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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처와 딸과 함께 만 4년 가까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늦깎이 유학생입니다. 올해 초, 만 5살 딸의 예방주사 4대 비용으로 400달러(40만원)에 가까운 거액을 지불하는 속쓰린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본인의 잘못도 크지만, 앞으로 한국의 의료 보험 시스템이 민영화로 넘어가는 과정 혹은 그 이후에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기에, 어찌 된 일인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싼 보험도 3인가족 기준 연 205만원

저는 학교와 협약을 맺은 보험에 들어있는데 해당 보험사는 기초(Basic)-표준(Standard)-확대(Enhanced) 이렇게 3가지 플랜(옵션과 비슷한 의미)을 제공하며, 저는 그 중 가장 저렴한 기초 플랜에 속합니다.

직장을 다니면 고용주가 상당 부분 부담해 보장폭이 넓은 보험에 들 수 있지만, 학생은 본인이 전액 부담해야 하므로, 병원에 자주 갈 일이 없는 대다수 학생들과 그 가족들은 대개 기초 플랜을 구입해 씁니다.

이렇게 가장 싼 보험이라도 자녀 1명인 3인가족 기준으로 연간 2055달러(약 205만원)을 부담해야 하며, 이 치료 등 지정된 분야는 관련 보험을 따로 구입해야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보험이 있다고 안심하고 병원에 갔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으며, 확실치 않은 경우 보험회사에 문의해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와 절차에 대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이렇듯 비싼 보험료 탓에 보험이 없는 미국인들(특히 직장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험을 구입했으면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제가 든 보험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므로 제 정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부담 의료비 넘기 전에는 보험회사 한푼도 내지 않아

보험표의 첫 항목(Primary/Specialists per Office visit)에 나오는 $30 또는 $40는 병원 방문 시 개인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입니다. 이 금액을 제외한 병원비는 보험회사와 본인이 나누어 내는데, 이 중 디덕티블(Deductible)은 매년 시작할 때 보험회사에서 보상해주지 않는 금액으로, 예를 들어서 내 디덕티블이 $500라 하면, 제가 무슨 진료를 받든 제 개인 부담 의료비가 $500가 넘기 전에는 보험회사에서 한푼도 지불하지 않습니다.

그 후 $500가 넘으면 보험회사에서 일정 금액을 내줍니다. 진료를 마친 후 병원은 보험회사에 의료비 지급을 요청하고, 보험회사와 처리한 후에 나머지 개인이 부담할 금액(디덕티블)을 우편으로 환자에게 청구합니다. 보험회사에서 지급하는 돈은 코페이(co-pay)라 부릅니다.

항목별로 보험 지급 금액과 비율을 표시했다.
▲ 기자가 가입한 의료보험의 약관 항목별로 보험 지급 금액과 비율을 표시했다.
ⓒ 양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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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회사와 협의한 병원만 이용 가능

또 아무 병원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험회사와 협의한 병원(In-Network)에 가야 하며, 만약 그 곳에 필요한 장비와 인력이 없어 고치기 힘든 질환이라면 진료 의사의 레퍼럴(referral 진료의뢰서)이란 것을 받아서, 큰 병원에 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만약 병원이 보험사와 협의되지 않은 곳이라면(Non-Network), 일단 자신의 돈으로 병원비를 전액 지불한 후, 보험사에 청구(Claim 클레임)하는데, 이 때는 협의된 병원에서 받을 보험금의 50%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 수중으로 병원비를 보상받기까지 한두 달 가까운 시간이 걸리며, 영수증과 같이 클레임에 필요한 서류가 빠졌다면 더 늦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든 보험과 병원의 협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와 더불어 클레임상의 어려움 때문에 한국에서 구입해 온 유학생 보험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도 수차례 목격했습니다.

약값은 한국의 2~3배... 그것도 자기부담금 빼고

복수의 의료보험에 든 경우(Coinsurance), 25% 내지는 50%만 보상해 줍니다. 약값의 경우 감기약과 같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처방약은 약값에 관계 없이 10달러를 자기 부담으로 내야 하며, 특수한 처방의 경우 보험회사가 지정한 약은 30달러, 지정하지 않은 약은 50달러의 자기 부담금을 내야 합니다.

미국의 약값은 한국의 2~3배에 달할 정도로 비쌉니다. 또 건당 최대 보상금액(5만 달러, 5천만원)과 연간 최대 보상금액(10만 달러, 1억원) 제한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보는 제가 든 보험 내용으로, 보험사 혹은 개별 상품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별 생각없이 예방접종 맞았는데...

올 해 2월 초, 딸의 예방 접종을 위해 병원에 들렀습니다. 대부분 예방 접종은 유학 오기 전에 한국에서 마쳤고, 또 이미 감기나 눈병 같은 질환으로 몇 번 다녀온 적도 있기 때문에 보험이 잘못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 후 보험회사에서 날아온 문서에는 제가 든 플랜으로는 예방접종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끔찍한 소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곧 병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청구서가 날라왔습니다. 3장을 보기 좋게 편집한 것이라 바탕색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예방 접종 항목과 진찰비, 보험 회사의 할인 금액이 표시
▲ 병원 청구서 예방 접종 항목과 진찰비, 보험 회사의 할인 금액이 표시
ⓒ 양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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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된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방접종 비용은 각각 ① DTP $38, ② MMR $62, ③ 소아마비 $40, ④ 수두 $108 였고, 의사의 몫으로 청구된 부분은 맨 위의 $139,  $17, 그리고 $48 입니다. 한 번 병원 방문에 왜 진료비가 세 번이나 청구되는지에 대해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한꺼번에 4대 접종을 한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보험회사가 해준 것은 개인이 내야 할 몫인 디덕티블에서 조금 깎아준 것뿐이었습니다. ($9.71, $3.15, $15.79, $3.22, $22.19) 물론 보험회사에 지급 책임이 없으니, 평상시보다 덜 깎았더군요. 결국 처음 방문 당시 $30와 청구서의 $367.94를 합한 $397.94를 4대의 예방 접종비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깎아줄 것을 부탁했으나 "사정은 딱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보험회사랑 상의하라"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중에 오래 사신 분들로부터 보건소 비슷한 곳에서 종류에 관계없이 1건당 $10에 맞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나니 더 힘이 빠졌습니다.

이렇게 부담하지 않아도 될 비용을 지불하게 된 데에는 확실히 알아보지 않은 제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글을 통해 아셨겠지만 미국의 민간의료보험 체계는 국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불편한 데다가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일원화된 운영 주체가 없으니, 회사마다 절차가 다르고, 우습게도 어떤 병에 걸릴지 미리 예상해 보험을 구입해야 합니다. 게다가 보험료의 소득별 차등 징수로 가져오는 소득 재분배 효과도 없습니다. 물론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병원은 있습니다만, 시설이 낙후하고 서비스의 질도 떨어지며 많이 기다려야 하기에 꺼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국내에 민간의료보험이 활성화되면 고소득층이 가장 큰 혜택을 받게 됩니다. 인기 있는 의사들은 영리병원을 설립해 높은 진료비를 요구하고, 보험사들은 소위 '상위 1%를 위한 보험상품'으로 부유층 대상의 차별화된 의료 서비스 시장을 공략할 것입니다.

병원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줄어들고, 경우에 따라 이전보다 보험료를 덜 낼 수도 있으니, 부유층으로서는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빠져 나간 만큼 서민 대상의 국가 의료 보험 재정은 열악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시장 경제 입니까?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되면 고소득층이 가장 큰 혜택

또 한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민간보험 도입이 초래할 혼란과 이에 대한 정부의 서민 보호 대책입니다. 제 경우처럼 엉뚱한 보험을 구입해서 이중으로 손해 보는 사람이 안 생길까요?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 용어 투성이의 보험 약관을 노년층이나 저학력자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미국 병원의 경우 응급 환자는 보험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반드시 치료하거나 혹은 다른 병원을 소개하게끔 되어 있습니다만, 국내 병원에서 신분 확인이 되지 않거나 지급 능력이 없는 환자를 문전박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현실은 어떻게 해결할 건가요?  

제 친형이 국내 대기업 S생명의 실손 보장형 질병보험에 들어 있습니다. 올해 초, 가족끼리 온천을 다녀온 후 만 3살의 조카딸이 '요로감염'이란 질병을 앓고 종합병원 2인실에 입원했습니다. 그러나 약관 뒷면에 찾기 어려운 작은 글씨로 '여아의 비뇨기 계통은 보상하지 않는다'고 고지하였고, '일반 병실요금만 지급한다'면서 병실 비용 지급을 거부하였습니다. 종합병원에서 일반실을 구하기 어려우니 일반실에 해당하는 비용이라도 보상해 달라고 하였으나 끝내 거부하였습니다.

민간회사에 국민 건강권 맡길 수 없어

민간회사는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합니다. 통계학을 이용하여 감염 비율이 높은 질환을 보상 범위에서 제거하거나, 혹은 약관에 들어 있더라도 소송까지 불사하여 보험 가입자들을 괴롭히는 보험사들의 횡포를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하여 어렵지 않게 보아왔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병원 자주 가야 할 사람은 보험회사에 사정해야 겨우 받아주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들이 변화가 싫어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내 의료시스템은 장기간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저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저도 3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이 치료 등으로 병원을 집중적으로 이용하였는데, 미국 병원비와의 차익이 비행기 값을 뽑고도 남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현 정부의 광범위한 공기업 민영화 정책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소중한 권리 행사를 포기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을 톡톡히 깨달았으리라 확신합니다.

덧붙이는 글 | 딴지일보와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http://blog.daum.net/serahabba)에도 올렸습니다.



태그:#민간의료보험, #의보민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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