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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명동에 들렀습니다. 명동성당 언덕 지나 옛날 중앙극장 바로 옆에 카페 '마리'란 곳이 있습니다. 여기부터 향린교회 일대 주변지역 상점 11곳은 명동성당 재개발과 금융특화지구 설립을 위한 철거에 맞서 24시간 농성중입니다.

 

사금융센터를 만들려는 거대 금융건설 자본의 횡포에 소상인들이 삶의 터전을 고스란히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싸우고 있습니다. 용산- 홍대두리반- 명동으로 철거투쟁의 지도가 눈물처럼 번져갑니다. 
 

 

지난 19일(일) 오후 3시경에는 급작스레 용역이 들이닥쳐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담요로 덮고는 입구의 유리문을 다 깨부수었다고 합니다. 아비규환의 사태. 트위터에 이 소식이 알려지고 시민들과 홍대 두리반을 지키던 인디밴드, 날날이 외부세력, 활동가들이 모여 밤 늦도록 '기타치고 춤추고' 신나게 놀았다네요. 큰길까지 나와서 춤추고 두드리고 노래하고 토론하고요. 참가자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스탁'으로 변해버린 난장공연판. 아주 재밌었다고 자랑합니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용역. 그들이 휘두른 방망이로 입구 통유리가 깨졌습니다. 자잘한 유리파편이 바닥에 자박자박 깔려있더군요. 흉가입니다. 폐가입니다. 내부를 정리하고 다시 출입문을 만들기 위해 일손이 바삐 움직입니다. 밤샌 친구들은 건너편에서 곤히 잠을 잡니다. 노회찬씨도 간밤에 와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푹 자고 아침에 갔답니다. 이런 아수라장에서 잠을 자도 어색하지 않은 정치인. 이장님 캐릭터. 든든합니다. 

 

제가 갔을 때 이주노조 위원장 '미셀'씨도 와 있었어요. 머리를 짧게 깎은 그는 예의 그 환한 웃음으로 인사하더군요. 이주노동자 영화제 티셔츠를 입었는데, 등 뒤에 새겨진 문구가 눈길을 붙들어맵니다. '그림자에서 인간으로'. 불법체류자 신분인 탓에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그들. 인간으로 거듭나겠다는 존재 선언이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소위 불법인간들. 그 낙인들. 그 잔인한 범주가 점차 이주민에서 자국민으로 확대되는 것 같습니다. 살인 등록금에 저항하고 강제 철거에 항거하고, 불법 해고에 맞서는 '불법 인간'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겠죠. 불가피해 보입니다. 힘 없는 이들은 법대로 살기 전에 '사는 법'을 궁리해야 하니까요. 

 

칠성급 호텔이자 해방구인 철거촌
 

 

하루아침에 누가 와서 쥐꼬리 만한 보상금 던져주고 가게 문 닫으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6월 18일자 <한겨레> 기사에 나온 사연이 구구절절입니다. 9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남편의 보상금과 퇴직금으로 분식집을 차린 김점희(42)씨는 "시행사에서 받은 보상금이라고는 10달치 월세인 1000만 원뿐"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가게 문을 열 때 권리금에다 인테리어 비용까지 1억6000만 원을 투자했지만 이제 김씨에게 남은 것은 월세 보증금 2000만 원을 포함해 2600만 원이 전부입니다. 강제 명도비용 400만 원도 김씨가 부담해야 합니다. 인근 가게들의 사정도 비슷합니다. 모퉁이 식당은 370만 원, 23년 동안 명동을 지켰던 낙원화랑이 받은 보상금도 700만 원이랍니다.

 


두리반도 그랬듯이, 명동 마리카페는 그간 보았던 철거투쟁 현장과는 달랐습니다. 검은 낯빛의 중년 남성들이 빨간 투쟁조끼를 입고 모여 있고 그 옆 봉고차에 달린 메가폰에서는 쇳소리 나는 투쟁가 '철의 노동자'와 '님을 위한 행진곡'이 무한반복으로 울려퍼지는 현장, 그 한없는 쓸쓸함이, 여기는 없습니다. 생기가 넘칩니다.

 

현장을 사수하는 시민들이 대부분 10~20대입니다. 깃발 아래 모일 수 없는 그들은 '트윗질'하다가 흘러온 애매모호한 개인들입니다. 친해서 같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 와서 친해지는 모양입니다. 또 하나같이 재간둥이입니다. 아직은 카페가 휑하고 어수선하지만, 또 누군가가 멋진 벽화를 그려넣고 수시로 음악회를 열겠지요. 그럴 기세입니다. 죽창과 곤봉을 물리치는 '노래방패'의 위력을 아니까요.

 

두리반 싸움에서는 용역이 딱 한번 들이닥친 이후에는 500일 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얼씬거리지 못했답니다. 연대의 힘이겠죠. 문화의 힘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철거촌이 칠성급 호텔이자 해방구입니다. 정말 잘 자고 재밌게 놉니다. 명동 카페 마리에도 매일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시민들이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공자님 말씀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세입자분들도 힘이 난다고 좋아하십니다.  영화 <만추>의 한줄 교훈,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것'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열기와 온기 가득한 '체험 삶의 현장'입니다.

 

잔잔하고 뭉근하고, 그리고 한들한들 흥겨워

 


바닷가의 한 장면 같지요. 젊은 연인이 누워 트윗을 하네요. 노란 우산 쓰고 초록색 프릴달린 블라우스 입고 분홍색 티셔츠 입고 삼삼오오 모여서 기타 치고 멜로디온 불고 노는 모습 좀 보세요. 철거현장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생명체들. 보도블록 틈새에 피어난 민들레 같기도 하지요. 잔잔하고 뭉근하고, 그리고 한들한들 흥겹습니다. 저 활기찬 비애는 무엇이더냐. 문득 김수영의 <꽃잎2>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마지막 연이 이렇습니다.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아니, 왜 하필 보기 싫은 꽃을 믿으라는 걸까요. 여기 와 보니 어렴풋이 알겠습니다. 꽃잎이 다 붙어있는 온전한 꽃에 감탄하기는 쉽지만 꽃잎 다 떨어진 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긴 어려울 텐데요. 그래도 우리의 희망은 그 떨림, 삐뚤어짐, 그 넓어져가는 소란에 있다는 것을 '카페 마리'는 뜯겨진 온몸으로 증명합니다.  

 

김수영에게 배웁니다. 시인의 눈으로 보면 절망이 꽃입니다. 금이 간 꽃이 희망입니다. 1980년대에 노란 최루가스 자욱하던 그 땅, 명동 일대에 '보기 싫은 노란 꽃'이 무리지어 피었습니다. 그 억센 희망이 꽃대궐을 이룹니다. 손에 손 잡고 놀러 오세요. 노오란 꽃구경 오세요.


태그:#명동 카페 마리, #철거투쟁, #명동 두리반, #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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