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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는 민주화 이후 오히려 담론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이슈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아예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거나 간혹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갈등만 증폭되는 현상도 보입니다. 담론의 복원을 위해 어느 때보다 건전하고 창의적인 언론활동이 요청되는 시기입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매체창업 또는 칼럼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우리사회의 건전한 담론형성과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해온 분들이 진행하는 '저널리즘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들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이 쓴 기사를 이번 학기에는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기자 주>

그가 걸어온 '기자의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 강의 중인 장명수 고문 그가 걸어온 '기자의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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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의 어느 봄날, 한국일보 기자 장명수는 서울시청에서 군정(軍政) 관계자로부터 검열 받은 신문대장(예비인쇄판)을 들고 회사로 향하다 시위대에 막혀 골목길로 밀려들어갔다.

"마감시간은 다 됐는데 회사로 갈 길은 막막하고, 빼야할 기사에 검은 줄이 죽죽 그어 진 대장을 들여다보니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왜 이렇게 기자하기가 힘드냐고, 최루탄을 핑계 삼아 태어난 뒤 제일 서럽게 울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써야 잡혀가지 않을까'를 고민해야 했던, 그래서 '비겁하게 살아남기도 쉽지 않았던' 그 시절을 버티며 장명수와 동료들은 '언론 자유만 주어진다면'을 되뇌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부끄럽지 않은 신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엄혹한 시대가 지나가고, 정치적 자유가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이 확대된 지금도 45년차 언론인 장명수는 여전히 부끄럽다. 독재정권이 사라진 자리에 재벌이라는 광고주가 대신 '검열관 노릇'을 하고 있고, 장삿속에 빠진 언론사들의 선정주의와 사실 왜곡은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이 개최한 '저널리즘 특강'에서 '기자의 길, 신문의 사명'을 주제로 강연한 장명수 한국일보 고문은 "자본의 압력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 진실한 보도로 독자의 신뢰를 되찾는 일이 이 시대 기자들의 숙제"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사장으로서 경영을 맡아 고민했던 그가 '광고주의 압력'을 얘기할 때, 그 무게는 예사롭지 않았다.

"요즘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삼성을 때리다가 삼성이 광고를 안 줘 어려움을 겪고 있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판 기사를 쓸 때 재벌의 눈치를 안 보는 신문이 없습니다."

광고를 무기로 언론을 통제하는 재벌의 입김은 군사정부의 억압에 이어 언론을 '제 2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할 만큼 심각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펜을 부러뜨리는 정치권력 대신 펜을 길들이는 자본권력 앞에서 기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기자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맞서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신문 지면의 주인은 독자이며, 기자는 독자를 위해 기사를 쓴다는 정신을 단호히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 고문은 광고주의 압력 못지않게 정파에 따른 사실 왜곡과 선정주의도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언론의 자유는 진실을 마음대로 왜곡하라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간 대립이 격해지면서 기자들이 자기 신문의 논조에 맞춰 취재를 하고, 논조와 맞지 않으면 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또 신정아 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위해 유언비어와 누드사진까지 지면에 올리는 선정적 보도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걱정이다. 진정한 '언론 자유'와 '신뢰 회복'을 위해 한국 신문이 가야할 길이 멀다고 강조하는 그의 목소리는 감기 탓에 종종 갈라지면서도 비장했다. 

'미스 장'이라 불렸던 장칼

장명수 고문은 강의 내내 '언론의 자유'와 '신뢰'를 강조했다.
 장명수 고문은 강의 내내 '언론의 자유'와 '신뢰'를 강조했다.
ⓒ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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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가 걸어온 '기자의 길'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억압된 언론 자유 뿐만이 아니었다.

1963년 한국일보 16기 수습기자로 출발한 뒤, 종합일간지 사상 첫 여성 주필과 사장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만들어간 그이지만,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 뒤에는 가시덤불을 맨 손으로 헤쳐 가는 아픔이 있었다.

'창경원'이 여기자들의 유일한 출입처였던 시절, 그는 회사에서 '미스 장'으로 불렸다. 출근하면 "미스 장, 커피!"라는 부장의 주문에 큰 주전자로 물을 끓여 부서 전체에 커피를 돌리기도 했다. "미스 장은 신문사를 얼마나 더 다닐 건가?"란 편집국장의 물음에 '큰맘 먹고' "5년이오"라고 했다가 "5년이나 다닌다니 기특하다"는 얘길 들은 일도 있다. 여기자가 결혼하면 그만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 이었다.

그런 '미개한' 시대에 기자 장명수를 버티게 한 것은 오로지 글에 대한 열정이었다. 전쟁 직후 모든 것이 궁핍했던 중학교시절, 우연히 '거울'이라는 학교신문을 보고 매료돼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의 첫 졸업생으로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문사의 문을 두드렸던 터였다.

선배들의 문장을 베껴 써 보면서, 국어사전을 품고 다니면서 글을 갈고 닦았던 그에게 어느 날 드문 기회가 주어졌다. '여기자칼럼'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고정칼럼을 쓰라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그는 죽을 힘을 다했다.  

그러나 그가 칼럼의 소재를 '여성스러운' 생활문화에서 정치 쪽으로 확대하자, 사내에서 엄청난 견제가 쏟아졌다. '정치부도 거치지 않고 무슨 정치 칼럼이냐' '한국일보가 웃음거리가 된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나는 정치를 모르기 때문에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칼럼을 쓸 것'이라고 고집했다.

정계에 아는 사람이 없어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았고, 여자이기에 학연과 지연으로부터도 자유로웠던 장명수의 정치칼럼은 곧 독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우리가 정말로 궁금하고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을 속 시원하게 써 준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장칼'은 그렇게 탄생했다. '장명수 칼럼'의 줄임말이자 칼날처럼 날카롭다는 의미를 담은 칼럼니스트 장명수의 별명이 '장칼'이다.

그렇게 글을 통해 명성과 신뢰를 쌓아갔지만, '여기자' 장명수는 여전히 회사의 차별에 눈물을 삼키는 처지였다. 그는 늘 남자 동기들 보다 1년쯤 늦게 승진이 되었다. 동기를 부장으로 '모시고' 차장으로 일하느라 인고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어찌어찌 부국장까지 올라간 뒤에는 남자 후배 7명이 자신을 넘어 편집국장이 되는 9년 동안 '사무실의 붙박이 책상처럼' 자리를 지켜야 했다. 선후배 서열이 엄격한 신문사에서 그 9년은 단 하루도 개운한 마음으로 출근한 적이 없는 자기모멸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는 글'을 자존심처럼 지키며 그 세월을 견뎠다. 그리고 살아남아 꽃을 피웠다.

 "어느 날 사장이 나를 불러 주필을 시키겠다고 하더군요. 편집국장도 해 보지 못한 처지라 너무 놀라서 '정말이세요?'라고 두 번을 거듭 물었습니다. 그리곤 사장실을 나와서 왜 그렇게 바보처럼 되물었을까 후회했습니다. 차별에 대해 늘 분개했지만, 나 스스로도 여성은 주필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차별적 사고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 했습니다"

그는 "부장까지를 한계로 생각하는 사람과 최고경영자까지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다"며 예비 여기자들에게 '무한도전의 정신'을 당부했다. 실력으로 버티고, 타협하지 않으면 어떤 편견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국어사전을 챙겨라"

언론인이 되고 싶어 세명 저널리즘스쿨에 왔다는 예비 후배들에게 장 고문은 애정 어린 충고를 쏟아 놓았다. "단순히 뉴스를 전달하는 리포터(reporter)가 아니라, 진실과 시대정신을 글에 담는 저널리스트(journalist)가 돼야 합니다."

물 위에 삐죽 나온 빙산의 한 부분만을 보고 '사실(facts)'이라고 흥분할 것이 아니라, 수면아래 감춰진 거대한 진실이 무엇인지를 파헤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감춰진 진실'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호기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쉽고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하려면 욕심 많은 글쟁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설가 신경숙이 오정희의 글을 필사했던 것처럼 빼어난 선배의 글을 옮겨 써보며 배우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우리말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습기자들에게 매번 말한다고 한다. "책상 위에는 언제나 국어사전을 챙겨둬라."

무려 9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지난해까지 47년간 백악관을 출입한 88세의 미국 여기자 헬렌 토머스. 그의 별명은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불독'이다. 여성으로서 첫 백악관 출입기자 협회장을 지낸 '불독'과 '장칼'은 기자직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장 고문은 "정계로 나가는 징검다리 등으로 언론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으면 언론이 독자의 믿음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어제까지 신문에 정치기사와 논설을 쓰던 사람들이 정치권에 자리를 얻어 줄줄이 나가는 것을 보면 독자들이 신문의 공정성을 믿겠느냐는 것이다.

 "기자는 고된 노동이 따르지만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만 판단은 늘 혼자 해야 하는 고독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기자를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 보세요. 힘들어도 평생 이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기자의 길을 선택해야 우리 언론에 희망이 있습니다."


태그:#저널리즘스쿨, #장명수, #한국일보, #기자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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