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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무너진 도시 밤(Bam). 차도르(천막텐트)에서 지내면서도 그 깊고 맑은 눈은 변하지 않는다. 차도르에서 5일을 함께 지냈다.
▲ 이란의 아이들 지진으로 무너진 도시 밤(Bam). 차도르(천막텐트)에서 지내면서도 그 깊고 맑은 눈은 변하지 않는다. 차도르에서 5일을 함께 지냈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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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가 타고 있었다. 목덜미에 알루미늄 배기통을 길게 달고서도 대합실의 찬 기운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난로 주변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긴 나무의자에 기대앉아 새벽버스를 기다렸다.

“어휴 추워! 사막에 무슨 눈이람!”

아내와 난 막 하마단에 도착한 참이었다. 눈 때문에 버스가 한 시간 늦었다. 그래서인지 나와 있기로 한 베흐루즈 가족이 보이지 않았다. 대합실 내 공중전화도 불통이었다. 잠시 주저하다 무작정 터미널 관리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저…, 한국에서 온 여행잔데요.”
“오! 코리아!”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기다리기로 한 친구가 안 나와서.”
“…….”

영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다. 손짓으로 전화기를 가리켰다. 흔쾌히 웃으면서 전화선을 당겨줬다. 아직 밤(Bam)에 있을 베흐루즈에게 전화했다.

“우리 지금 하마단인데 아무도 없어!”
“카보드라항까지 버스타고 가서 다시 택시타고 샤베마을로 가야해!”

주변도시로 가서 다시 택시를 타라는 말에 얼른 대답을 못하자, 그는 사무실 사람을 바꿔달라고 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통화하더니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그리곤 따라오라고 했다.

하지만 조금도 당황해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부터 아내와 난 짐짝처럼 가만있으면 샤베마을로 배달(?)될 것이었다.

버스 기사가 차 세우고 정류장 안내하기도

2년 8개월 동안 세계 47개국을 여행하는 동안 이란인처럼 이방인에게 친절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공원이나 광장을 서성거리면 틀림없이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차 한 잔 같이 하시겠어요?”

이스파한에서.
▲ 페르시안 전통 찻집 이스파한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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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쯤 후. 달착지근한 이란 차와 세상없이 맑은 사람들의 웃음에 행복해져 갈 즈음, 그들은 이방인을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그뿐 아니었다. 전화카드를 어디서 사느냐고 물어보면 자기 카드를 불쑥 내밀었고, 버스정류장을 물어보면 가던 길을 되돌려서라도 동행했다. 가끔은 페르시안 글자 때문에 혹여 버스를 놓칠까 함께 기다려주고, 심지어 차비까지 대신 내주며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단단히 당부하고서야 돌아섰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스파한에서 하마단행 버스표를 예약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미르 카비르 호텔!”

모든 승객들이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운전사에게 외치고 버스에 올랐다.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 해두면 내릴 즈음 여기저기서 알려주기 때문이다. 마침 퇴근시간. 버스는 통로까지 꽉 차있었다.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어디서 내려야하나 창밖을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미스터!… 호텔!”

이런, 황당한 일이! 다름 아닌 운전사였다. 도로 한가운데 버스를 세워둔 채로 사람 사이를 비집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고맙다며 얼른 차비를 내자, 그는 웃으면서 단호히 거부했다. “나(No)!” 급히 버스에서 내려서자, 바로 호텔 문 앞이었다. 

베흐루즈 역시 이란의 첫 도시 밤(Bam)에서 헤매고 있을 때 도와준 친구였다. 설날을 함께 보내기로 했지만 정작 그는 일이 바빠 오지 못하고 아내와 나만 방문하는 길이었다.

뒤편에 이란에서 가장 오래된 밤(Bam) 성이 무너져 있다. 베흐루즈는 밤(Bam) 재건공사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은 국경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 상수씨.
▲ 친구 베흐루즈 뒤편에 이란에서 가장 오래된 밤(Bam) 성이 무너져 있다. 베흐루즈는 밤(Bam) 재건공사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은 국경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 상수씨.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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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예상대로였다. ‘이방인 배달 작전(!)’이 시작되었다. 우릴 승용차에 태웠다. 곧 또 다른 터미널에 도착했다. 근거리행 터미널인 모양이었다. 사무실 직원이 인계했다. 아내와 나를 인계받은 미니버스 운전사는 누군가와 통화했다. 1시간 후. 비포장도로에 버스가 멈췄다. 그곳에는 택시 한 대 기다리고 있었다.

“헬로우! 베흐루즈 사촌동생 아사디예요!” 

그의 택시를 타고 20분쯤 달렸다. 거친 사막 한 가운데에 거짓말처럼 마을이 나타났다. 듬성듬성 초원도 보였다. 멀리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양떼가 풀을 뜯었다. 아내가 탄성을 질렀다.

“바로 여기야! 내가 늘 와보고 싶었던 바로 그곳이라고!”

우리는 물고기처럼 차를 마셔야 했다

집안에 들어서자 온 식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페르시안 카펫 위에 과일 바구니, 케이크, 과자, 부추같이 생긴 식물, 꽃, 금붕어 어항 등이 놓였다. 설날 상차림인 모양이었다.

3월 20일 오전10시 30분(이슬람력 1월 1일). “살레 노 모바락(Happy New Year)!” TV에서 죽은(!) 호메이니가 연설을 시작했다. 현재 종교지도자와 대통령 연설이 이어졌다. 마침내 아버님이 <꾸란>을 꺼내 펼쳤다.

‘아~, 연설만으로도 충분히 지루한데…. 또 <꾸란> 낭독을?’ 

손으로 짠 페르시안 카펫 위에 설날 음식이 차려졌다. 보이는 친구가 '아사디'다.
▲ 살레 노 모바락(Happy New Year) 손으로 짠 페르시안 카펫 위에 설날 음식이 차려졌다. 보이는 친구가 '아사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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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웬일! 아버님이 꾸란 속에서 빳빳한 5,000리알 지폐를 꺼내 어머님부터 아들 둘, 딸 부부, 손자에게 차례대로 한 장씩 나눠주시는 게 아닌가! 나도 장난스럽게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아버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한 장 척 얹어주셨다.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한 장 나눠주자 지폐는 딱 떨어졌다. 미리 우리 몫까지 준비하신 게다. 순간 아내의 눈에 물기가 비쳤다. 세뱃돈을 받고 보니 고국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곧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우리의 전담 통역관으로 임명된 아사디가 한 사람씩 소개했다. 그런데 촌수가 좀 이상했다.

“잠깐만! 이 분이 베흐루즈 여동생의 남편이야. 그치? 그런데 네 형이라며? 넌 베흐루즈의 사촌동생이라 했잖아?”
“그게 뭐? 그러니까, 우리 형은 베흐루즈의 사촌동생이자 처남인 거지. 우리 엄마 역시 얘(베흐루즈 여동생)한테는 이모이자 시어머니가 되는 거고!”

이후에 수도 테헤란에서 중산층 가정의 초대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도시인들도 한가지였다. 사촌끼리의 혼인은 이란에서 아주 흔했다. 그 때문에 200여 가구에 2,000여 명이 살고 있는 샤베마을은 거의 대부분이 서로 친척이었다. 

그리하여 아내와 난 여행 떠난 이후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야했다. 이 집에서 점심. 저 집에서 저녁. 초대에 불려 다니느라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잠깐 틈을 봐서 마을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어, 삼촌이 차 마시러 오라고 저기서 부르시네? 저긴 또 형수 이모님 아냐. 차 한 잔 안 마시러 온다고 아침부터 섭섭해 하시던데!”
“야, 아사디! 우리가 무슨 물고기도 아니고, 좀 어떻게 안 되겠냐?”

 샤베마을의 양 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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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내와 난 물고기처럼 하루 종일 차를 마셔대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싫을 리가 있겠는가! 며칠 사이 우리 부부도 샤베마을의 식구가 된 것처럼 즐거웠다.

하루는 아사디의 큰형 코르세 집에 온 식구가 모였다. 공무원인 코르세는 껄렁대는 아사디까지도 꼼짝 못하는 걸 보아 집안 내 발언권이 꽤 센 모양이었다.

“태! 권!”

코르세의 아들 알리가 신통치 않은 발차기를 내게 선보였다. 꼬마 나름대로의 이방인에 대한 환영인사인 셈이었다. 그때였다. TV에서 격양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팔레스타인 지도자가 이스라엘 청년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보도였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데. <꾸란>에서도 ‘빵 두 조각이 있으면 한 조각은 반드시 타인에게 나누어주라’고 가르치거든. 기독교나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모두 변질되었어. 서로 전쟁과 테러만을 정당화하지!”

코르세는 한 숨을 쉬었다. 잠시 침묵. 내가 오늘의 이란에 대해 듣고 싶다고 부탁했다.

“이란의 오늘? 오늘과 내일이 다른데. 풋, 물가 말이야. 이란은 대학 졸업한 엘리트만이 정상적인 직업을 가지는 나라야. 도시인은 월급 받아 한 달 집세 내면 그만이고. 너희들 여행하면서 자가용 택시 많이 봤지? 직업이 두 개라야 먹고 산다는 얘기야. 내가 왜 영어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지 아니? 이민가려고 했거든!”

한국처럼 잘 사는 나라가 왜?

“그랬구나. 그런데 너희 나라만 그런 건 아냐. 한국도 이민 가는 사람들이 많아!”

“정말? 왜? 한국처럼 잘 사는 나라가….”
“글쎄…. 뭐라고 할까. 있잖아… 음, 만약 내 눈엔 샤베마을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인다면?”

“그럴 리가?”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도 있어!”

아내와 내가 이란을 여행하면서 받았던 그 숱한 관용에 대해 말해주었다. 깊고도 맑은 사람들의 눈에 대해서도. 그는 고개만 끄떡거렸다.

그날 밤 나는 코르세와 많은 얘기를 했다. 이란에 대해서. 한국에 대해서. 그가 알고 싶어 하는 세상에 대해서. 내가 그리워하는 세상에 대해서. 삶과 여행과 행복에 관해서도.

아랫줄 맨 오른쪽이 아버님. 그 앞 꼬마가 태권소년 알리. 윗줄 맨 왼쪽이 어머님. 그 옆이 아사디. 나그네와 동무한 친구가 코르세다. 그외 베흐루즈의 동생들과 이모님들.
▲ 샤베마을 사람들 아랫줄 맨 오른쪽이 아버님. 그 앞 꼬마가 태권소년 알리. 윗줄 맨 왼쪽이 어머님. 그 옆이 아사디. 나그네와 동무한 친구가 코르세다. 그외 베흐루즈의 동생들과 이모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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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만에 떠나는 날이었다. 코르세가 새벽출근길에 작별인사를 하러왔다. 곧 터키 국경을 넘어갈 우릴 위해 ‘터키어 활용 메모’를 만들어 왔다.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어머님은 도시락을 손에 쥐어주고 아버님은 편지 쓰라는 시늉을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를 꼬옥 껴안고는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아사디가 마지막 떠나는 길까지 함께했다. 아내와 나를 쫒아 다니느라 닷새나 택시영업을 쉬었던 그였다. 그가 또 다시 물었다. 며칠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느냐고. 버스를 타는 순간 그가 편지를 던지듯이 내 손에 쥐어줬다.

버스에 앉았다. 어머님 도시락을 풀었다. 이란 빵 ‘난’과 삶은 달걀과 설탕이었다. 눈물이 맺혔다. 아사디의 편지를 펼쳤다. 모두 페르시아어다. 알아 볼 수 있는 건 마지막 한 줄 “I LOVE YOU!"뿐이었다. 말은 곧잘 하더니 글까지 익히진 못한 모양이다. 웃음이 났다. 마지막 순간에야 편지를 던진 이유가 그거였다.

도시락과 편지를 번갈아 보며 울다 웃다 하는 사이, 샤베마을이 점점 멀어져갔다.

 아사디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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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계여행, #배낭여행, #이란, #페르시아, #하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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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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