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명박식 보릿고개, 남도식 보리밥으로 날려버리자
▲ 남도식 보리밥 정식 이명박식 보릿고개, 남도식 보리밥으로 날려버리자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나는 뜨끈뜨끈하고도 달작지근한 보리밥이다
남도 끝의 툇마루에 놓인 보리밥이다
금이 가고 이 빠진 황토빛 툭사발을
끼니마다 가득 채운 넉넉한 보리밥이다
파리떼 날아와 빨기도 하지만
흙 묻은 입 속으로 들어가는 보리밥이다
누가 부러워하고 먹으려 하지 않은
노랗디 노오란 꺼끌꺼끌한 보리밥이다
누룽지만도 못하다고 상하로 천대를 받는
푸른 하늘 밑에 서러운 보리밥이 아닌가
개새끼야 에그후라이를 먹는 개새끼야
물결치는 청보리밭 너머 폐허를 가려면
나를 먹어다오 혁대를 풀어제쳐
땀나게 맛있게 많이 씹어다오
노을녘 한참 때나 눈치 채어 삼키려는
저 엉큼한 놈들의 무변의 혓바닥을 눌러앉아
하늘 보고 땅을 보며 억세게 울고 싶은데
아이구머니나, 어느 흉년이 찾아 들어
누가 참 오랜만에 나를 먹으려 한다
보리밥인 나를 어둑어둑한 뒷구멍으로
재빨리 깊숙이 사정없이 처넣더니
그칠 줄 모르는 방귀만 잘 새어나온다고
돌아서서 다시 퉤퉤 뱉어버린다

- 김준태 '보리밥' 모두

그곳에 가면 고향이 가물거린다
▲ 낙안읍성 그곳에 가면 고향이 가물거린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낙안읍성 들머리에 가면 남도식 보리밥 전문점이 있다
▲ 낙안읍성 보리밥집 들머리 낙안읍성 들머리에 가면 남도식 보리밥 전문점이 있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오뉴월 보릿고개 철이 다가오면서 보리밥이 사람들의 입맛을 끌어당기고 있다. 보리밥은 예로부터 가난한 서민음식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에는 보리밥이 별미가 되어 쌀밥과 같은, 혹은 쌀밥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식탁 위에 오르고 있으니, 예전의 꺼끌꺼끌하고 먹기 싫었던 그런 흉한 보리밥이 아니다.   

1960~1970년대. 나그네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 마을 사람들은 끼니 때마다 시커먼 보리밥을 식탁 위에 올렸다. 간혹 재수가 좋은 날에는 그 보리밥 속에 하얀 쌀알이 서너 개 섞여 있기도 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이 늘상 먹는 보리밥은 시커먼 꽁보리밥 그 자체였다. 게다가 밑반찬도 거의 없었다. 간장, 된장 한 종지와 김치, 나물 두어 가지가 모두였다.

그때 우리 마을 사람들이 보리밥을 먹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아침저녁에는 대부분 보리밥에 된장국물과 묵은지, 나물 두어 가지, 고추장을 넣고 쓰윽쓱 비벼먹었다. 하지만 점심 때에는 금방 떠온 시원한 우물물에 보리밥을 말았다. 그리고 물에 만 보리밥을 한 입 가득 떠 넣은 뒤 매콤한 풋고추를 된장에 푸욱 찍어 우두둑 우두둑 씹어 먹었다.   

갖가지 나물 예닐곱 가지에 달걀프라이까지 얹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어 쓰윽쓱 비벼먹는 요즈음의 쫄깃한 보리밥, 씹으면 씹을수록 달착지근한 맛이 솔솔 배어나는 별미 보리밥이 아니었다 그 말이다. 게다가 그때에는 식량도 아끼고 보리밥의 꺼칠꺼칠한 맛을 없애기 위해 미리 보리를 한 번 삶은 뒤 다시 밥을 했다. 말 그대로 보리쌀알이 퉁퉁 불어터진 그런 맛없는 보리밥이었다는 것이다. 

남도식 보리밥 정식을 시키면 밑반찬이 열 가지가 넘게 나온다
▲ 보리밥 정식 밑반찬 남도식 보리밥 정식을 시키면 밑반찬이 열 가지가 넘게 나온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양푼 안에도 여러 가지 나물이 또 담겨 있다
▲ 보리밥과 양푼 양푼 안에도 여러 가지 나물이 또 담겨 있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에 마을잔치가 벌어진 듯

초가집이 이마에 이마를 맞 대고 있는 순천 낙안읍성에 가면 남도식 보리밥을 아주 잘하는 집이 한 곳 있다. 하지만 이 집은 낙안읍성 들머리에 자리 잡고 있어 낙안읍성의 고풍스런 모습에 눈을 빠뜨린 관광객들이 그냥 지나치기 쉽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입소문을 듣고 그 집을 찾던 나그네도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으니까.

오뉴월 햇살이 너무 따가워서일까. 초가집 마당에 천막을 쳐놓고 대나무 평상을 깔아놓고 있는 이 집에 들어서면 마치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에서 마을잔치가 벌어진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천막 아래 평상 위에도, 초가집 마루 위에도, 초가집 안방에도 온통 보리밥을 즐기는 손님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부엌 문턱이 닳도록 끊임없이 부엌을 들락거리며 보리밥과 막걸리, 밑반찬을 푸짐하게 나르고 있는 이 집 아낙네들의 구릿빛 얼굴. 그 얼굴도 영락없이 어릴 때 고향집 아낙네들의 시골스런 그 표정을 꼭 닮았다. 행여 밑반찬이 떨어질까 눈치껏 손님상을 살피다가 밑반찬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아낙네의 마음 씀씀이도 살갑다.

초가 마당 옆, 텃밭에서 쑤욱쑥 자라고 있는 파릇파릇한 상추와 마악 하얀 꽃을 매달고 있는 고춧대, 커다란 잎사귀를 펼치며 밭둑을 기어가고 있는 호박넝쿨,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시퍼런 부추, 노오란 꽃으로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고 있는 오이, 갸날픈 대롱이에 동그란 파꽃을 피우고 있는 대파. 어릴 때 고향집 풍경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남도식 보리밥은 열 가지 이상의 나물을 넣고 비빈다
▲ 보리비빔밥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나물 남도식 보리밥은 열 가지 이상의 나물을 넣고 비빈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보리밥은 다이어트와 당뇨, 고혈압에도 아주 좋다
▲ 잘 비벼진 보리밥 보리밥은 다이어트와 당뇨, 고혈압에도 아주 좋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보리밥 먹고 방귀 몇 대 뀌고 나모 배가 쑤욱 꺼진다?

"아짐! 보리밥을 먹고 나면 왜 방귀가 자주 나오요?"
"아, 아제는 소화가 너무 잘 되는 것도 걱정이요? 그란 게 옛날 어르신들이 보리밥 먹고 방귀 몇 대 뀌고 나모 배가 쑤욱 꺼진다 안 그란다요?"
"그건 옛날 말 아이요. 요즈음 보리밥이야 원체 영양가 있는 반찬과 함께 먹은 게 방귀 몇 대로 그리 쉬이 꺼질 배가 아니랑게."
"아제가 시방 우리 집 보리밥을 칭찬하는 기요, 탓하자는 기요?"   

초가지붕이 있는 마당 한가운데 쳐놓은 하얀 천막 아래, 대나무 평상 위에 앉아서 먹는 막걸리 한 주전자와 보리밥 한 그릇. 이 집 보리밥(5천원)의 특징은 직접 텃밭에서 농사 지은 채소로 버무린 맛깔스런 밑반찬이 열 가지가 훨씬 넘게 나온다는 것이다. 콩나물, 호박나물, 시금치나물, 버섯나물, 양념게장, 꼬막, 멸치무침, 도라지무침, 미역무침, 된장국, 메추리알 등이 그것. 

게다가 보리밥을 비벼먹는 양푼 안에도 달걀프라이, 무채나물, 콩나물, 김무침, 도라지나물 등이 수북이 들어 있다. 달착지근한 누룩내가 훅 풍기는 막걸리 한 사발 꿀떡꿀떡 마신 뒤 쌀알이 반쯤 섞인 보리밥을 그대로 양푼에 엎는다. 이어 된장국물과 여러 가지 나물들을 골고루 집어넣은 뒤 고추장과 참기름을 뿌려 쓰윽쓱 비비기 시작한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맴돌면서 보리밥을 채 다 비비기도 전에 입에 고인 침이 꾸울떡 넘어간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느껴지는지 주변 손님들의 눈치까지 보아야 할 정도다. 누군가 비빔밥은 젓가락으로 비벼야 밥알과 나물이 으깨지지 않아 맛이 있다고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보리밥은 숟가락으로 쓰윽쓱 비비는 재미가 그만이다.    

보리밥을 시키면 양념게장은 그냥 딸려 나온다
▲ 양념게장 보리밥을 시키면 양념게장은 그냥 딸려 나온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보리밥은 수북하게 떠야 제맛이 난당게

"요새 보리밥이 다이어트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새파랗게 젊은 여성들도 보리밥을 즐겨 찾는당게."
"당뇨와 혈압, 각종 암 등에도 보리밥이 그만이랍디다."
"그라이 옛날 어른들은 보리밥을 고봉으로 두어 그릇씩 먹고도 배가 나오거나, 병에 걸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이요. 아따~ 아제 혼자만 마시지 말고 나도 한 잔 주씨요."
"옛소! 그렇찮아도 막걸리에 보리밥 한 그릇을 어찌 다 먹나 걱정했는디. 막걸리나 보리밥을 남기고 가면 해꼬지 할 것 같기도 하고."

달착지근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나는 막걸리 한 사발을 후루룩 마신 뒤 잘 비빈 보리밥을 한 숟갈 뜬다. 그때 아낙네가 잽싸게 숟가락을 뺏더니 보리밥을 수북하게 뜬 뒤 "보리밥은 요렇게  먹어야 제맛이 난당게"라며, 수저를 손에 쥐어준다. 애호박만큼 크게 뜬 보리밥 한 수저를 입에 넣자 볼이 미어터질 듯하다.

그렇게 몇 번 우물우물거리자 향긋한 나물의 맛과 꺼칠꺼칠한 보리밥의 맛이 어울려 씹을 틈도 없이 그대로 꾸울꺽 삼켜진다. 다시 보리밥 한 수저를 떠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혓바닥 곳곳에서 톡톡 터지는 보리쌀알의 달착지근한 맛이 일품이다. 가끔 집어먹는 양념게장과 가끔 떠먹는 된장국물의 맛도 끝내준다.   

그렇게 보리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뚝딱 먹어치우자 배가 빵빵해지면서 이 세상 근심걱정이 저절로 사라지는 듯하다. 오뉴월의 눈부신 햇살에 졸음이 스르르 밀려온다. "아, 졸리면 한 숨 자고 가씨요. 누가 탓할 사람은 없은 게"라는 아낙네의 말이 초가지붕 위에 가물거리는 아지랑이처럼 아득하게 들린다.  

이 집 된장찌개의 맛도 끝내준다
▲ 된장찌개 이 집 된장찌개의 맛도 끝내준다
ⓒ 이종찬

관련사진보기


끊임없이 치솟는 물가와 미친 소 완전 개방 등으로 이 세상살이가 뒤숭숭할 때면 남도 보리밥 한 그릇 먹어보자. 이에는 이, 칼에는 칼이라 했던가. 물가, 미친 소가 날뛰는 이번 이명박식 보릿고개에는 남도식 보리밥 한 그릇 먹으며 이 세상 모든 보릿고개를 깡그리 날려보는 것은 어떨까.   


태그:#보리밥, #동문고향집, #낙안읍성, #초가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