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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행여객선 갑판에는 감자와 옥수수, 가구들까지 가득 실려있다.(탄자니아 잔지바르 섬 가는 뱃길)
▲ 삶의 무게 완행여객선 갑판에는 감자와 옥수수, 가구들까지 가득 실려있다.(탄자니아 잔지바르 섬 가는 뱃길)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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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수상한 도시 하라레(Harare)에 갈 계획은 전혀 없었다. 짐바브웨 여행의 목적은 단연 세계 3대 빅폴(Big Fall)로 불리는 빅토리아 폭포일 뿐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연말 휴가기간이 겹쳐 일주일 내의 버스표는 모두 매진 상태였다. 

"하라레에는 아무 것도 없어!(There is nothing in Harare!)"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일본친구들이 혀를 내두르며 해주었던 경고가 떠올랐지만, 낫싱(nothing)이란 표현에는 언제나 얼마 정도의 과장이 숨어있기 마련. 경찰까지 다운타운을 걷는 것조차 자살행위라고 겁주는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에 일주일 더 있는 것보단 나아 보였다. 우린 하라레 행 표를 끊었다.

그러나 터미널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짐 보따리가 피난행렬을 방불케 했다. 버스는 아예 자기 몸집만큼 큰 트레일러짐차를 달고 나타났다. 여인들이 남산만한 엉덩이를 출렁이며 설탕, 밀가루, 옥수수가루 같은 가마니들을 머리에 이고, 아이들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빵 봉지를 들고 쫓았다. 냉장고와 텔레비전을 싣는 백인 할머니도 보였다. 짐을 싣는 데만도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다행히 버스는 잘 달려갔다. 해거름이 되어 바오밥나무가 많은 도시에 멈춰 서자 사람들은 무섭게 상점으로 몰려갔다. 마치 약탈하듯이 식량이 될 만한 것들은 몽땅 사들였다.

"어머, 정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나봐!"
"삼촌! 먹을 거 없으면 우린 어떡해?"

당시 겨울방학을 맞아 누이와 조카 대한이 케이프타운에서부터 아프리카여행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슬슬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뭘 어떡해? 없으면 굶어야지! 아프리카 아이들의 배고픔도 체험하고, 좋지 뭘 그래?"

아내가 대한에게 짐짓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할 수 있는 우리부부 뿐이라면 걱정거리도 아니지만, 누이와 11살짜리 조카가 함께 여행 중이었다.

조카 대한이의 걱정..."먹을 거 없으면 어떡해!"

 수상한 도시 하라레 가는 길, 조카 전대한(버스 좌석이 왼쪽에 둘, 오른쪽에 셋이다)
▲ 버스 안에서 수상한 도시 하라레 가는 길, 조카 전대한(버스 좌석이 왼쪽에 둘, 오른쪽에 셋이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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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 창밖으로 한결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초가지붕을 머리에 인 흙집, 원시적인 풀밭,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하라레 가는 길)
▲ 한결 같은 아프리카 풍경 버스 창밖으로 한결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초가지붕을 머리에 인 흙집, 원시적인 풀밭,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하라레 가는 길)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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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우리들의 걱정을 싣고 18시간 만에 하라레에 도착했다. 한 청년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환전 안 해? 나 보다 더 좋은 가격은 없어!"

그는 하라레에서 첫 번째 만난 사람이었다. 막대기처럼 빼빼 마르고 키가 커서 막 그 특유의 아프리칸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응수해 주었다.

"얼만데?"
"1달러 당 11만. 이건 아주 특별한 경우야!"

인터넷으로 확인해 두었던 환율에 비해 서너 배가 넘었다. 20달러를 환전하겠다고 했다. 그는 주변을 빠르게 살피면서 건물 뒤편으로 가자고 했다. 경찰 눈에 띄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를 따라갔다. 그는 고무 밴드로 묶인 한 뭉치의 돈을 내밀었다.

짐바브웨 달러는 2만 짜리지폐가 최고액권임을 아는 순간이었다. 2만 짜리지폐로 20달러면 자그마치 110장. 나는 엄지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한 장씩 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친구, 인상을 쓰면서 잽싸게 돈을 뺏어가며 윽박질렀다.

"그딴 식으로 돈을 셀 거면 거래는 없어! 너, 경찰에게 잡히면 내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어떻게 되는데?"
"너 정말 짐바브웨가 어떤 상황인지 몰라? 그날로 난 끝이야!"

그는 손으로 기린처럼 길쭉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빙긋이 웃으며 내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어떡해? 거래가 끝나자마자 넌 사라질 텐데, 만약 돈이 더 많으면? 네게 돌려줄 수 없잖아? 안 그래? 정 싫다면 거래는 없었던 걸로 하자!"
"아~, 이거 미치겠네!"

첫 만남부터 수상한 하라레

 하라레에서 처음 만난 삐끼는 막대기처럼 빼빼 마르고 키가 커서 지금 막 그 특유의 아프리칸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 아프리칸 그림처럼 하라레에서 처음 만난 삐끼는 막대기처럼 빼빼 마르고 키가 커서 지금 막 그 특유의 아프리칸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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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돈을 던지며 세어보라고 했다. 나는 어디보자 하는 심정으로 퉤퉤 침까지 뱉어가며 한 장 두 장 세어나갔다. 그는 옆에서 눈을 부라리며 안절부절 호들갑을 떨어댔다. 내가 절반 정도 세었을 때 그는 내 손에서 돈을 탁 낚아채고서는 하늘에다 대고 욕을 지껄이며 달아났다.

확실히 첫 만남부터 하라레는 수상했다.

반면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건물도 깨끗해 보였다. 다만 차도 사람도 드물어 황야의 도시처럼 휑한 느낌이었다. 호스텔 역시 대낮임에도 육중한 철문을 내리고 있어 황야의 결투라도 벌어질 것 같이 스산한 기분이었다.

환전도 할 겸 하라레 도시상황도 체크해볼 겸 호스텔 사장을 찾아갔다. 터미널의 그 녀석보다는 낮았지만 은행환율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사장이 금고를 여는데 얼핏 보니 달러가 꽤 쌓여있었다.

"달러를 금고에 보관하나 보죠?"
"은행 놈들을 어떻게 믿어! 이 나라가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데!"

"망하다니요?"
"난 달러만 긁어모으면 돼! 망하든 말든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말쑥한 옷차림에 금테 안경을 썼다. 한 손으로 안경을 벗으며 그가 환전한 돈을 내밀었다. 돈을 챙겨 넣으며 다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터미널엔 젊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 거죠? 거리는 텅 비어있고."
"부랑자 놈들? 그 놈들 조심해. 돈 몇 푼 때문에 큰 일 당한다고!"

"정말요?"
"짐바브웨는 지금 망하고 있어! 알아듣겠어? 정치고 경제고 다 이 모양인데 무슨 놈의 일자리가 있겠냐고! 그 놈들도 다 살라고 죄다 거기 모여 지랄들 하는 거지!"

하라레는 점점 더 수상해졌다.

 버스나 택시를 타거나 장을 한 번 보더라도 돈 다발을 들고 다녀야 하는 짐바브웨. 자고 나면 물가가 뛴다.
▲ 돈이 금방 휴지가 된다니까! 버스나 택시를 타거나 장을 한 번 보더라도 돈 다발을 들고 다녀야 하는 짐바브웨. 자고 나면 물가가 뛴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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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외출할 때는 택시를 부르고 시장구경 갈 거면 보디가드를 고용하라는 충고를 덧붙였다. 그건 가이드북 <론니플래닛>에 적힌 경고이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에 택시를 불렀다. 보디가드를 부르는 건 사양했다.

"헤이 맨! 어디로 모실까?"

택시운전사 스미스가 랩을 하는 것처럼 경쾌하게 말했다(사실 그의 이름은 스미스가 아니다. 미안하게도 잊어버렸다. 다만 영화 <나쁜 녀석들(Bad Boys)>의 윌 스미스와 꼭 닮았기에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그도 불만이 없으리라).

먼저 시장으로 갔다. 스미스가 보디가드를 해주겠다고 진지하게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다만 한 시간 후에 시장 입구에서 만나자고 했다. 시장은 작고 가난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누이와 조카는 1달러치 망고 한 아름을 받아들고 입이 쫙 벌어졌고, 아내는 오랜만에 순박하게 웃는 사람들을 만나 날아갈 듯 즐거워했다.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그러나 한 시간 후. 시장 입구에서 술 취한 사람들이 막 싸움판을 벌일 기세였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뚫어져라 이방인을 째려봤다. 길 건너편에서 건달로 보이는 녀석들이 우리를 가리키며 무슨 얘긴가를 나누고 있었다.

“왜 스미스가 안 오는 거야?”
“어머, 저 사람들 우릴 보면서 뭐라 하는 거 같아! 어, 이리로 오는데! 무서워, 어떡해!” 


식구들이 겁에 질렸다. 나도 덜컥 겁이 났다. 그 순간에 스미스의 택시가 달려왔다. 우리 모두는 그가 택시기사가 아니라 ‘정의의 기사’처럼 보였다. 

윌 스미스를 닮은 택시기사

(잠비아)
▲ 아프리카 풍경2 (잠비아)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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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맨, 이제 어디로 모실까?”
“슈퍼마켓!”

“시장에선 별 일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풍을 떨며) 그럼!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그런데 슈퍼마켓에선 뭐 하게? 별 게 없을 텐데?”

그는 연신 힙합 박자로 몸을 흔들어대며 경쾌하게 택시를 몰았다. 슈퍼마켓은 겉보기에는 멀쩡했다. 세 명은 쇼핑하러 들어가고 나는 스미스와 함께 택시에 남았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에게 버스 승객들의 짐 보따리와 터미널의 삐기, 호스텔 사장 얘기를 했다. 그가 힙합 리듬을 타며 랩을 하듯 답했다.

“너희가 본대로야. 지금 하라레는 엉망이지. 돈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다 이거야! 왜냐고? 위대하신 미국과 유엔 나리들께서 무역을 꽉 막아버렸거든!”
“왜?”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게네들한테 물어봐야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런다고?”

“게네 얘기는 대통령 무가베가 장기독재 한다는 거지. 그럼 우린 바본가? 그걸 모르게. 넌 그런다고 독재자가 굶어죽을 것 같니? 절대 아냐! 돈 있는 놈들은 벌써 이 나라 떴거든. 굶어죽는 건 나 같은 놈들뿐이라고!”

그의 힙합 리듬이 점점 빨라져서 속사포가 되었다.

"한 달 새 기름 값이 8배 올랐어! 돈? 벌면 뭐해? 일주일에 물가가 두 배씩 뛰는데. 돈이 금방 휴지로 변한다니까!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사냐고? 답? 있지! 죽든가, 싫으면 강도짓 하든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그가 경쾌한 힙합 리듬으로 되돌아와서 말했다.

“그런데, 너흰 무슨 일로 하라레에 온 거야?”
“그냥. … 여행하러.”

“여행? 신기하네! 하라레엔 더 이상 여행자가 오지 않는데.”
“사실 하라레는 예정에 없던 도시였어.”

“암튼 반갑다. 넌 좋은 친구 같아. 네 두 아내들도.”
“뭐? 두 아내? 푸하하! 아냐, 그건. 한 명은 내 누이야. 꼬마는 조카고.” 

그도 웃었다. 웃고 있으니 정말 윌 스미스를 닮았다.

“너 <나쁜 녀석들>이라는 영화 본 적 없지? 스미스라는 배우가 나오는데 너랑 꼭 닮았어.”
“그래? 언제 한 번 봐야겠군! 그런데 뭐 스미스? 그 친구도 택시운전 하나?”

 짐바브웨와 잠비아 국경에서. 다리 아래로 빅토리아 폭포에서 쏟아진 물이 흘러간다. 누이와 조카, 그리고 아내.
▲ 수상한 도시를 떠나다. 짐바브웨와 잠비아 국경에서. 다리 아래로 빅토리아 폭포에서 쏟아진 물이 흘러간다. 누이와 조카, 그리고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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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에서 세 사람이 돌아왔다. 택시에 타자마자 한 마디씩 쏟아냈다.

“진열대에 물건이 거의 없어!”
“과자는 날짜도 다 지난 거야!”
“물건 대신 점원들만 가득해!”

셋 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굶어죽지 않으려고 두 손 가득 식량을 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 우리들은 우울했다. 텅 비어있는 진열대도, 휑한 바람만 부는 거리도, 경제제제와 강도 이야기도 모두가 다 우릴 쓸쓸하게 만들었다. 오직 스미스만이 최고액권 지폐 60장(11달러 정도)을 받아들고 경쾌한 힙합 리듬으로 랩을 했다.

“헤이, 친구들! 또 보자고!”

이틀 후, 우린 수상한 도시를 떠났다. 그리고 그는 남았다.

덧붙이는 글 | 여행에서 돌아와 가끔 짐바브웨 상황을 접하게 된다.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것 같다. "2007년 4월 현재 실업률 80%로 세계 최악, 인플레이션 3,700%, 인구의 1/3인 400만 명이 식량구호 필요, 1주일에 3,500명씩 사망, 평균수명 여자 34살 남자 37살(10년 전의 절반 수준)…." 기사에 등장하는 수치들이 문득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기록적인 숫자들 속에는 여러 스미스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태그:#아프리카, #짐바브웨, #하라레, #세계여행, #독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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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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