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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30분, 시인 정경임님과 함께 덕유산 산행을 위해 김천을 출발했다. 나의 자동차는 어느덧 도심을 벗어나 부항의 유다리골을 거쳐 다시 부항령의 삼도봉 터널을 지나 무주로 들어섰다. 맑은 냇물이며 황금들판 등 한적한 시골 모습들이 가슴 한가득 온화하게 다가서는 가운데 굽은 곡선의 도로 그 끝에서 경계의 선인 나제통문이 어서오라 손짓을 한다.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선인 나제통문이 시야에 다가선다
▲ 나제통문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선인 나제통문이 시야에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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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통문은 전북 무주군 설천면(雪川面)과 무풍면(茂豊面) 사이의 암벽을 뚫은 인공동문(洞門)으로 구천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며 높이 3m, 길이 10m로서 본래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에 놓인 통문이었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풍속과 문물이 판이한 지역이었던 만큼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언어와 풍습 등 특색을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장날 설천지역에 가보면 사투리만으로 무주, 무풍 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고 한다.

덕유산으로 가는 길가에 아름다운 가로수가 도열을 하고 있다.
▲ 길 덕유산으로 가는 길가에 아름다운 가로수가 도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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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통문 뒤편에서 포졸의 따뜻한 인사를 받은 우리는 곧장 구천동을 향해 달렸다. 구천동으로 가는 길목마다 길게 늘어선 가로수가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가운데 어디선가 맑은 물소리가 들려온다. 따라서 물소리를 곁에 두고 한참을 거슬러 오르니 무주의 전통 음식점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덕유산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한 뒤 우리는 각자의 배낭을 메고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한 5분쯤 걸었을까. 길옆 가로수마다 모 문학회에서 걸어놓은 시화와 더불어 [시집을 빌려줍니다]라는 반듯한 글귀가 시인과 나의 맘을 사로잡는다.

모 문학회에서 전시한 시화들이 내방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 시화 모 문학회에서 전시한 시화들이 내방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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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묘한 흥분으로 다가서던 덕유산 그 입구를 이제사 다다랐는데 벌써 시간은 11시를 20분을 가리켰다. 따라서 시화를 모두 다 읽어 볼 틈도 없이 우리는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을 한낮의 덕유산, 그 편안한 숲 속을 우리는 무조건 걸어가고 있었다. 不盡長林(부진장림)이라 했던가. 숲 속으로 걸어들어 갈수록 나무와 풀만 보일 뿐이며 그 한 곁에 외줄기로 뻗어서 굽고 감겨져 물리며 길에 길이 이어져 있었다. 가끔 트인 빛을 사이로 바람이 불고 일순 다가서는 물소리가 청아하게 내 귀를 간지럽힌다. 그렇게 우리는 부끄러워 미끄러져 내린 계곡을 곁에 두고 한사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강선대며 안심대, 인월담 그리고 월하탄을 뒤로하고 한 시간쯤 걸어가니 아치형의 백련교가 시야에 들어오고 백련교를 지나드니 사찰의 제일관문인 백련사 일주문과 그 한 곁에 자리한 매월당 부도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974년에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매월당 부도는 높이 2.8m의 석종형 탑신을 올려놓은 것으로, 기단부의 대석은 원형이고, 상두면(上頭面)을 복련(伏蓮)으로 조각한 연화대석(蓮花臺石)인데 탑신은 상륜부(相輪部)에 보륜(寶輪)을 조각하였으며, 그 윗부분에다 유두형 보주를 조각하였다. 또한 탑신의 상두면과 보주에는 복련과 앙련으로 양각한 연화무늬 장식이 화려하게 드러나 있으며 탑신에는 "매월당설흔지탑 (梅月堂雪欣之塔)"이라는 탑명이 있고, 그 옆에 "건륭갑진삼월일생질임선행 건립(乾隆甲震三月日甥姪任善行建立)"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어 매월당 설흔의 생질인 임선행이 1784년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매월당 설흔의 생질인 임선행이 세웠다는 매월당 부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 부도 매월당 설흔의 생질인 임선행이 세웠다는 매월당 부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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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이 곳을 기준으로 승(僧)과 속(俗),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생사윤회의 중생계(衆生界)와 열반적정의 불국토(佛國土)가 나누어진다는 등 정시인과 일주문에 대한 지식을 나누며 조금 더 올라가니 고찰의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백련사가 눈앞에 다가선다.

덕유산을 배경으로 그 중턱(해발 920m)에 자리 잡은 백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덕유산 기슭에 핀 백련을 보고 토굴을 처음 지어 은거한데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아타깝게도 6.25전쟁 때 사찰의 모든 당우가 불타 버렸으며, 그 뒤 10여년을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60년대 중반부터 지역주민들의 성원 속에 복원불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지금은 대웅전과 원통전, 명부전, 보제루, 천왕문, 일주문 범종각 등이 갖추어져 사격을 쇄신, 새로운 가람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덕유산 남쪽 기슭 거창에 살았던 명종 때의 선비 갈천 임훈(林薰)이 이 곳을 9000명의 성불공자(成佛功者)가 머문 땅이라 하여 ‘구천둔(九千屯)’이라 했다고도 한다.(기록에 의하면 구천동 골짜기에는 1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함.)

정시인의 말을 빌면 백련사는 정토종의 사찰이라고도 하는데, 이유인즉 1672년 덕유산을 기행한 윤증의 <유여산행기>에 보면 덕유산을 여산이라 지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잠시 살펴 본 전관당 부도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니 사찰의 제3관문인 천왕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천왕문은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이것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워졌으며, 33천 중 욕계 6천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지배자로서 수미의 4주를 수호하는 신을 일컬어 사천왕이라 한다.

지국, 증장, 광목, 다문의 사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이 어쩌면 이 곳은 부처님이 계시는 신성한 곳이니 마음을 가다듬고 출입하라는 듯하다.

석계단 위로 사찰의 제3관문인 천왕문이 보인다
▲ 천왕문 석계단 위로 사찰의 제3관문인 천왕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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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을 통과하자 만세루 앞에 무척 오래된 세월을 지켜왔을 듯한 아그배나무 한그루가 시야에 들어오고 열매가 무척이나 신기했는지 정시인은 총총히 매달린 아그배를 만져본다. 만세루 내부에 있는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었건만 그러나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기에 내려오는 길에 들리기로 하고 대웅전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고석대찰의 면모를 갖춘 백련사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인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1979년에 건립되었으며 내부에는 청동으로 주조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고, 주 존은 아미타여래좌상, 그리고 협시로 관음과 세지보살이 있다.

정시인이 대웅전을 향해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고 있다
▲ 대웅전 정시인이 대웅전을 향해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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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원통전 앞에서 조용히 선수당을 내려다 보았다. 1962년에 건립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팔작지붕인 선수당엔 1961년 경북 의성에서 옮겨온 석조아미타삼존상이 봉안되어있다는데 확인하지는 못하였으며 곧바로 원통전으로 향했다.

원통전 또한 1967년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주 존인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주며 세부조각 기법이 뛰어나 보물급으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어 보이며, 전남 강진에서 옮겨온 것이라 전하고 있다.

선수당 바로 위엔 원통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 원통전 선수당 바로 위엔 원통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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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전인 대웅전에서 볼 때 좌측엔 명부전이 있는데. 이는 1986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 온다. 명부전은 중생구제의 큰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전각으로서 협시인 도명존자 및 무독귀왕 외에도 염라대왕을 위시한 지옥의 시왕상(十王像)을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내부엔 지장보살께서 앉아계셨다.
▲ 명부전 명부전 내부엔 지장보살께서 앉아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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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측면의 넓은 도량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높은 봉우리들을 바라보다 다시 시야를 아래로 옮기니 승려들의 식사나 휴식의 공간, 그리고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인 요사채가 보인다.

스님들과 내방객들의 머물 수 있는 휴식처인 요사채
▲ 요사채 스님들과 내방객들의 머물 수 있는 휴식처인 요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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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맨 꼭대기 산에 박혀있는 듯한 건물하나 그것은 바로 삼성각이었다. 본래 삼성각은 각각의 건물을 지어 삼성을 모셔야하나 이 곳은 아직 단청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며 충청도의 갑사처럼 산신, 칠성, 독성을 한 곳에 모시고 있었다.

백련사 삼성각은 단청도 되어있지 않았다.
▲ 삼성각 백련사 삼성각은 단청도 되어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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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백련사가 자리한 곳은 정상인 향적봉 중턱에서부터 경내 한가운데로 한 줄기 계류가 내려오고 있는데, 그 계류를 중심으로 가람배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는 잠시 동안이었지만 이렇게 백련사의 구석구석을 돌아본 뒤 삼성각 뒤로 난 등산로를 따라 향적봉으로의 등정을 시작했다. 등산로는 제법 가파랐다. 탐방걸음으로 두 시간도 모자란다는데… 따라서 우리는 조금 더 서두르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단풍으로 물들지 않은 숲이었지만 여전히 숲은 하늘을 덮고 숲길의 끝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수천의 목계단과 돌계단을 오르는 난코스에 내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만 간다. 헌데 높은 산의 산행은 처음이라던 정시인은 줄곧 힘이 넘치는지 정상을 향해 잘도 올라간다.

등산로는 수 천개의 목계단과 석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 덕유산 등산로 등산로는 수 천개의 목계단과 석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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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취나물이 지천에 널렸으며 족도리풀(세신), 삽주(백출, 창출)와 같은 약초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다음엔 쌈장만 가지고 오면 되겠다'는 나의 말에 정시인은 웃으며 내년 봄에 한 번 더 오자며 답을 단다.

해발 1614m인 덕유산, 그 정상에 오르니 봉우리는 아슴히 하늘 끝에 닿아있다. 마치 하늘이 처음 열릴 때 생긴 언덕과 구릉에서 사람들은 복도를 하고 골짜기마다 메아리를 흩어놓는다. 알다시피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香積峰)의 이름은 천연기념물인 주목(朱木)에서 근거한다. 주목은 향이 좋고 수피가 붉기 때문에 ‘향적목(香積木)’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향적목이 8부 능선부터 향적봉 구간에서 70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덕유산 향적봉, 예상과는 달리 정상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 향적봉 덕유산 향적봉, 예상과는 달리 정상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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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봉에서 중봉에 이르는 구간은 야생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대개 산악인들은 중봉에서 오수좌굴을 지나 백련사로 하산한다지만, 우리는 시간이 여의치 않아 오수좌굴은 다음기회로 미루고 왔던 길로 되돌아 하산했다. 해가 기울어 가는지 숲 그늘 사이로 이는 바람이 차가웠다.

아쉬운 시간을 뒤로하고 정시인이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 하산길 아쉬운 시간을 뒤로하고 정시인이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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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숲에 천천히 어둠이 내린다. 내리는 어둠과 피어오르는 어둠, 두 어둠은 비탈길을 따라 소슬하게 천지를 물들인다. 그냥 지나쳐 온 인월교에서 사진 한 장을 더 찍으려 했었는데 이미 해가 저물어 사진은 포기하고 별을 몰고 내려와 주차장 옆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간단하게 산채비빔밥으로 저녁식사를 한 뒤 김천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 다른 산과 달리 덕유산은 주차장에서부터 산 입구에 속하는 백련사에 이르는 거리가 제법 길어 한 시간정도가 소요된다. 그리고 다시 향적봉까지는 보통의 걸음으로 1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난코스이니 참고하여 산행을 하면 좋을 것 같다.

☞ 무주리조트의 설천저수지 있는 곳에서 설천봉으로 운행되는 곤돌라를 이용하면 한결 수월하게 향적봉을 오를 수 있다.

☞ 덕유산 국립공원관리소에서는 라제통문을 지나 36km에 이르는 덕유산 향적봉까지 빼어난 경치를 구천동 33경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태그:#덕유산, #백련사, #향적봉, #정경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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