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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뻗은 신라의 명작, 중앙탑

 

 

충주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중앙탑을 꼽을 수 있다. 중앙탑, 본디 중원탑평리7층석탑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하겠지만, 이를 많은 사람들이 중앙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기준이 아닌 신라시대의 기준으로 국토의 중앙에 뻗어 있는 탑이기에 그러한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라 하겠다. 후기신라에 세워진 탑으로서 삼국을 통합한 신라의 열정이 가득 담긴, 그야말로 국토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고 시원하게 뻗은 신라의 명작 중 하나이다.

 

중앙탑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충격 그 자체이다. 이렇게 높은 석탑을 일찍이 본 적이 없거니와 그 모양새 또한 말끔하고 늘씬하다. 성숙한 탑의 형식이 잘 살아있고, 하늘로 승천하려고 웅비하는 모양새이다. 중앙탑은 주위의 지대보다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웅장함과 장중함은 다른 탑과는 차원이 다르다.

 

중앙탑은 너무 가까이에서 보기보다 약간 떨어져서 보는 게 낫다. 중앙탑이 자리잡은 자그마한 언덕에 올라가지 않고 그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중앙탑의 위엄이 좌중을 압도한다. 그리고 중앙탑이 있는 작은 언덕에 서 있는 사람과 그 크기를 비교해서 바라보면 과연 이 탑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게 정녕 1200여 년 전에 세워진 석탑이란 말인가!

 

중앙탑을 바라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바벨탑이 떠오른다. 바벨탑이 신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창조되었으나 미완성되었다고 한다면, 신라는 통일 이후 융성하는 국력을 만방(萬方)에 떨치고자 큰 붓으로 글씨를 쓰기 전에 종이에 먹을 찍듯, 그야말로 웅장한 탑을 세움으로써 그들의 업적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한 시도로 보인다.

 

중원 문화를 대표하는 유산인 이 중앙탑은, 신라의 탑 중에서 유일한 7층 석탑이라고 한다.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대체로 8세기 후반 ~ 9세기 초로 파악되고 있으며, 10여개의 크고 긴 돌로 지대석을 마련하고 2층기단을 쌓아올렸다. 탑 전체의 높이는 12.951m이다.

 

1917년 해체하고 복원할 시에 6층 몸돌에서 훼손된 고서류의 일부와 구리거울 2점, 목제칠합과 은제 사리함이 나왔고 기단부에서는 청동합이 발견되었는데, 구리거울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이때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여러 차례 해체복원으로 원형과 달라진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중앙탑의 자태를 살펴볼까요?

 

 

중앙탑은 이층기단으로 된 구조에 7층의 탑신석이 그대로 올라가 있다. 하층기단은 넓적하여 전체적으로 중앙탑의 하중을 받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상층기단은 하층기단에 비해 눈에 띄게 높고 1층 탑신과 비교하여 펑퍼짐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다.

 

중앙탑은 신라시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해서 안정감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다른 석탑은 비례를 잘 맞춘 안정감을 중요시 하였다는 점과, 중앙탑은 시원시원하게 뻗어 있는 모습, 즉 상승감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안정감과 상승감은 약간 비례적이다. 안정감을 강화하면 탑의 몸체가 두툼해져서 상승감이 약간 떨어지고, 상승감을 강조하면 시원하게 뻗은 모습을 강조해야하기에 안정감을 적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앙탑의 높이를 생각하면 꼭 안정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단부를 튼튼하게, 그리고 널찍하게 해 놓아 안정감도 잘 살리고 있다. 그리고 하층기단은 탱주를 3개, 상층기단은 탱주를 4개를 만들어 석재를 튼튼하게 짜 놓았다.

 

이층기단의 상대갑석 위에는 7층의 탑신이 주르륵 펼쳐진다. 초층탑신, 즉 제일 아래에 있는 1층의 탑신석의 경우는 기단부처럼 안정감을 위하여 다른 탑신에 비해 높게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우주 사이에 탱주를 하나 두어, 2층 탑신부터는 탱주가 보이지 않는 것과 약간의 차이를 두었다.

 

옥개받침은 5겹을 만들어 놓아 정연하게 해 놓았다. 고려시대와 신라 말기에 가면 이러한 양상에 변화가 찾아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형된 규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 때문인데, 중앙탑은 그 크기에 따른 무거움 때문이라도 5겹의 옥개받침이 어색하지 않고 그 때문에 더 질서 있어 보인다.

 

중앙탑은 그 크기가 워낙 크기 때문에 돌도 여러 개를 짜 맞추어야 했다. 1층부터 5층까지의 옥개석은 4개로 나눠져 이를 합쳐 놓은 것이고 6층과 7층은 돌 하나를 조각하여 올려  놓은 것이다.

 

옥개석의 끝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이곳에다가 풍경을 꽂아 넣어 바람에 흔들리면 그 소리가 나게 한 것으로서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그러한 풍경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상륜부는 다른 많은 탑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남아있지는 않다. 노반과 복발, 그리고 앙화가 남아 있다. 재미있는 것은 노반이 2개가 겹쳐서 올라가 있다는 것이며 그 위에 복발, 앙화가 있는 것이다.

 

복발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흡사 입술이 달린 대접 2개를 포개어 놓은 모양새이다. 가운데에 난 2개의 줄이 그렇게 보이게 하며, 그 위엔 앙화가 놓여있다. 앙화란 위를 바라보는 꽃잎과 같이 생겼다는 데에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중앙탑의 앙화는 그 모양새가 남자답다라고 표현된다. 중앙탑은 그 자체만으로도 남성미를 보여주는데, 앙화는 굵은 선으로 뻗어 놓았으며, 양 잎 사이에는 하나의 잎이 중앙에 자리 잡아 있다. 네모진 앙화의 모습은 인공적인 느낌이 들지만 중앙탑의 굵은 몸체와 느낌에 잘 어울린다.

 

중앙탑 앞에 있는 흔적

 

 

중앙탑을 보면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중앙탑의 바로 앞에는 돌로 된 무엇인가의 흔적이 보인다. 바로 석등의 흔적으로서, 석등의 하대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중앙탑이 세워질 당시에는 중앙탑만 있었던 것이 아닌, 석등도 있어서 환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석등의 하대석은 연꽃모양을 하고 있으며 복련이다. 앙련이 하늘을 우러러 본다면, 복련은 꽃잎이 아래를 향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석등에서는 이러한 형태가 많이 보인다. 신라시대 사람들은 중앙탑 앞에 서서 환한 석등의 불빛을 조명삼아 거대한 중앙탑을 우러러 보았을 것이다.

 

지금은 간주석은 사라지고 하대석 밖에 남지 않아 쓸쓸하기도 하다. 사실 이렇게 된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비록 세월의 풍파 때문에 사라져버린 것이라 하겠지만, 잊혀져버린 문화재라는 점에서는 씁쓸하다. 중앙탑도 자세히 보면 세월의 풍파 때문인지 이곳저곳 부서진 곳이 여럿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남아 있기에 더욱 당당해 보이는 것이리라.

 

중앙탑은 신라인들의 꿈, 열정, 그리고 열망으로 세워졌다. 그들은 통일된 신라의 모습에 감탄하고 또한 그 열망을 한 곳에 담아 천하에 떨치려고 한 것이다. 충주에 세워졌다는 것도 그 의미가 깊다.

 

충주는 삼국시대 이후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남한강의 상류에 있기 때문에 한강 하류와의 싸움, 즉 백제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게 고구려, 백제, 신라가 충주 땅을 차지하려고 혈전을 벌인 이유였고, 이곳을 점령한 국가는 당시 삼국 간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11월 4일 충주 중앙탑에 갔다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중앙탑, #충주, #신라, #중원탑평리7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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