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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특별전에서 가장 중심되는 나라는 역시 잉카이다. 잉카는 1430년에 세워진 나라로서 1532년에 멸망하기까지 불과 100년밖에 존속하지 않았다. 잉카는 이렇게 생각보다도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국가에 대한 인상이 깊었기에 우리는 안데스문명을 주로 잉카문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잉카라고 부르지 않았다. 잉카는 그들의 통치자를 일컫는 말이었으며, 자신들의 타라를 타우안틴수유(Tahuantinsuyu)라고 불렀다. 이는 4개로 나누어진 제국이라는 뜻으로, 잉카가 제국을 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기 때문에 그러한 명칭이 붙었다.

잉카의 수도는 쿠스코이다. 쿠스코(Cusco)는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으로서 퓨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도시를 중심으로 행정구역을 4개로 나누는데, 동쪽의 안티수유(Antisuyu)와 서쪽의 쿤티수유(Kuntisuyu), 그리고 남쪽의 쿠야수유(Qullasuyu)와 북쪽의 친차이수유(Chinchaysuyu)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다스리는 게 절대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권능을 지닌 잉카의 왕이었다.

거대한 잉카제국은 어떻게 다스려졌나

나무로 만든 원통형 잔으로서 치차 같은 술이나 음료를 마시기 위해 사용되었던 의례용 잔이다. 잔의 표면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기거나 형태를 만들기도 하였다.
▲ 케로 나무로 만든 원통형 잔으로서 치차 같은 술이나 음료를 마시기 위해 사용되었던 의례용 잔이다. 잔의 표면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기거나 형태를 만들기도 하였다.
ⓒ 태양의 아들 잉카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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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는 지금의 페루와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고 있었다. 안데스산맥의 고지와 해안가, 그리고 밀림지대와 사막까지 포함하는 이러한 영토를 지배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 잉카인들은 이러한 지역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었을까?

이러한 영토를 다스리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사회구조와 행정 시스템의 구축, 도로망의 건설 등이 필요하였다. 또한 공통된 언어와 종교가 필요하였으며 이러한 믿음이 기반이 되어야 진정한 지배가 가능하였다. 잉카인들은 이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이러한 사항들을 살펴 볼 수 있다.

잉카인들의 사회구조는 독립 경제 공동체인 아이유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아이유(Ayllu)는 자연적으로 같은 씨족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공동체로서, 외부와 접촉이 없이도 모든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 일종의 씨족공동체집단인 약따(Llacta)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약따들이 모여 지역 동동체인 마르카(Marca)를 형성하게 되며, 이들은 부족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부족공동체는 작은 왕국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잉카시대에 이르러서는 4개 수유의 일원이 된다. 이러한 수유를 책임지는 이를 아뿌(Apu)라고 부른다. 이러한 아뿌들이 유일하게 머리를 숙였던 사람이 제국의 통치자인 잉카였다. 잉카제국은 이런 식으로 고도로 발달된 사회구조가 마련되어 있었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의 공용어를 케추아어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종교는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며 이 외에도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였다. 특히 해안지방의 원주민들이 절대적으로 숭배하였던 빠차까막신, 티티카카호수 주변의 꼬야족들의 신이었던 비라코차 신들도 역시 가장 높은 위치에서 숭배되었다. 잉카인들은 종교에 대해 강요하지 않았으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믿는 신을 자신들의 종교 내로, 즉 태양신보다 하위의 존재로 인정하고 끌어들였다.

잉카의 전성기를 이끈 파차쿠텍 잉카

결승문자라고도 불리우며, 잉카에서 문자를 대신하여 사용하던 것이다. 끈을 묶어 그 매듭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였다.
▲ 키푸 결승문자라고도 불리우며, 잉카에서 문자를 대신하여 사용하던 것이다. 끈을 묶어 그 매듭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였다.
ⓒ 태양의 아들 잉카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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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9번째 왕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잡고 제국으로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의 재위부터 본격적인 잉카 역사로 보고 있다.
▲ 파차쿠텍 초상화 잉카 9번째 왕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잡고 제국으로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의 재위부터 본격적인 잉카 역사로 보고 있다.
ⓒ 태양의 아들 잉카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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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러한 잉카는 어떠한 문자를 사용하였을까? 이들은 우리가 결승문자(結繩文字)라고 부르는 키푸(Quipu)를 사용하였다. 키푸는 다양한 굵기와 색깔의 끈에 여러 종류의 매듭을 서로 다른 위치에 만들어 정보를 기록한 것이다. 흔히 '글'이나 '문장'으로 생각하는 '문자'의 개념과는 꽤 다르지만, 잉카인들은 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노란색 끈은 황금을, 하얀색 끈은 은을, 그리고 붉은색 끈은 군인을 의미하였다. 게다가 감은 매듭의 수를 가지고 1부터 10까지 숫자를 표현, 즉 십진법을 사용하였다. 매듭의 위치에 따라 십 단위에서 만 단위까지 표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키푸를 사용하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매우 적어 특별한 교육을 받은 이만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키푸를 해석하는 전문가를 키푸카마욕(Quipucamayoc)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키푸가 있었기에 잉카인들이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손쉽게 알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키푸만 있다고 해서 제국이 통치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키푸가 서로 전달이 되고 연결이 되어야 비로소 키푸의 제대로 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잉카는 총 길이 38,600㎞에 이르는 거대한 도로망, 즉 잉카의 길(Cápac Nan)을 운용하였다. 이 길은 일반인의 통행은 금지되었지만 차스키(Chasqui)라고 하는 파발꾼이 이용하였다. 잉카제국은 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모든 운송수단은 도보를 이용하였으며, 차스키들은 쿠스코의 지령이나 지방의 정보를 릴레이식으로 전달하였다. 여기에 키푸는 유용하게 이용되었던 것이다.

잉카라는 거대한 제국은 이러한 기틀들이 마련되었기에 넓은 영토를 유지하고, 또한 운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잉카의 전성기를 이끈 건 파차쿠텍 잉카였다. 파차쿠텍 잉카(Pachacutec Inca Yupanqui)는 잉카 신화에 의하면 9번째 왕이지만 페루의 고고학자들은 이 파차쿠텍 잉카를 기점으로 사실상 잉카가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 파차쿠텍은 1438년에 즉위하였으며 8대 왕인 비라코차 잉카(Viracocha Inca)가 다른 아들인 우르코(Urco)를 왕위에 앉히고자 그를 암살시키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파차쿠텍은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쿠스코로 돌아왔고,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고 한다.

쿠스코로 들어온 파차쿠텍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시내를 재정비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파차쿠텍은 진흙으로 자신이 원하는 도시의 모형을 만들었고, 건축가들은 그 모형에 따라 도시를 새로 정비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의 정비도 하였으며 복지 정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내치가 완료되자 그는 서서히 영토 확장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대에는 잉카는 수도로부터 4,000㎞에 이르는 지역까지 안데스의 영토를 지배하였고, 인구는 6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사라진 황금유물, 그 속에 담긴 어두운 역사

스페인 정복자로서 잉카를 정복하고 약탈하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부하의 손에 의하여 암살되어 최후를 맞이하였다.
▲ 프란시스코 피사로 스페인 정복자로서 잉카를 정복하고 약탈하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부하의 손에 의하여 암살되어 최후를 맞이하였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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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으로 만들어진 인물상으로서 잉카인들이 풍요를 기원하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스페인의 약탈로 인해 잉카의 황금유물은 극히 소수만 남아있다.
▲ 남자 인물상 금으로 만들어진 인물상으로서 잉카인들이 풍요를 기원하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스페인의 약탈로 인해 잉카의 황금유물은 극히 소수만 남아있다.
ⓒ 태양의 아들 잉카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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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런 잉카의 황금기는 불과 100년을 넘지 못하였다. 11대왕인 우아이나 카팍(Huayna Cápac)이 갑작스럽게 죽고 나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 그 발단이었다. 당시 스페인인들이 잉카에 상륙하여, 그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으며 또한 유럽에서 건너온 천연두가 창궐하기 시작하였다. 잉카의 멸망은 단순히 소수 스페인인들의 '문명의 진출'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 아닌, 그에 따른 다양한 비극의 씨앗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게 주요 원인이라 하겠다.

내전으로 인하여 잉카제국에는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왕이 명확하게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에 두 파벌 간의 싸움은 심각한 상황으로 번지게 되었으며 일단은 장남인 우아스카르(Huáscar)가 12대 왕이 되었다. 하지만 5년 만에 아타우알파(Atahualpa)가 왕좌를 빼앗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전이 진정된 쯤부터 스페인인들이 잉카제국으로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잉카는 스페인인에게 처음에는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러한 스페인인들의 본심을 알아채는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스페인인들은 계략을 사용하여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았으며 몸값을 요구하였다. 아타우알파는 자신의 몸값으로 자신이 있는 방에서 손을 위로 뻗은 다음, 그 높이만큼 황금을 채워주고, 다른 두 방에는 은을 두 달 안에 채워주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와 스페인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스페인인으로서는 사실 상상 할 수도 없을 만큼의 엄청난 양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아타우알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방에는 금이 가득 쌓이기 시작하였으며, 스페인인들은 좀 더 많은 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러한 금제 유물들을 짓밟고 납작하게 찌그러뜨렸다. 잉카인들은 그들의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저버리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잉카에 대해서는 황금의 제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가 많다. 하지만 정작 이번 특별전에서도 보다시피 금제유물들의 수는 결코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잉카의 역사가 생각보다 짧았다는 점, 그리고 수많은 수탈을 당하였고, 그 주된 대상이 바로 황금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스페인의 욕심은 결국 잉카라고 하는 거대한 안데스문명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하고야 말았다. 인간의 욕심과 그로 인하여 일어나는 수많은 학살과 비극. 이러한 현실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게 아닌, 오늘날에도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으며 잉카의 유물들은 그러한 눈물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국립중앙박물관 태양의 아들 잉카 특별전에 갔다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태양의 아들 잉카, #잉카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 #잉카, #키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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