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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기억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뭇사람들에게 1월은….

이 신년벽두 주옥같은 결심을 낳는 달이라면 그에게 1월은 '광석이형'에 대한 그리움이 한량없이 짙어지는 시간이다. 1월 6일은 김광석의 12주기다. 어느새 십년이 훌쩍 지났지만 긴 세월의 더께를 뚫고 그 날의 아릿함은 새순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그 감정이 꼭 처연한 슬픔만은 아니다. 시큰한 기쁨과 짠한 고마움에 가깝다. 여전히 김광석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수많은 팬들이 있고, 또 새로이 빠져드는 이들이 소리 없이 늘어가기 때문이다.

갈수록 깊어지는 김광석의 존재감과 팬들의 애틋함은 작은 기적을 불러일으켰다. '광석이형 추억하기'는 어느 순간부터 '견뎌야할 시간'에서 '누려야할 시간'으로 변해갔다. 그가 가슴속에 서리서리 접어두었던 낡은 필름을 조심스레 펼친 이유다.

어느새 12주기, 이제야 벽장 속 낡은 필름을 꺼내다


"벽장에 넣어두었던 필름을 십년 만에 처음 꺼냈습니다. 먼지가 '풀풀' 나는 그 필름 속에서 광석이형은 그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참 많이 웃고 있더군요. 제가 사진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 찍은 것들이라 노출도 프레임도 엉망이라 부끄럽지만 이 사진들을 혼자만 품고 있을 게 아니라 그를 아끼고 기억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1월 5일부터 한 달 간, 대학로 복합문화공간 이음아트서점에서 사진작가 임종진은 김광석을 추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제목은 '歌人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 부제는 '임종진의 광석이형 미공개사진전'이다.

그와 김광석의 인연은 몇 차례 진화했다. 처음엔 단순한 팬과 가수의 사이였다. 헤비메탈에 미쳐 가요는 듣지도 않던 청년 임종진에게 김광석은 그야말로 '쓰나미'처럼 다가왔다. 특유의 울림 가득한 음악은 영혼을 뒤흔들었다. 그 뒤로 그는 아무 음악도 안 듣고 오로지 김광석 음악만 들었다. 친구들과 전국일주를 하면서도 '다시부르기 1집'만 내도록 들었는데 질리기는커녕 들을수록 좋았단다.

"그즈음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사진 찍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저는 광석이형의 공연이 있는 날이면 득달같이 달려가 사진을 찍었어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무대 정면에서도 찍고…. 기교나 테크닉도 몰랐죠. 오직 '찍고 싶다'는 마음만 충실해서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그 때 깨달았어요. 사진이 즐거움의 행위이고 누군가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란 것을, 광석이형을 통해 알았습니다."

'사진은 마음의 표현'임을 알려준 광석이형

1993년부터 1000회 공연이 열린 1995년 여름까지 김광석의 팬으로서 공연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여는 사진작가 임종진.
 1993년부터 1000회 공연이 열린 1995년 여름까지 김광석의 팬으로서 공연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여는 사진작가 임종진.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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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광석 사진을 찍은 날이면 암실로 곧장 달려와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조심스레 현상하고 완전히 마르길 애타게 기다리며 떨리는 마음으로 인화했다. 그렇게 먼동이 트는 걸 보며 만든 사진을 그는 김광석에게 보내곤 했다.

그리고 땀과 꿈으로 빚어진 한 아마추어 사진가의 흑백사진은 김광석과의 인연을 조금 더 오붓하게 묶어주었다. 두 사람의 인연 2막은 '그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으로 따뜻하게 시작됐다.

"그 날도 조금 일찍 공연장에 갔고 스태프에게 제 이름을 말하면서 형에게 안부 전해 달랬더니 광석이형이 데려오라고 했다더군요. 무대 뒤에서 만났지요. 광석이형이 사진 참 고마웠다고, 그렇잖아도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잘 왔다고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스타라는 걸 느낄 수 없는 편안하고 소박한 느낌이었어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그는 김광석과 조우하게 된다. 우연히 들어간 홍대 앞 클럽에서 음악에 맞춰 그림자처럼 흐느적거리던 광석이형과 마주쳤던 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커피숍에 들어갔던 일 등, 그는 다섯 차례의 만남이 거짓말 같은 우연으로 성사되었다며 이를 '인연'으로 이름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김광석의 소극장 1000회 공연이 있던 날. 그는 사진기자가 되어 '우쭐한 심정'으로 광석이형을 찾아갔다. 기자가 되었으니 속으론 더 자주 만날 수 있겠구나 싶어 은근히 자랑하려는 속셈이었다.

"헌데 광석이형은 그냥 시익 웃어주고 말대요. '그랬구나' 한 마디뿐이었어요. 그 짧게 보인 얇은 미소가 왜 그리 쓸쓸했는지…. 형의 심정이 이해가 되요. 그냥 처음 마음으로 찾아갈 것을…. 두고두고 후회가 되더라고요."

"형은 누구보다 환한 웃음으로 행복을 노래했다"

"광석이형은 사진이 즐거움이고 누군가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란 걸 알려주었다."
 "광석이형은 사진이 즐거움이고 누군가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란 걸 알려주었다."
ⓒ 임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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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 1000회 공연이 열린 1995년 여름까지. 두 사람은 ‘사진’을 매개로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들의 인연은 김광석의 부재 이후 다시 ‘사진’을 통해서 만개했다. 열정과 의욕만 믿고 날것 그대로의 시선으로 다가섰던 한 순수한 팬의 기록은, 십년 간 부화과정을 거쳐 김광석의 오래된 미래를 오롯이 드러내 주었다. 사진 속의 김광석은 ‘노래하거나 혹은 웃거나’의 모습이다. 빛이 바랬을지언정 '잘 웃고, 누구보다 행복을 바랬던 사람' 김광석의 본래 면목을 그가 살려낸 것이다.

"광석이형의 노래가 슬프다고들 하는데 그는 남들과 다름없이 행복한 삶을 꿈꾸고 권했던 사람입니다. 혹여 이젠 다한 삶이기에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닐까요. 항상 공연 끝에 노래를 들려주고는 질끈 웃으며 '행복하세요'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환한 웃음으로 행복을 노래했다.
 그는 누구보다 환한 웃음으로 행복을 노래했다.
ⓒ 임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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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노래가 허무를 부추긴다는 혐의에 대해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외려 김광석은 섣부른 충고나 위로 대신 실컷 울게 해준다고, 난 너보다 더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가만히 토닥여 준다고, 가슴 밑바닥까지 눈물을 다 토해낸 끝에 결국 개운한 웃음을 짓게 하는 힘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렇다. 김광석은 보편적인 생의 통증을 체화해 노래했다. 하여 삶의 어느 굽이에서 듣더라도 ‘내 얘기’처럼 절절하게 들려온다.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맨밥 같은 영혼의 양식이라고 할까. 그는 나지막이 목록을 읊었다.

"사랑의 상처로 괴로울 때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위로 받고 싶을 때는 '내 사람이여', 나에게 힘내라고 말할 때는 '나무', 늙으신 부모님의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일 때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나이의 무게가 느껴질 때는 '서른 즈음에'.”

커피 한 잔 마주 들면 행복해지는... 그 사람은?

"왜 아직도 김광석이냐"는 물음에 그는 답한다. "김광석은 삶과 사람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담배처럼 언제나 손 내밀면 옆에 있는 친구 같은 존재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자신은 김광석에게 인생을 한 수 배우고, 한 시절 진하게 위로 받은 숱한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란 말도 잊지 않는다.

이번 전시회는 그렇게 김광석을 영혼의 반려자로 삼은 이들과 함께 하는 우정과 기쁨의 향연이다. 결코 숙연한 추모의 자리가 아니다. 푹 젖어들고 싶어서 전시 기간도 길게 잡았다. 한 달이다.

장소는 대학로의 한 서점. 그가 평소 사랑하는 이 공간은 영어교재나 참고서 자기계발류의 실용서는 없다. 인문, 예술 분야의 책과 헌책이 있고 넉넉한 인심의 주인장이 제공하는 맛난 커피와 녹차, 그리고 앉으면 임자인 독서 공간이 마련돼 있다.

책과 책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모퉁이 돌아서는 곳에 김광석의 사진을 걸어둔다. 그는 이곳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책 보다가 고개를 돌리면 있는 사람, 기지개를 켜다가 눈이 마주치는 사람, 커피 한 잔 들고 마주하면 더 행복해지는 사람, 그가 바로 김광석이기에.

누구보다 환한 웃음으로 행복을 노래한 가수 김광석
 누구보다 환한 웃음으로 행복을 노래한 가수 김광석
ⓒ 임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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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 임종진의 '광석이형' 미공개사진전
2008. 1.5 (토) ~ 2.9 (토) 이른 10시 부터 늦은 10시까지
대학로 이음아트(02-745-9758) 혜화역 1번 출구 동숭아트센터 방향 GS25 끼고 좌회전.



태그:#김광석, #임종진, #서른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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