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다행히도 컴퓨터실 맞은 편 숙소에서 밤 늦게까지 춤을 추고 있던 한 여학생에게 사정을 설명해 다음 날 메일을 보낼 수 있는 환경을 어렵사리 구축해 놓았다. 거짓말처럼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부디 학교 컴퓨터가 버벅대지 않고 무사히 메일만 전송하면 되는 것뿐. 가끔 메일이 수신되지 않거나 파일을 첨부해서 전송완료 글씨가 떴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전혀 파일이 전송되지 않은 경우가 흔하디 흔하다는 것이 불안한 걸림돌이었다(이것은 후에 쿠바 아바나에서 현대 직원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난 20MB 되는 파일을 4개로 다시 분리했다. 그리고 선교사님 USB에 파일을 저장시켜 넘겨주었다. 내가 컴퓨터 실에 출입하지 못하니 대신 처리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 때서야 막혔던 숨을 한꺼번에 풀어 뱉을 수 있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일을 쉬이 포기하지 않고 해답 찾기에 골몰했더니 역시 못할 건 없었다. 또 한 번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이 밤 아주 푸근한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하얀 색의 단정한 셔츠와 단아한 미소가 잘 어울린다.
▲ 학생들 하얀 색의 단정한 셔츠와 단아한 미소가 잘 어울린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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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걱정 반 기대 반 김 선교사님을 찾았을 때 선교사님의 표정을 보며 난 직감했다.
'됐어!'
"학교 컴퓨터가 예상외로 굉장히 빠르더라구요. 여러 곳에 나누어서 메일전송을 했더니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전송 완료했습니다."
"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참 다행이었다. 사탕 앞에 아이처럼 표정관리도 되지 않았다.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은 것 마냥 위로와 감사가 될 정도였다. 그 메일이 상호 간에 신뢰를 바탕으로 보내는 것이었기에 더욱 조바심을 냈다. 이젠 상대방에게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에 맘 편히 남은 일정을 계획대로 진행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2주 후 받은 이메일에는...

첫 날 라면을 대접해 주고, 인터넷 사용에 숙소까지 도와주셨다. 우리는 감사의 대한 답례로 다른 분들을 위해 써 달라며 소정의 도네이션을 하고 헤어졌다.
▲ 선교사님 가정 첫 날 라면을 대접해 주고, 인터넷 사용에 숙소까지 도와주셨다. 우리는 감사의 대한 답례로 다른 분들을 위해 써 달라며 소정의 도네이션을 하고 헤어졌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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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지막으로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서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만 하루 동안 처음 만난 두 청년에게 아낌없는 보살핌과 도움을 주신 것에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걸음 전에 선교사님께 봉투를 내밀었다. 그 어떤 대가에 대한 것이 아닌 이 작은 마음이 쿠바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에 써 달라는 진정어린 순수함이었다.

준호와 나는 혹시나 이것이 '사랑'이 아닌 '자신의 의'가 될까 봐 이것을 놓고 같이 깊은 대화와 기도를 나누었다.

"아닙니다, 됐어요. 오히려 우리가 더 도와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네요."
"선교사님, 이건 선교사님께 드리는 게 아니라 선교사님 하시는 일에 써 달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쿠바노들을 위해 뜻있게 써 주십시오."

햇살 좋은 낮, 지난 밤 쌓아놓은 모든 걱정을 깃털처럼 바람에 실어 파란 하늘에 날려버린 채 우리는 쿠바 최고의 국제휴양도시라는 바라데로를 향해 핸들의 방향을 선회했다. 모든 게 잘 되었다, 모든 게 성공했다는 뿌듯함이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했다.

그로부터 2주 후. 일정을 모두 마무리 한 뒤 아바나로 돌아와 메일에 대한 답장을 뒤늦게 체크했다.

"문종성님, 여행은 잘 하고 계신지요? 보내주신 메일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파일이 일부 손상되었습니다. 어떤 것은 아예 파일첨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파일을 첨부해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 마이 갓! 이 죽일 놈의 쿠바 인터넷!"

조금의 의심도 없었던 20MB의 도전은, 아아! 결국 모니터에 눈물을 흩뿌리며 좌절로 끝나 버렸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쿠바, #세계일주, #문종성, #자전거, #세계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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