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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사람을 잘 그린다. 어려서부터 지닌 습관이라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는 가냘픈 여성이 나온다. 그 인물이 남성이어도 다를 바 없다. ‘나’를 만나고 있는 나. 그래서 나의 눈은 가지런하고 차분하다. 뒤에 그려진 ‘나’는 그래서 아련하게 모습을 나타낸다.
▲ '관계' 화가는 사람을 잘 그린다. 어려서부터 지닌 습관이라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는 가냘픈 여성이 나온다. 그 인물이 남성이어도 다를 바 없다. ‘나’를 만나고 있는 나. 그래서 나의 눈은 가지런하고 차분하다. 뒤에 그려진 ‘나’는 그래서 아련하게 모습을 나타낸다.
ⓒ 선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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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누구와 또는 무엇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고 계시나요.

흔히 사람들이 쉽게 사용하는 ‘관계’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미술작품들의 제목 겸 주제가 ‘관계’인 전시회를 관람하고 나서였습니다. 버스로 지나가기만 해본 곳이었는데 막상 내려보기는 처음인 궁정동에 이 전시회 화랑이 있습니다. 공원을 앞에 낀 아주 호젓한 곳입니다.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이 ‘관계’의 사전 풀이입니다. 그러므로 ‘관계’란 복수의 존재 사이에서 맺어지는 일련의 모습들을 통틀어 일컫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관계와 관계 속에서 일상을 살고 특별한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한 사회에서 어떤 특정한 단어의 의미가 본래의 의미에서 많이 벗어나는 경우는 자주 발생합니다. 특정한 상황에 자주 사용되거나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와중에, 한참 거리가 멀어지거나 왜곡되거나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관계’란 단어도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를 들어 부적절한 관계, 남녀 간의 (비정상적인) 관계, 모종의 관계, 비리 관계, 공생 관계, 권력을 남용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 등이 그렇습니다. 매스컴 보도에서 서두에 언급하는 ‘관계’라는 단어는 이런 부정적인 뉘앙스의 경우를 띨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렇게 관심거리가 되고 인구에 회자됩니다.

그래서 정말 사람 냄새 나는 관계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 앞에 수식어를 넣어야 할 실정이 돼버렸습니다. ‘아름다운 관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진정한 관계’, ‘새롭게 싹튼 관계’ 같은 식입니다.

‘관계’라는 단어가 어색하면 비슷한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만남’, ‘인연’, ‘관련’, ‘협력’, ‘합심’, ‘연계’, ‘교류’ 등의 표현은 그래서 ‘관계’에 비하면 순화된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사회적 시류로 굳어지거나 한정되어진 의미의 단어에 대해 사용의 제약을 가하는 모종의 암묵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도 대상에 따라서는 본래 순수한 의미로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나와 ‘나’일 경우입니다. 외형의 나와 마음속의 ‘나’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속이거나 무시하거나 잊어버릴 수 있지만, 침묵이나 정적인 상태에서는 내 속의 ‘나’와의 만남을 피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화가는 plywood(베니어판)와 종이 캔버스 위에다 아크릴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종이와 나무가 만나고, 나는 ‘나’가 비워낸 자리에 들어가 만난다.
▲ '관계' 화가는 plywood(베니어판)와 종이 캔버스 위에다 아크릴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종이와 나무가 만나고, 나는 ‘나’가 비워낸 자리에 들어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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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바쁜 시대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나’를 찾는 노력이 소중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 ‘나’는 나와 더불어 살고 있고 계속 깊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것을 나도 알고 있고, 그 ‘나’는 사실 나에게 맞는 길을 알려주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평범한 관계 또는 불편한 관계 속에서 마냥 살지만, 이 와중에서도 자꾸만 나에게 소곤대는 대상을 물리칠 수만도 없습니다.

때로는 그런 ‘나’를 애써 외면하는 시도도 감행합니다. 일이나 유희 속에 파묻히는 것은 가장 편리한 방식이고 많이들 그렇게 일상을 삽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되게 사는 삶이 몇 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와중에서도 내 속의 ‘나’는 계속 무슨 소린가를 계속 해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 환경에 몰입하는 방식으로 그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안 듣고는 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 내 속의 ‘나’와 관계를 맺기는 하되 종속관계식으로 맺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릴 적부터 마음속에 축적된 억압의식이 이런 문제를 낳습니다. 즉 내 속의 ‘나’가 주인이 되고, 나는 종이 되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때의 ‘나’는 나를 못 살게 구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요.

그래서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나’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게 됩니다. 그런 관계는 ‘마음속의 마음’에 복수심을 키우게 하고 나는 ‘나’에게 순종하면서도 적대감을 갖는 아주 힘든 관계를 지니며 살게 되기도 합니다. 적게 부분이든 많은 부분이든 많은 사람은 이런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원래 착하고 내 편이기도 한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러니까 매일 매일 친근한 ‘관계’를 맺으며 산다면 어떨까요. 서로를 궁금해 하며, 모르던 구석도 알아 가며 서로 발전적인 방식을 유지하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 더욱이 침묵 속에서, 침잠 속에서 그 ‘나’와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눈다면 그건 정말 아름다운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찾은 화랑 전시회의 화가 선종훈님은 그런 관계를 애써 찾는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나’는 다른 대상으로 대체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타인 아닌 타인. 때로는 타인으로 머물다가, 외면하기도 하다가 나와 하나가 돼버린 그런 ‘나’입니다. 화가에게 그 ‘나’는 바로 화가가 그리는 그림입니다.

화가는 그랬답니다. 때로는 그림에 치중하고 때로는 나에 치중했노라고.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 지금은 나와 그림이 하나가 돼버렸다고요. 보이는 나와 보이지 않는 ‘나’가 하나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형의 ‘나’와 직면하고 화해하고 사랑을 나누는 관계에서, 그 ‘나’가 유형(有形)의 모습을 띤 개체가 되어 있더라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나에게 적절한 유형·무형의 모습으로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합니다. 화가에겐 그림이, 시인에겐 시가, 음악가에겐 음악이 그런 ‘나’가 될 수 있습니다.

도록에 있는, 여행작가 신범수 님의 글 중에서. “마음의 눈을 뜨고 내 속으로 난 길을 조용히 산책을 하지 않으면 결코 엿볼 수 없는 우리 삶의 또 다른 일부. 그 화두를 잡고 나로 향한 그 길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와 같은 이들. 어쩌면 우리가 흔히 예술가라 일컫는 이들이 바로 그들일지 모른다.”
▲ '관계' 도록에 있는, 여행작가 신범수 님의 글 중에서. “마음의 눈을 뜨고 내 속으로 난 길을 조용히 산책을 하지 않으면 결코 엿볼 수 없는 우리 삶의 또 다른 일부. 그 화두를 잡고 나로 향한 그 길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와 같은 이들. 어쩌면 우리가 흔히 예술가라 일컫는 이들이 바로 그들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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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에게 솔직해지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 보잘것없어도, 색안경을 벗은 눈으로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친근한 상대로 다가옵니다. 그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그냥 보아 줍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만날 때마다 안심이 됩니다.

때로는 인간적 한계의 모습, 욕망·거만·절망 등이 나에게 있어도 내 속의 ‘나’는 그런 나를 그냥 지켜봐줍니다. 자기와 멀어지기 않기를 바라면서요.

화가의 그림 속에 ‘나’는 찬찬히 생각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나 뒤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둘’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차분해져 버리고, 고요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화가의 그림 속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그런 미동 없는 눈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하는, 현대인의 고독을 말하는 시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나’를 그런 눈으로 가만가만 찾을 일입니다. 그것이, 시의 다음 구절인 “그 섬에 가고 싶다”와 다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외로움은 상쇄될 것입니다. 급히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겉은 검은색이지만 그 본성은 무엇보다 밝은 것을 희망합니다.

역시 신범수 님의 글 중에서. “등 뒤로 부끄러운 듯 내민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누군가를 보면 가끔 손을 잡아주고 싶듯, 이제 나는 그녀의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 '관계' 역시 신범수 님의 글 중에서. “등 뒤로 부끄러운 듯 내민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누군가를 보면 가끔 손을 잡아주고 싶듯, 이제 나는 그녀의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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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인물을 다시 떠올립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이었습니다. 새삼스레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의 ‘나’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가을은 ‘나’와 관계를 맺는 호기입니다. 우울함에 짓눌리지 않는다면요. 아니 짓눌리지 않기 위해서요. ‘나’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요….

참! 궁정동은 경복궁 지나 효자동 옆에 있는 동네입니다. 또 청와대 바로 옆에 위치합니다. 이곳에 ‘무궁화동산’이 있는데 산책하기 더할 데 없이 좋습니다. 청와대 근처라 행선지를 묻는 젊은 ‘아저씨’들이 많은데, 화랑 위치를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주는 그런 아저씨들입니다.

경복고등학교가 근처에 있어 학생들도 많이 눈에 띕니다. 넓은 하늘이 보이고, 가을 분위기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한적한 곳입니다. 전시회 구경도 하면서 겸으로 이런 호사도 누려 보시기를. 참! 화랑 뒤에 있는, 담쟁이덩굴로 예쁘게 벽을 장식한 교회도 눈여겨보고 가시길.

덧붙이는 글 | 선종훈 ‘관계’전. 가진화랑. 11월 7일까지. 02-738-3583.



태그:#관계, #선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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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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