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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입구에 붙은 대형 전시 홍보물 고흐의 1890작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전시 전야제에 축사를 하는 한스 하인스브룩 주한네덜란드 대사. 이명박, 오세훈 전·현직 서울시장, 장재구 한국일보회장 2007 미스코리아 진인 이지선 양 등 초대 인사들이 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에 붙은 대형 전시 홍보물 고흐의 1890작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전시 전야제에 축사를 하는 한스 하인스브룩 주한네덜란드 대사. 이명박, 오세훈 전·현직 서울시장, 장재구 한국일보회장 2007 미스코리아 진인 이지선 양 등 초대 인사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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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Voyage into the myth)'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내년 3월 16일까지 열린다. '자화상' 등 유화 45점과 드로잉, 판화 22점 등 총 67점을 선보인다. 이 작품들은 전 세계 고흐작품의 절반 이상을 소장한 반 고흐미술관과 크뢸러 뮐러미술관에서 왔다.

이번 전은 첫 네덜란드 시기(1881~1885), 밝은 색채로 자신만의 인상화풍을 굳힌 파리 시기(1886~1888), 색채의 극치를 맘껏 구사한 아를 시기(1888~1889), 절정기에 예술혼을 불태운 생-레미 시기(1889~1890), 생의 마지막을 보낸 오베르 시기(1890)로 나뉜다.

고흐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으나 당대엔 혹독한 패자였다. 몇 번의 구애도 거절당했고, 부친에 이어 목사가 되려고 신학대학을 지원했으나 라틴어 거부 등으로 낙방하고 다시 복음학교에 들어가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에 빈민전도를 나갔으나 지나치게 광부의 편에 선다고 하여 해고된다.

이제 그에겐 그림 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정신적, 재정적 지원자인 동생 테오의 권유로 27살 처음 그림을 시작했고 37살에 불꽃 같은 생을 비극적 자살로 마감했다. 하지만 '승자'라는 뜻이 담긴 빈센트, 그는 그 이름대로 결국은 최후의 승자가 된다.

고뇌하는 사람과의 일체감

'비탄에 잠긴 노인' 캔버스에 유화 82×65cm 1890. 고흐의 마지막 발작이 일어난 직후 그린 작품으로 이 비탄에 빠진 노인을 통해서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예고한다. '슬픔' 석판화 38×92cm 1882(아래). 슬픔의 모델은 재봉일을 하며 매춘을 부업으로 했던 시엔이다. 그녀는 미혼모로 심한 성병에 걸렸다. 고흐는 슬픈 것이 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비탄에 잠긴 노인' 캔버스에 유화 82×65cm 1890. 고흐의 마지막 발작이 일어난 직후 그린 작품으로 이 비탄에 빠진 노인을 통해서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예고한다. '슬픔' 석판화 38×92cm 1882(아래). 슬픔의 모델은 재봉일을 하며 매춘을 부업으로 했던 시엔이다. 그녀는 미혼모로 심한 성병에 걸렸다. 고흐는 슬픈 것이 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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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전시실을 구경하다가 관객 중 누군가 던지는 한마디 말이 관심 있게 들려온다.

"고흐가 신학을 하려고 한 것을 보면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화가 같아."

고흐가 살아있다면 이 말에 동의했을까. 하긴 1885년에 그도 "나는 대성당보다 인간의 눈빛을 그리고 싶다. 인간의 영혼에 더 관심이 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고흐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컸다. '비탄에 잠긴 노인'이나 '슬픔'에서 보듯 일관되게 좌절과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과민한 감수성을 보였다. 그는 그렇게 뜨거운 인간애를 발휘했다.

그림에 등장한 낯선 사람들

'감자 먹는 사람들' 석판화 26×32cm 1885. 그 당시 농민의 참상을 현장감 있게 그린 걸작으로 고흐에게 닥칠 비운도 비춰진다.
 '감자 먹는 사람들' 석판화 26×32cm 1885. 그 당시 농민의 참상을 현장감 있게 그린 걸작으로 고흐에게 닥칠 비운도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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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또한 당시엔 도무지 그림의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게 살았던 농민들이나 막일꾼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들을 그림 속 주인공으로 삼아 현장감 있게 그렸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대표적 작품이다.

고흐도 이런 그림의 배경을 설명이라도 하듯 "사회적 지위나 종교가 사람들을 정신병자로 만들고 세상을 뒤죽박죽 혼란하게 만든다"라고 시니컬하게 말했다.

고흐는 이렇게 번듯하고 학식이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을 그리기보다는 오히려 구차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줄 수 있는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이는 그 자신이 먼저 엄청난 고통을 받았기에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우체부 조셉 룰랭' 캔버스에 유화 65×54cm 1889. 반 고흐가 그린 조셉 룰랭 6점의 초상화 중 하나. '카미유 룰랭' 캔버스에 유화 40×32cm 1888(아래). 우체부 조셉 룰랭의 딸로 고흐는 룰랭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우체부 조셉 룰랭' 캔버스에 유화 65×54cm 1889. 반 고흐가 그린 조셉 룰랭 6점의 초상화 중 하나. '카미유 룰랭' 캔버스에 유화 40×32cm 1888(아래). 우체부 조셉 룰랭의 딸로 고흐는 룰랭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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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그는 주변의 정감 어린 평범한 이웃들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평생에 668편의 편지를 쓴 다정다감한 사람 고흐, 그에게 우체부아저씨는 각별한 존재였다. 그는 '우체부 조셉 룰랭'을 무척 좋아해 무려 6점이나 그렸다. 그뿐 아니라 그의 부인과 딸 카미유 룰랭도 그렸다. 그가 그린 대부분 사람들은 고흐가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 밖에도 고흐가 물감이 떨어지면 격려하며 공짜로 주거나 작품으로 대신 받았던 가게주인 탕기 영감을 비롯하여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기 십상인 선술집 여주인 지누 아줌마까지도 그렸다. 그를 치료했던 가셰 박사는 그가 그린 인물 중 가장 지위 높은 사람으로 이 초상화는 1990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8250만 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우리의 국민화가 박수근도 고흐와 시대 차는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림의 대상이 되지 않는 행인, 무녀, 아낙, 촌로, 노상, 소녀, 아이들 등을 그렸는데 대가들의 안목은 역시 다르다.

렘브란트를 잇는 밀레 찬미자

고흐 '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화 100×100cm 1888. 노란 태양이 대지를 파랗게 덮고 엷은 오렌지 빛 밀밭을 찬란하게 물들인다. 밀레를 모방했으나 얼마나 독창적인 고흐의 화법인가. 밀레 '씨 뿌리는 사람' 유화 1850(아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화 100×100cm 1888. 노란 태양이 대지를 파랗게 덮고 엷은 오렌지 빛 밀밭을 찬란하게 물들인다. 밀레를 모방했으나 얼마나 독창적인 고흐의 화법인가. 밀레 '씨 뿌리는 사람' 유화 1850(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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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왜 그리도 사람들 마음에 감동을 주며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까? 그것은 아마도 삶과 예술의 본질, 자연과 끝없는 소통과 대화,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여 예술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고흐의 이런 정신은 밀레에서 배운 것이다. 고흐는 우연히 밀레의 '만종'을 보고 탄복했다. "바로 이거야. 너무 훌륭한 그림이야! 시 그 자체야!". 고흐는 밀레 그림을 통해서 미적 황홀함과 영적 숭고함에 고무되어 흥분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흐는 렘브란트의 후손으로 밀레의 열렬한 찬미자였다. 밀레를 흠모했던 그는 그의 그림을 평생 모사했다. 하지만 그냥 모사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그만의 색채와 형태로 번역하여 강력한 고흐 풍을 창안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씨 뿌리는 사람'이다.

고통은 창작의 원동력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41×33cm 마분지에 유화. 1887 마분지에 그렸기 때문에 색이 조금씩 바랜다. 화가의 깊은 영혼에서 나오는 강력한 생명력이 번뜩인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41×33cm 마분지에 유화. 1887 마분지에 그렸기 때문에 색이 조금씩 바랜다. 화가의 깊은 영혼에서 나오는 강력한 생명력이 번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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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자화상'은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함께 너무나 유명하다. 눈빛에 불꽃이 튀는 그의 자화상은 또 하나의 인간 내면에 대한 치열한 탐구의 실험대였는지 모른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자신에게 위안을 준 자연과 함께 인간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모델료를 줄 수 없어 자화상을 그린 것만은 아니고 자아성찰을 통해 인류에 대한 관심도 높이려 했을 것이다.

고흐는 10년간(1880~1890) 유화 880여 점, 드로잉 1100여 점을 남겼다. 그림을 3일에 한 점씩 그린 셈인데 그 열정이 놀랍다. 이런 집념은 과연 어디서 오는가. 일부 정신의학자들은 그가 고통을 이겨내려고 그렇게 열광적으로 그림에 몰두했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고흐에게 고통이 구원이 된 셈이다. 다시 말해 고통은 그에게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끼니는 그를 황홀한 미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로 인해 오만, 게으름 심지어 체념이나 무상을 느낄 틈이 없었나 보다.

격렬한 고통을 현란한 색채로

'생-레미병원의 정원' 캔버스에 유화 91×72cm 1889. 이 작품은 고흐의 색채회화의 완성기의 것으로 색채를 통한 인간의 구원과 자연의 영혼을 발견하였다
 '생-레미병원의 정원' 캔버스에 유화 91×72cm 1889. 이 작품은 고흐의 색채회화의 완성기의 것으로 색채를 통한 인간의 구원과 자연의 영혼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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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 시기에 그려진 '생-레미병원의 정원'을 보면 정신적으로 더 고통스러울 터인데 그 색채는 오히려 더 강력하고 붓질은 더 거칠고 사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의 격렬한 고통이 오히려 현란한 색채를 낳았다. 게다가 색채 간 서로 절묘한 대비를 통해 다른 색감도 강화시키면서 상승시켜 색채의 풍성함과 오묘함을 극대화하였다.

이렇게 격정적 고통이 낳은 색채이기에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런 색채가 주는 눈부신 광채와 환희는 빛의 승리라도 상징하듯 활화산처럼 장렬하게 타오른다. 이런 색채는 후에 야수파나 표현주의, 초기 추상주의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불멸의 아름다움으로 남다

'아이리스' 캔버스에 유화 92×74cm 1890. 처음으로 해외나들이에 나선 고흐 작품으로 생-레미 시기의 최고 걸작이다.
 '아이리스' 캔버스에 유화 92×74cm 1890. 처음으로 해외나들이에 나선 고흐 작품으로 생-레미 시기의 최고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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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꽃 중에는 해바라기와 아이리스를 참 많이 그렸다. 여기 '아이리스' 역시 풍성하고 부드럽고 화사한 분위기다. 이런 색채를 구사한 사람을 광인으로 내몰다니 말도 안 된다.

그 사회가 한 천재를 알아보기엔 현실이 너무 버거웠나 보다. 앙토냉 아르토는 그래서 그에 관한 단상을 쓰면서 책 제목을 <한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이라고 붙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반 고흐는 사는 것이 너무 괴로워 이를 이겨보려고 죽으라고 그림만 그렸지만 그 고통을 더 이상 견디다 못해 정신이상과 발작이 일으켰고 결국 권총자살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신화가 되었고 그의 작품은 지구상에 가장 비싼 그림에 반열에 놓였다. 그는 불꽃 같은 열정을 창조의 에너지로 바꿨고, 삶의 고뇌를 격정의 색채로 불태워 사람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감동과 전율을 선사한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다시 피어났다.

덧붙이는 글 |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http://seoulmoa.seoul.go.kr 전화 02)2124-8800
반 고흐 전시본부 http://www.vangoghseoul.com 전화 02)1577-2933
화·수·목·금요일: 10시~21시까지 토·일요일·공휴일: 10시~20시 월요일 휴관
성인 1만2000원, 청소년 1만원, 어린이 8000원



태그:#반 고흐, #밀레, #씨 뿌리는 농부, #자화상,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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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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